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는 패션 천재 3권
다시 사는 패션 천재 3권
목차
51화 합의하자
52화 술값은 누가 내나
53화 칼 들고 찾아가기 전에
54화 방송으로 보면 또 다르다
55화 전화로는 못할 이야기
56화 자식처럼 키운 회사
57화 또 하나 인수해야 하나
58화 샘플 완성본
59화 미국에서 연락드립니다
60화 뼈 묻어야지
61화 안 어울려
62화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이
63화 협상이냐, 협박이냐?
64화 달콤하지 않은 제안
65화 파트너부터 시작하죠
66화 화보 나왔습니다
67화 나랑 어디 좀 가자
68화 원래 모델 했었대
69화 개새끼의 결혼식
70화 내가 원조다
71화 너 입힐 거야
72화 드디어 밥값 한다
73화 그게 최선입니까?
74화 모든 준비가 끝났다
75화 가을 신상 오픈
다시 사는 패션 천재 3권
51화 합의하자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코튼캔디는 신상을 내겠다고 하고, 파운딩바니도 다음 주에 샘플 제작 들어간다.
룩북 촬영은 김재영 포토그래퍼, 파운딩바니 런칭 아이템을 촬영해 줬던 그 사람이 맡기로 했다.
며칠 있으면 드라마 〈패션의 여왕〉에 윤원희 블라우스가 나올 테고, 또다시 행복한 비명이 터질 예정이다.
그렇기에 사무실 분위기는 더없이 훈훈했다.
은주에게 전화가 걸려 오기 전까지는.
지이이잉… 지이이잉….
은주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이걸 받아, 말아?
“언니, 안 받아요?”
“…받아야지. 그래, 받자.”
무슨 말을 하나, 한번 들어나 보자.
“무슨 일이세요?”
―네 변호사라는 사람이 다녀갔다.
배상진 사장, 은주의 큰아버지였다.
좋은 이야기가 오갔을 리 없는데, 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는 대체 뭘까.
“네, 들었어요. 근데 전화는 왜 했어요? 고소 이야기라면 변호사랑 하시면 되는데요.”
―합의하자.
“합의요? 그걸 왜 해요? 그냥 큰아빠가 고소 취하하면 되잖아요.”
―맨입으로 그럴 수는 없지. 윤원희 블라우스랑 스커트, 나한테 넘기면 취하해 주마.
은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싼 전관 변호사가 질 리 없는 싸움이라고 장담했는데, 저런 합의 제안이라니?
“다 이긴 싸움이라고 착각하시나 보네요. 저한테 합의금을 주셔야 하는 상황일 텐데요?”
―착각? 아니지, 아니지. 나는 싸움을 건 게 아니야. 기회를 준 거란다.
“기회는 무슨 기회요?”
오히려 8년 동안 기회를 빼앗아 온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은주는 불안감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은주야, 나는 소송에서 이길 생각 하나도 없다.
“못 이길 고소를 걸어 놓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너, 디자이너로 성공할 수 있다며 내 뒤통수 때리고 튄 거 아니냐.
“말이 좀 그러네요. 아무튼, 그래서요?”
―그런데 내가 도와주지는 못해도 방해는 할 수 있거든.
“방해요?”
그리고 그 불안감은 기어코 정체를 드러냈다.
―커리어.
“커리어… 요?”
―그래. 8년 동안 니 손으로 짝퉁을 만들었다는 그 커리어.
“……!”
타닥! 탁!
은주는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흐흐흐! 으흐흐흐흐!
아직 통화가 끊기지 않았다. 핸드폰에서는 음습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짝퉁이나 만들던 년이 디자인한 옷을 10만 원에 팔았다? 예약까지 받아? 이 업계 좁다. 소문나면 넌 업계에서 퇴출이야, 퇴출!
은주는 손을 파르르 떨었다. 핸드폰을 주워야 하는데 몸이 마비된 것만 같았다.
큰아버지의 말대로였다. 짝퉁 디자이너라는 이력 한 줄 들어가면 커리어가 박살 난다.
디자이너로 성공하겠다는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고,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이대로 엉엉 울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입을 막을 기회를 주마. 그 대가는 윤원희 블라우스랑 스커트. 남는 장사 아니냐?
