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프롤로그
1. 결혼 사정
2.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3. 악의적 결혼 유지
4. 무엇도 아닌
5. 모순
6. 오해의 산
7. 나락의 끝
프롤로그
최근 이루어진 인수합병 건으로 인해 격무에 시달리다시피 보낸 일주일이었다.
퇴근한 준경은 지친 얼굴로 막 현관을 들어섰다.
“오셨어요.”
늘 그랬듯 오늘도 상아가 중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가서 일 봐요.”
브리프케이스와 외투를 받아 주기 위해 뻗어 오는 손을 가볍게 마다하며 준경은 슬리퍼에 발을 끼웠다. 정해진 루틴대로 곧장 드레스 룸으로 갈 참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길을 터 주어야 할 아내가 돌연 말을 붙여 오기 전까지는.
준경은 잠시 멈춰 서 의아한 표정으로 상아를 내려다봤다.
“우선 씻고 얘기하죠.”
“아뇨. 빨리 말씀드릴수록 좋을 것 같아서요.”
몰린 피로감 탓이었을까.
“대체 뭐길래.”
차가운 한숨 끝에 준경은 다소 언짢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나 예상한 반응인 듯 상아는 태연히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어 보였다.
“도장 찍어 두시면 일주일 내로 법원에 제출할게요.”
“……뭐?”
“서류 정리되는 대로 나가겠습니다.”
준경의 눈이 봉투의 상단 모퉁이에 박힌 출처를 빠르게 스쳤다.
<서울가정법원>
두 눈 똑바로 뜨고 있으나 단번에 상황 파악이 불가능했다.
상황은 안 읽히는데, 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감정은 뭘까.
“그러니까 이게…….”
“협의이혼 서류입니다.”
“…….”
“저희 결혼 계약 만료일이 다 돼 가서요.”
“그래서 나더러 도장을 찍으라고?”
“네.”
“…….”
기어이 뜻 모를 감정의 원흉이 눈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 잘 빚은 조각 같은 얼굴에 와락 실금이 갔다.
‘……이렇게 갑자기?’
뾰족하게 날 선 준경의 모습에도 상아는 태연하기만 했다.
“합의이혼이라도 빠르면 한 달, 보통은 두 달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
“그 정도면 계약서상의 만료일과 시기가 맞는 것 같아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하.”
특유의 똑 부러진 성격, 잘 알지.
매사 맡은 일에 책임감 있는 태도와 군더더기 없는 결과물을 내놓는 그녀를 좋아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내 부하 직원인 김상아로서의 해당 사안이다. 이곳 신혼집에서는 아니다.
차준경의 아내로서 김상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해도 토 달지 않고 순순한 태도를 보이며 개인적인 뜻이나 생각을 밝히지 않는다.
그런 내용이 계약서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 스스로 고수해 온 태도였다.
그래 놓고 상의도 없이 이혼 통보라니.
예고 없던 상황에 준경은 당황스럽다 못해 불쾌할 지경이었다.
“김상아 씨.”
“네, 상무님.”
“…….”
무엇보다 저 말투.
더불어 이름이 아닌, 격식을 차린 호칭까지.
비즈니스 파트너를 대하는 듯한 그녀의 꼿꼿한 태도가 묘하게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새삼 2년 전, 결혼 제안에 고개 끄덕이던 유순한 얼굴과 비교가 된다.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던 얼굴, 절박하고 애처롭던 눈빛과 순진한 표정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어쩌면 그사이 타고난 말갛고 단아한 외모에 더해진 도도하고 성숙한 눈빛, 우아함이 물씬 풍기는 그녀 특유의 분위기가 한몫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걸, 왜 여태 인지하지 못했을까?’
느닷없는 깨달음이 준경은 몹시도 거슬렸다.
“남자 생겼습니까?”
아니, 거슬리다 못해 골이 났다.
“……네?”
“누군데.”
“상무님.”
“얼마나 깊은 사이길래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식으로 통보를 때리지.”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언짢음을 드러내는 그의 반응에 상아는 조금 움찔했다.
“…….”
난데없는 준경의 추측이 의아했지만, 상의 없이 저지른 행동이 불쾌해 홧김에 나온 아무 의미 없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대답 안 할 겁니까?”
설마 그의 배알이 뒤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마음대로 오해해라, 뭐 그런 건가?”
그런 상아의 태도를 보고 허를 찔려 말문이 막힌 거라 단정 지은 준경이 일순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턱이 불거지도록 어금니를 눌러 씹은 채 그는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디뎠다.
“그럼 어디까지 해 볼까요, 오해.”
준경이 가까워질수록 상아는 뒷걸음질했다. 그 모습에 준경의 눈썹 사이가 미세하게 구겨졌다.
‘이젠 옷깃조차 닿기 싫다는 건가?’
달아나는 그녀를 집요하게 응시하며 준경은 비아냥대듯 말을 이어 나갔다.
“한 침대 쓰면서 몸은 안 섞어 주는 남편 때문에 김상아 씨가 그간 많이 외로웠나 보다― 그렇게 생각할까?”
