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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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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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이 맴도는 본부장실 안, 열음은 멀뚱히 선 채 품에 안은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 뜬 시간을 보니 2시 57분이었다.
“…….”
이번엔 제 눈앞에 앉은 치훈을 보았다.
그는 미동도 없이 2분기 매출 분석 자료를 보는 중이었다. 미진이 지난주 내내 작성한 것이었다.
열음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10분. 벌써 10분째 그녀는 가만히 서서 치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던 열음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저, 본부장님.”
“네.”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지만, 그 말에는 저를 그만 괴롭히라는 경고가 묻어 있었다.
저렇게 자료만 쳐다보고 있을 거면 저를 내보내고 보면 될 것 아닌가. 뻔히 사람을 앞에 세워 두고 투명 인간 취급하는 치훈이 얄미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치훈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까만 눈동자가 열음에게 향했다.
“까먹었어요.”
“네?”
“할 말을 까먹었다고.”
뻔뻔한 대답에 열음의 분노 게이지는 더욱 차올랐다.
하지만 4년 차 비서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열음은 와락 구겨지려는 얼굴을 활짝 펴며 말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다시 들어와도 될까요?”
“그럴래요, 그럼?”
치훈은 싱긋 웃으며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누르며 뒤돌아 막 문을 열려는데, 뒤에서 치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손 비서.”
우뚝 멈춘 열음이 곧장 치훈을 바라보고 네, 하고 답했다.
치훈은 드디어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반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억났어요, 할 얘기.”
“말씀하세요.”
“내 옷장 안에 조그만 짐이 하나 있어요. 그것 좀 버려 줘요.”
열음은 잘게 떨리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겨우 그거라고.
사람을 10분이나 세워 놓고 까먹은 이야기가 고작, 옷장 안에 있는 짐을 버려 달라는, 나중에 이야기해도 하등 상관없는 그런 지시라고.
치훈에게 왈칵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열음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괜찮다. 짐을 정리하는 것쯤은 간단한 일이니까. 10분 정도야 뭐 버렸다 치면 되지.
열음은 턱을 질끈 문 채 왼쪽 벽에 놓인 옷장으로 향했다.
목재로 된 문을 열자 정장과 코트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니 깊숙한 곳에 치훈의 말대로 조그만 짐이 보였다.
쪼그리고 앉아 내용물을 확인한 열음은 일순 미간을 좁혔다.
손을 뻗어 꺼낸 것은 하늘색 쇼핑백이었다.
더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주말에 제가 거절한 목걸이였다.
열음은 쇼핑백을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넣어 놓은 뒤 몸을 일으켰다.
“본부장님.”
“네.”
치훈이 눈도 들지 않은 채 대충 대답했다.
“이건, 제가 버릴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왜 아니죠.”
“쓰레기가 아니니까요.”
“맞는데, 쓰레기.”
170만 원짜리 쓰레기가 도대체 어디 있는데.
열음의 눈빛을 읽어 냈는지, 치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 그녀의 앞에 다가왔다.
“손 비서.”
마주 본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원래 같으면 치훈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일 법도 한데, 열음은 그러지 않았다.
“물건 가격이 어떻든 간에, 그 물건을 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건 효용 가치가 없어요.”
“…….”
“그래서 지금 그건 쓰레기가 맞아요.”
치훈이 옷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냥 버려.”
한쪽 입꼬리만 비스듬히 올린 치훈의 얼굴에 단호함이 서렸다.
열음은 정말이지 치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물을 주는 것도 자유지만 거절하는 것도 자유 아닌가.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못 받겠다고 한 게 그리 큰 잘못인지 모르겠다. 치훈이 이토록 저를 징글맞게 괴롭히는 이유도 모르겠고.
진짜 내 마음이 어떤지는 요만큼도 모르면서.
원망스러운 마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그냥 환불하면 되잖아요. 당차게 이야기하려던 그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치훈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열음은 깜짝 놀라 한 발짝 뒷걸음쳤고, 치훈의 미간은 한껏 구겨졌다.
문을 연 미진은 열음과 치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척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한 말투였다. 아니, 쫓기다 못해 잡아먹힐 것 같은 모양새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치훈이 고개를 틀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얗게 질린 미진이, 입을 달싹이며 대답했다.
“부사장님께서, 지금 부사장님께서 오신답니다.”
* * *
“말씀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아들 일하는 거 구경 좀 하고 싶어서 잠깐 들른 거다. 앉아.”
