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8. 부부 내외
9. 겉보기식 부부
10. 열병
11. 궁지에 몰아넣는 법
12. 증발
13. 부재
14. 자각
8. 부부 내외
평일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각.
“점심 약속 끝나시면 오후 일정은―”
세완의 일정 보고와 함께 이제 막 로비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였다.
“우왓! 오늘 커피값은 김 대리 당첨!”
발을 내딛다 말고 준경은 자연스레 소란스러운 방향으로 돌아봤다.
사내 1층 카페테리아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 웃고 떠드는 얼굴들이 익숙했다. 총괄팀 직원들이었다.
“으하하하, 나만 아니면 돼!”
“상아 씨 잘 먹을게.”
“김 대리님 잘 먹겠습니다!”
그 속에 상아가 있었다.
난처한 얼굴은 금세 걷히고 이내 흔쾌히 웃는 얼굴로 어느 여사원을 향해 커피 말고 다른 걸 마셔도 괜찮다 어깨를 토닥여 주는 그녀의 모습에서 준경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 늘 그렇듯 사람들 속에서 잘 웃고 자상하게 눈을 맞춰 주는 상아를 보고 있자니 준경은 자연스레 며칠 전 평창동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고주망태가 된 차준홍의 난장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고, 명 여사의 고희연은 엉망이 되었다.
그리고 상아와는…….
“상무님, 은행장님 출발하셨답니다. 저희도 이제 움직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죠.”
세완의 재촉에 준경은 태연히 발길을 돌려 출입구로 향했다.
슈트 팬츠 주머니에 밀어 넣은 한쪽 손이 작게 주먹을 움켜쥐었으나 준경은 결코 밖으로 티 내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혼해 주세요.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든 간에 결과적으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빚은 나 몰라라?
―……이 상황에서까지 꼭 그런 얘기까지 해야 해요?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치에 맞는 계산을 하자는 게 김상아 씨는 구질구질합니까?
―…….
―책임감 있게 행동해. 객기도 뭐가 있을 때나 부리는 겁니다.
―차준경 씨.
―아무것도 없는 네가 지금 하는 건 같잖은 청승일 뿐이고.
눈물 뚝뚝 흘리며 원망을 짓씹던 입술과 구겨진 미간.
―당신 정말…… 개새끼구나?
끝내 여린 입술 사이로 평생 들을 줄 몰랐던 욕설을 내뱉던 그녀를 떠올리며 준경은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구질구질한 개새끼 취급쯤 상관없었다.
아주 찰나, 구태여 청승이라는 비난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후회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후회해 봤자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선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 됐을 뿐이었다.
빚이든 뭐든. 당장은 상아의 발목을 붙잡은 것으로 준경은 만족했다.
또다시 이혼을 논하다니, 가당키가 한가?
대체 왜 자신이 그런 식의 통보를 받아야 하는지 준경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자 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한낱 객기일 뿐일 것이다. 고작해야 김상아의 토라진 감정 따위 얼마 안 가 다시 돌아올 것을 준경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게 김상아니까. 김상아는 그래야 하니까.
그런데…….
“하아.”
“왜 그러십니까, 상무님? 얼굴이 안 좋으세요.”
“아닙니다, 가죠.”
분명 원하는 대로 됐다. 됐는데… 뜻대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게 만든 것은 분명한데, 이 뜻 모를 조바심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매사 누구에게나 친절한 여자였다.
특출나게 살가운 성격은 아니나, 습관적으로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 다정한 천성을 모르지 않았다.
서로의 관계도, 여전히 회사 안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부지런히 자기 일에 열심인 김상아도 모든 게 다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보이는 여자, 이름 한 번 부르면 금세 돌아봐 줄 그녀가 왜 이토록 멀게 느껴지는 건지.
정체 모를 감정이 낯설고 불편해서라도 준경은 당장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저절로 걸음이 빨라질 즘이었다.
출입구의 회전문까지 몇 발짝 남겨 두었을 무렵. 회전문을 지나 다급히 안으로 들어서던 한 남자가 돌연 준경의 정면에서 제법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
그 얼굴이 낯선 듯 낯설지가 않다.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남자가 가볍게 묵례하며 고개를 든 순간, 미묘한 눈빛을 마주치고서야 준경은 깨달았다.
언젠가 어느 건물 사이에 몸을 숨기고 무언가를 그토록 훔쳐보던 눈이었다.
준경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남자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응시했다.
<이은섭>
그래, 이은섭이라고 했었다. 친한 직장 동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무엇이라고.
그런 존재에 구태여 괜한 신경 쓸 필요 없지.
준경은 뒤늦게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뒤 차갑게 은섭의 옆을 스쳐 지났다.
건물 앞에 대기 중인 차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럼, 그 새낀…… 정리했을까?’
새삼스럽게 왜 불현듯 상아의 숨겨 둔 남자의 잔존 여부가 궁금해지는 걸까.
무덤덤하고자 애썼던 노력이 한순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목덜미를 타고 머리끝까지 신경 줄이 예민하게 당기는 느낌에 준경은 낮게 욕설을 뇌까리며 눈을 감았다.
