1장'''''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달빛에 의존해 희수는 급하게 뛰고 있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주택가 골목길. 달빛에 살짝 반사된 희수의 눈은 두려움을 가득 담은 검푸른 빛을 띠고 위태롭게 반짝였다. 풀어헤친 머리와 계절에 맞지 않는 프렌치 코트 사이로 살짝 보이는 면 잠옷은 희수가 옷을 챙겨 입을 사이도 없이 급히 집을 나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포장이 잘 된 도로를 걷는 희수의 발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오른쪽으로 쭉 이어진 높은 담벼락을 통해 이 동네가 제법 산다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임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희수는 분명히 예전에 와 본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 곳이 어딘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지금 희수는 쫓기고 있는데 무엇에 쫓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희수는 답답한 마음에 뭔가 알아내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금 전까지도 쭉 늘어서 있던 높다란 담벼락들은 오간데 없고 희수의 주위는 온통 허리까지 닿는 수풀 밭으로 변해 있었다. 수풀을 헤치고 보니 좁다란 자갈길이 보였고, 그 길은 어린아이의 몸통 정도의 넓이로 밖에 안보였다. 어른 혼자 지나가기에도 좁아 보이는 그 길에 희수는 발 들여놓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 사이 이미 뒤쪽에서 검고 거대한 형체가 바싹 다가왔다.'‘도망쳐야 해. 어떡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희수는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재촉했지만 희수의 다리는 땅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제 꼼짝없이 잡혔다고 생각한 순간 아슬아슬하게 희수의 몸이 움직였고 자갈길을 향해 힘껏 다리를 뻗었다. 한시가 급한대도 초조한 마음과는 반대로 희수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겨우 뒤쫓아 오는 손길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달아나는 희수는 발에 돌이 박히고 풀잎에 발가락이 쓸려 찢겨나가도 멈추어 설 용기가 없었다.'‘뒤쫓아 오는 게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희수는 희미한 달빛에 의존해 수풀을 헤치고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그 거대한 형체가 바싹 뒤쫓아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체가 없는 손이 뒷머리를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뒷덜미에 소름이 쫙 돋았다.'‘지금이 밤인가, 아님, 새벽인가?’'갑자기 눈앞에 검은 강물이 펼쳐져 희수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실낱같은 달빛에 반사된 강물은 칠흑같이 검고 무서웠다. 방금까지 절박한 희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겨우겨우 한걸음씩 움직이던 발이 이번엔 쉽사리 멈춰지지 않았다. 천천히 내딛은 발이 한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에 심장이 죄어드는 공포를 느끼며 희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안 되는데, 이대로 떨어지면…… 아악.’ '희수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느라 온 몸이 흥건히 젖은 채 눈을 떴다.'또 다시 같은 악몽. 최근 들어 더 자주 이 악몽을 꿨다.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본 후부터인가. 이제는 벗어날 때도 됐건만. 3년째 계속 같은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3년 전 그때에 도망치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혔어야 했나? 희수는 도리질을 쳤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