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춘산
9권
의천중 장편소설
제260화
단유유가 마당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잖아. 해를 받으면서 구경하다 보면 기분도 풀릴 거야.”
순간 유지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유유가 어멈에게 전에 준비했던 사다리를 꺼내라고 했다.
“그러지 마세요, 소저.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안 돼요.”
연지와 유지가 필사적으로 말렸다. 하지만 단유유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윽고 단유유가 ‘전망대’로 올라가 가만히 앉아 구경을 시작했다.
“다 저저 때문이에요!”
간담이 서늘해진 연지가 작은 목소리로 유지를 질책했다.
“가만히 있던 소저한테 왜 현주와 같다는 말을 해서는 괜한 일을 벌이는 거예요! 봐요, 진짜 소저께서 일을 벌이셨잖아요!”
유지도 내심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괜찮아. 소저는 손발이 빠르시잖아. 그 악도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너도 잘 알잖아.”
연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고야가 너무 무서워요. 우리가 소저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하면서, 혼내실 거예요.”
유지가 말했다.
“그 얘기는 그만.”
“너희가 뭐라고.”
단유유가 한 마디 뱉었다. 백운항 어귀에 오가는 수많은 인파를 바라보다 보니 답답했던 마음도 풀렸다. 유지가 바로 말했다.
“맞아. 연지, 네가 뭐라고. 소저 말을 들어.”
연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소저는 고야가 무섭지 않으세요?”
단유유가 화내며 되물었다.
“뭐? 내가 부군을 무서워한다고? 도대체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배융이 옛 얘기를 들춰내는 게 무섭다고 해도, 시녀들 앞에서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유지가 연지에게 눈치를 주며 말했다.
“소저는 임신하신 몸이잖아. 고야께서 소저를 돌보시는 거지 겁을 주시려는 게 아니야.”
단유유가 소리쳤다.
“맞아! 바보야!”
바보라 불린 연지가 바로 잘못을 인정했다.
“저는 소저의 사람이에요. 그러니 소저가 물에 뛰어들든, 불에 뛰어들든 따라갈게요!”
“잠깐.”
단유유가 물었다.
“저 사람 배양 아니야? 무슨 일로 온 거지?”
“그게 누군가요?”
배양이 누군지 궁금했던 연지와 유지가 단유유를 따라 목을 길게 내빼고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복왕세자 말이야!”
단유유는 복왕세자가 찾아온 걸 발견하고 곧바로 ‘전망대’에서 내려가 말했다.
“유지, 네가 가서 확인해 봐. 무슨 일로 온 건지.”
배융이 집을 비우자마자 바로 찾아오다니,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의 목적을 알아내야만 한다.
유지가 서둘러 밖으로 나가서 상황을 살폈다. 단유유는 어멈에게 사다리를 치우라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바닥에 남은 흔적도 말끔하게 없앴다. 마침 유지가 돌아와 말했다.
“복왕세자께서 소저를 부르십니다. 급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역시 내가 목적이었나? 단유유가 말했다.
“급한 용무가 무엇인지 여쭤봐. 계속 말해주지 않으면 부군께서 돌아오신 다음 다시 이야기하자고 해.”
유지가 서신 한 통을 건넸다.
“복왕세자께서 소저께 드리는 서신입니다. 만약 소저께서 만남을 거절하면 먼저 서신을 보고 결정하라고 하셨습니다.”
서신을 받으려고 손을 뻗었던 단유유가 다시 손을 거두었다.
“네가 뜯어서 책상 위에 올려놔. 어디, 뭐라고 썼는지 보자.”
유지가 단유유의 말에 따라 서신을 책상에 올려놓자 단유유가 멀리 떨어져 목을 쭉 빼내어 서신의 내용을 살폈다. 유지가 물었다.
“소저, 뭘 그렇게 경계하시는 거예요?”
단유유가 배를 감싸며 말했다.