스피커폰도 아닌데 저 목소리는 왜 이리 또렷하게 들리는지.
은주는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면서 핸드폰을 쥐었다. 소름 돋게 싫지만 이대로 끊어서는 안 된다.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얽혀 있어요.”
―그 회사 차린 애새끼들 얘기냐? 아니면 내 뒤통수 치고 너랑 붙어먹은 동산어패럴?
“아무튼… 아무튼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 한번 머리 맞대고 잘 얘기해 봐라. 하루 주마. 모레부터는 내가 누구한테 떠들지 몰라.
“…이만 끊을게요.”
탁.
은주는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내려서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핸드폰만 계속 내려다봤다.
* * *
“누나, 괜찮아요?”
은주 누나가 통화를 시작한 순간부터 사무실은 고요해졌다. 다들 긴장한 탓이다.
나, 설희, 나리, 효주 씨, 그리고 어머님까지 모두 숨 죽이며 은주 누나의 안색을 살폈다.
그 결과가 이거다.
“명준아….”
세상 불쌍한 표정.
눈물만 안 흘렸지, 울음 탓에 과호흡이 와서 숨소리가 쌕쌕거린다. 보고 있기 참 괴롭네.
“누나, 그냥 울어요. 울고 나서 얘기해요.”
“아니야. 울기는….”
“안 보이게 해 줄 테니까 그냥 울라고요.”
은주 누나를 확 잡아끌어서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은주 누나는 나를 밀치지 않았다. 안긴 순간부터 몸을 떨면서 눈물을 쏟아냈다.
“흑… 으으, 아아아아!”
이렇게 울 거면서 강한 척하기는.
“은주야….”
어머님이 은주 누나를 부르길래, 검지를 입에 대고 ‘쉿!’하며 말렸다.
지금은 어머님이 같이 운다고 나아질 게 없으니까.
“더 울어요. 누나가 운다고 뭐라 할 사람 없어요.”
6월답게 옷이 얇아져서 그런가, 가슴팍이 젖는 게 잘도 느껴진다.
그냥 젖으라고 두고, 은주 누나의 등을 다독였다.
토닥토닥.
“내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내가 대체 뭘! 으아아앙!”
토닥토닥.
“왜 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해… 이제야 사람답게 사는데 도대체 왜!”
은주 누나가 내 옷을 꽉 쥐며 소리쳤다. 슬슬 울음기는 가시고, 화가 치미는 목소리였다.
한참 울 줄 알았더니, 의외로 회복이 빠르네.
“누나, 다 울었어요?”
“…다 울었어.”
“그럼 얼굴 좀 보여 줘요.”
은주 누나가 얼굴을 뗐다. 눈물 때문에 화장이 지워지고 번지고 난리다.
아… 저 화장. 내 가슴에 은주 누나 얼굴 프린트가 찍혀 있겠네.
하지만 그걸 내색했다가는 분위기가 깨진다. 이따가 손세탁이라도 해서 입은 채로 말려야지.
“이제 차분하게 얘기 좀 해요.”
“응….”
“배상진 사장님이 뭐래요?”
“내 상진실업 재직 이력… 업계에 소문내겠대. 막고 싶으면 합의하라고….”
호오, 머리 많이 쓰셨네.
협박인데 협박으로 신고할 수도 없고, 합의 제안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고.
“처음부터 이기려고 건 고소가 아니었겠네요.”
“그렇대.”
“멍청하게 호구 잡힌 줄 알았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거네요.”
검사만 믿고 있으면 재판에서 이길 줄 아는 멍청이는 아니었다는 거지.
역시 머리 나쁜 놈들은 빌런짓도 못한다는 진리가 또 이렇게 증명된다.
뭐, 그래 봐야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진짜 어떡해, 명준아? 블라우스랑 스커트 넘겨주고 입 다물라고 해야 돼? 내 미래를 위해서?”
은주 누나는 울음만 그쳤다 뿐이지, 여전히 불안해했다. 보는 내가 다 안쓰럽다.
“안 돼요. 얘기했잖아요, 누나. 합의 받아 주지 말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