최중우는 느긋하게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치훈은 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도 미리 말씀을 해 주셨어야죠. 아버지가 단순히 제 아버지기만 한 건 아니잖습니까.”
“원래 이렇게 불시에 방문도 하면서 직원들 군기 잡는 거야.”
“언제적 군기입니까, 이게.”
치훈은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도 몇십 년 전에 사는 제 아버지 때문에 당황했을 부하 직원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다음부터는 저한테 메시지라도 하나 남겨 주세요.”
“뭐, 그러마.”
최중우는 치훈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볼 뿐이었다.
“내부가 화사하고 좋구나. 확실히 젊어서 그런지 감각이 다르구만.”
“전이랑 같아요. 명패 하나 바꿨습니다.”
“그런가. 김 본부장 있을 때는 여기가 마냥 칙칙해 보였는데, 확실히 네가 남다르긴 한가 보네.”
최중우는 피식 웃으며 소파에 몸을 더욱 깊이 묻었다.
그는 외아들인 치훈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하나뿐인 자식은 태어날 때부터 남달랐다. 외모며 지능이며 다른 아이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고, 최중우 역시 회사에서 승승장구한 덕에 치훈에게 적극적인 지원이 가능했다.
그 결과 치훈은 어느 면에서도 뒤지지 않는 완벽한 남성으로 자랐다. 최중우는 그것이 젊은 시절부터 회사에 이 한 몸 바쳐 열심히 노력한 제 덕이라고 생각했다.
세진의 부사장 자리에 오른 지금, 치훈이 더더욱 높은 곳까지 날아갈 수 있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었다.
“들었다. 저번 주에 백 이사 만났다고.”
“네. 그랬습니다.”
“백 이사가 사장님 사촌인 거 알고 만난 거야?”
백 이사가 사장의 사촌인 건 알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백 이사를 만난 건 아니었다.
치훈은 그저 그날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 핑계로 열음을 묶어 두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때 치훈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게 하필 백 이사였을 뿐이다.
하지만 치훈은 제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을 알았다. 그럴 땐 그냥 그 대답을 해 주면 그만이다.
“네, 알고 있었습니다.”
“역시.”
최중우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치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런 식으로 네 편을 점차 늘려 나가는 게 좋아. 내가 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하겠지만, 쓸데없는 놈들은 상종도 하지 말고.”
“예.”
또 시작인가.
치훈은 최중우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다리를 꼬아 앉았다.
“백 이사가 제 딸 이야기는 안 하디?”
“하셨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어떻게 하루를 못 쉬어. 젊은 남자만 보면 그렇게 딸 홍보를 해.”
최중우가 고개를 내저으며 껄껄 웃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치훈이 네, 하고 답하자 문이 열리고 열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 드리겠습니다.”
평소보다 더욱 꼿꼿한 자태의 열음이 잔 두 개가 올라간 트레이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최중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었다.
“그 딸내미가 외모도 출중하고 괜찮은데, 내가 보기엔 눈이 높지 않나 싶다.”
“그럴 수도 있죠.”
치훈은 슬그머니 열음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도 내 생각엔, 저번에 말했던 박 의원 둘째 딸이 더 낫다. 우선 그쪽 조건이 훨씬 좋아.”
부친의 입을 잠시 틀어막고 싶었다. 치훈은 대답도 생략한 채 테이블 앞에 멈춰 선 열음을 올려다보았다.
“거기다 네가 마음에 쏙 든다잖아. 들어 보니 만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던데.”
제발 좀 그만.
치훈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어찌할 바 모른 채 이마를 한번 쓸어 올렸다.
슬쩍 곁눈질하자 열음은 묵묵히 찻잔을 최중우 앞에 놓고 있었다.
“여자가 그렇게 적극적이면 너도 성의를 좀 보여야지. 전에 말했던 것처럼 다음 달에는 꼭 얼굴 비춰라.”
이제 열음은 남은 찻잔 하나를 들어 치훈의 앞까지 가지고 왔다.
치훈은 최중우의 말은 무시한 채, 열음의 손에 들린 찻잔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순간 그의 손끝이 열음의 하얀 손등을 은근하게 훑었다.
흡, 숨을 들이켠 열음이 재빠르게 치훈에게서 멀어졌다.
하마터면 찻잔을 놓칠 뻔했다.
잘게 떨리는 손끝을 그러쥐며, 열음은 꾸벅 인사를 한 뒤 재빠르게 방을 나왔다.
* * *
“손열음, 너 진짜 저녁 안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