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에비스 키쿠치 가(家).'도코노마(그림이나 꽃꽂이를 감상하기 위해 다다미방 벽면에 만들어둔 공간)가 갖추어진 쇼인(서재 겸 방) 안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어두워 사위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좌식 책상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대치 중이었다. 상석에 앉은 남자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였고, 건너편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이는 건장한 젊은 사내였다. 언뜻 보기에도 둘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한참을 이어진 침묵을 먼저 깬 이는 나이 든 노신사였다.'"한낱 사무라이였던 우리 조상 키쿠치 다케노 상께서 에도 막부 시절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워 다이묘가 되신 이후로, 삼백여 년이 지났다. 그 후 오랜 세월 우리 키쿠치 가문이 어떻게 이어올 수 있었는지 아느냐?"'굵직한 음성에서 거부할 수 없는 연륜과 권위가 느껴졌다. 그러나 젊은 남자는 여전히 형형히 안광을 빛내고 있을 뿐 꾹 다물린 입술을 열지 않았다. 물음을 띄운 이 역시 그다지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곧장 도코노마에 걸린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검을 바라보았다. 마지못한 듯 젊은 남자의 시선 역시 그곳으로 돌려졌다.'"바로 󰡐충(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