“정 비서, 라디오 좀 끄죠.”
“……네, 상무님.”
라디오 잡음마저 꺼져 버린 묵직한 적막 속.
?이혼해 주세요.
이혼해 주세요.
이혼―
상아의 음성이 이명처럼 귀를 괴롭게 했다.
좀체 답을 몰라서.
“씨발, 이혼…….”
준경은 짓씹듯 낮게 탄식할 뿐이었다.
* * *
“잘 먹는 애가 왜 통 못 먹어. 혼자라서 그러니?”
오랜 적막을 가르는 목소리에 상아가 젓가락질을 멈칫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젓가락으로 엄한 밥공기만 헤집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천천히 고개 든 맞은편에 꽤 수척한 얼굴의 명인화 여사가 있었다.
“먹고 있어요. 할머님도 많이 드세요.”
퇴근 직전, 부산으로 출장 간 준경을 언급하며 혼자 저녁 먹지 말고 들르라는 호출을 받은 게 계기였다.
저택 앞에 다다랐을 때야 언젠가 자신의 허락 없이는 평창동을 찾지 말라던 준경의 경고가 생각나긴 했지만, 상아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이혼해 달라는 제 두 번째 애원마저도 무참히 짓밟은 준경에게 사사로운 일로 허락을 구하는 일 따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자존심이라면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치기 어린 감정에 배짱 좋게 초인종을 누르고, 저택의 대문을 지난 후에야 상아는 조금 후회했다.
“눈치 볼 거 없어. 준홍이 그놈 자식이 문제지, 상아 네가 뭘 잘못했다고.”
“그치만…….”
“됐다, 아가. 그날 일 간신히 잊는 중이니까 상아 너도 없던 일처럼 굴어.”
“…….”
“많이 먹기나 해. 응?”
장손이 한바탕 휩쓸고 간 소동의 여파로 고희연 이후로 처음 마주한 시조모의 생기를 잃은 굳은 얼굴 탓이었다.
준경과 계속 사느냐 마냐를 두고 제 고민에 빠져 있느라 미처 시조모를 챙기지 못한 게 뒤늦게 죄책감을 일으켰으나, 명 여사는 정말이지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상아를 대했다.
“입맛 도는 데 보리굴비만큼 좋은 게 없다, 얘야.”
그녀는 태연하게 보리굴비 살점을 곱게 발라 상아의 숟가락 위에 올려다 주며 턱짓으로 재촉하기도 했다.
왠지 울컥하는 마음을 꾹 눌러 삼키며 상아는 마지못해 꾸역꾸역 입안으로 밥을 밀어 넣었다.
맛도 모른 채 의미 없는 턱짓을 이어 나가길 한참.
상아 역시 조금 전 명인화 여사가 제게 해 준 그대로를 따라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굴비 살점을 고이 발라 이제 막 녹차 물에 담긴 밥을 한술 뜨는 명 여사의 숟가락 위로 올려 주며 말했다.
“많이 드시고, 기운 내세요.”
할머님 야위신 모습, 마음 아파서 싫어요.
옅게 입꼬리를 올리자 곧이어 명 여사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밥 한술을 입안으로 밀어 넣고서야 입가에 주름을 만들며 미소 지었다.
별 대화 없이 잔잔한 미소와 따뜻한 시선이 오가는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식사 후 자연스레 자두와 복숭아로 내어진 가벼운 다과상이 응접실 테이블에 차려졌을 때였다.
“오셨어요?”
골프 약속이 있어 외출했던 차인철 회장이 현관을 지나고 있었다.
명 여사를 따라 상아 역시 시조부를 마중 나갔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라는 듯 짐짓 놀란 표정도 잠시. 차 회장은 잠시 주변을 살피고는 상아를 향해 물었다.
“준경이 없이 혼자 온 거냐?”
“예, 할아버님. 식사는 하셨―”
“잘됐다! 상아, 여기 좀 앉아 봐라.”
“상아 이제 가 봐야 해요. 또 무슨 얘길 하시려고?”
“누가 잡아먹나? 임자는 가만있고. 상아 얼른 이리 와 보래도.”
기다렸다는 듯 소파 상석에 앉아 재촉하는 차 회장의 눈짓에 따라 상아는 서둘러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밥만 먹으면 보내 준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정말.”
준경의 눈치가 보인다며, 명 여사가 채근하는 목소리에도 차 회장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대뜸 말했다.
“잘 들어라, 새아기. 그날 준홍이가 무슨 깽판을 치고 난리가 있었든 간에 나는 모르는 일이다.”
“네? 할아버님?”
“나는 준경이 아닌 다른 누구한테도 우리 차일 넘겨줄 생각이 없다는 말이야.”
집안 특성인가 싶을 만큼 묵직하고 낮은 음성에 상아가 절로 움찔했다.
“할아버님, 그 얘긴 준경 씨와―”
“그러니까, 아이 가져.”
“……네?”
아무것도 모르는 이의 불같은 성정과 재촉.
“임신부터 준비하란 말이다.”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임신이라니. 차준경의 아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