“상무님, 그게 지금……!”
“좀체 여자 취급 안 해 주니 비참하셨나?”
“그만하세요.”
“겉으로 꼿꼿한 척은 했지만, 실상 김상아라고 별다른 거 있겠어? 아는 게 무섭다고. 한 번 경험해 본 게 있으니 몸은 달고, 남자 품이 필요했나 보지.”
입에 독을 품은 듯 내뱉는 말마다 악의가 가득했다. 준경을 바라보는 상아의 눈이 사정없이 일렁거렸다.
“뭐라……고요?”
“그래서, 그간 나 몰래 딴 새끼랑 배 맞추면서 재미 좋았습니까?”
“…….”
“아님, 슬슬 그쪽이랑 마음 깊어지니 죄책감 들어서 하루빨리 이 결혼부터 해치워야겠다― 그런 생각이 든 건가?”
“그만하시라고요.”
“그래서 상의 한번 없이 이딴 식으로 이혼 통보한 거냐는 말입니다.”
“상무님!”
독설을 인내하며 듣던 상아가 끝내 언성을 높인 바로 그때였다.
와르르― 손에 쥐고 있던 준경의 물건들이 바닥을 나뒹구는 동시에 그는 먹잇감의 목덜미를 노리는 한 마리 맹수처럼 돌연 태세를 바꾸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상아의 양 뺨을 붙들고 준경은 그대로 고개를 내렸다.
“흐읍…… 읏!”
여리고 야윈 등허리가 벽에 부딪힐 만큼의 거센 기세로 입술부터 집어삼켰다.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키스에 상아의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놀라 얼어붙은 뺨을 붙든 준경의 손은 자연스레 상아의 가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뻣뻣하게 경직된 몸을 강하게 끌어안자 맞댄 입술이 더 깊숙이 포개질 수밖에 없었다.
“하읍― 음…… 흐읍.”
벽과 준경의 가슴팍 사이에 갇힌 상아가 그의 슈트 자락을 욱여 잡고 밀어 보았지만, 준경은 도리어 달아나는 입술을 쫓아 고개를 틀었다.
퍽퍽― 밀쳐도 밀려나지 않는 단단한 몸이 철옹성 같았다.
어째서일까. 상아는 그를 차마 끌어안지도, 더 밀쳐 낼 수도 없었다.
‘마주 안아도 될까? 감히, 파고들어도 될까.’
두 손을 허공에 띄운 채 갈피를 잃고 머뭇거리길 얼마간.
고민을 비웃듯 그사이 집요한 혀가 기어코 엉겨 붙었다. 바르작대는 거친 몸싸움 뒤로 축축하고 열띤 호흡이 긴 복도를 채웠다.
맞붙은 몸이 달아오르기 무섭게 상아는 배꼽 아래 얽힌 두 다리 사이로 묵직한 양감을 느꼈다.
허물어지던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었다.
“……만! ……그만해요!”
반사적으로 준경의 가슴팍을 힘껏 밀쳐 내며 상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씹힌 듯 해진 입술은 둘째 치고, 충격적인 것을 보듯 준경을 향한 두 눈이 혼란에 일렁였다.
홀린 듯 시선을 내리자 터질 듯 부풀어 있는 준경의 앞섶이 보였다. 두툼하게 솟아올라 길게는 오른 허벅지까지 이어진 삿된 것의 정체를 알아차리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뒤늦게 밀려드는 수치감에 상아가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시선에도 준경은 시종 느긋했다.
그는 태연히 엄지로 제 입가에 번진 타액을 닦아 내며 더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새끼랑 배 맞은 거 아니었어?”
“당신은 정말―”
“왜 아직도 키스를 그렇게밖에 못 해, 상아야.”
“…….”
적나라한 비난에 상아의 낯빛에 전보다 더한 수치심과 모멸감이 스며들었다. 외려 그 반응을 바랐다는 듯 준경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님, 그 새끼가 그런 건 안 가르쳐 준 건가?”
그것도 아님, 그 집 개새끼는 순서도 모르고 허리부터 털었던가.
기가 찬다는 듯 터트린 헛웃음에 명백한 조소가 담겨 있었다.
있지도 않은 존재를 향한 준경의 오해가 지나쳤다. 그러나 알면서도 상아는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몰랐다.
뒤늦게라도 다른 사람 같은 건 없다고. 그저 때가 되어 이혼하려는 것뿐이라고.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정도를 모르고 화부터 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따져 묻기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그만큼 도발하면 됐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그쪽부터 정리해요.”
“…….”
“김상아 씨는 나 좋아하잖아.”
덜컥 허를 찌른 말이 심장까지 들쑤시지만 않았더라면.
딱딱하게 굳은 상아의 모습에도 준경은 도리어 기막히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좋아하는 남자 따로, 몸 섞는 남자 따로. 그런 거 너랑 안 어울려.”
“상무님.”
“침대에서 안아 줄 남자 필요하면 나 갖다 써요. 그게 뭐라고. 내가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