“독약이 있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서신에 독약을 묻혀 상대를 음해한다는 얘기, 못 들어 봤어?”
“네?”
유지가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더니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소저, 저 잠시 손 좀 닦고 올게요….”
“그래, 가서 닦아.”
단유유가 유지를 안심시켰다.
“이 독은 너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가서 닦고 오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녀의 말에 유지가 더 겁을 먹고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씻으러 뛰어갔다.
“기쁨…. 척…. 지나간 인연…”
단유유가 입을 삐죽 마뜩잖은 표정으로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대충 훑어보던 그녀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강복생!”
강복생이 그의 손에 있으니 만날 것이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유지! 유지!”
단유유가 큰소리로 유지를 불렀다.
“빨리 와. 너에게 물을 게 있어!”
물 한 바가지를 들고 계단 앞에 쭈그려 앉아 손을 씻던 유지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혹시 방금 복왕세자가 누구를 데리고 왔었어?”
단유유가 유지가 떠온 물을 치우고 말했다.
“독 같은 거 없으니 겁내지 마.”
“안 돼요. 제대로 씻어야 한다고요. 만약 제가 죽으면, 누가 소저의 시중을 드나요!”
유지가 눈시울을 붉히더니 당연하다는 듯 단유유의 손에 든 물 주전자를 빼앗아 연지에게 건넸다.
“뭐해, 빨리 부어줘!”
“네….”
연지가 바로 물 주전자를 받아 들고 유지의 손에 물을 부었다. 손을 닦은 유지가 그제야 안심하며 말했다.
“한두 명이 아니던데요. 한 사람은 망토 같은 걸 뒤집어쓴 채 잡혀 있었어요. 얼굴은 잘 안 보였고요.”
잠시 고민하던 단유유는 직접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그녀가 살고 있는 저택이니 무서워할 필요 없었다. 한참을 걸어가던 단유유는 두 시녀가 저를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두 녀석은 아직도 진지한 모습으로 손을 닦고 있었다.
“뭐해? 빨리 와!”
유지가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소저, 일단 여기 들어있는 물이라도 다 쓰게 해주세요. 저는 이대로 죽을 수 없어요. 살아남아서 소저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고요.”
참나! 독이 있다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단유유는 어쩔 수 없이 유지가 손을 다 씻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유지, 그나저나 네가 언제부터 나를 스승으로 모시기 시작한 거야?”
유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소저를 스승으로 모신 적은 없는데요?”
단유유가 진지하게 물었다.
“없다고? 그런데 왜 네 말투가 나랑 똑같다고 느껴지지?”
유지가 옷자락을 부여잡고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
“소저, 이게 바로 근주자적(*붉은빛에 가까이 하면 반드시 붉게 된다는 뜻)이라는 거예요.”
더 이상 상대하기 귀찮아진 단유유가 고개를 돌려 연지를 바라봤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감쳐 문 연지를 보고 단유유가 물었다.
“너는 또 왜 그래?”
연지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소저, 방금 서신에 독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유지 저저가 서신을 만진 다음 다시 주전자를 들었고, 제가 또 그 주전자를 만졌잖아요. 저도 손을 씻어야 하지 않을까요?”
“…….”
단유유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시녀가 이렇게까지 멍청할 줄은 몰랐다. 연지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소저도 주전자를 만졌으니 손을 씻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맞아요, 맞아!”
아직도 손을 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지가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은 단유유와 함께 세 번을 더 닦고, 물 세 바가지를 비운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 그렇게 복왕세자는 반 시진이나 방치되었다.
“죄송해요, 세자. 자고 있었어요. 귀한 손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버렸네요. 하하….”
단유유가 상석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세자께 따뜻한 차를 따라드려!”
복왕세자는 조금의 언짢은 기색도 없이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수, 괜찮소. 내가 갑자기 찾아와 단잠을 방해한 것 같아 되레 미안하구려.”
“그렇다면 서로 잘못 없는 거로 하죠.”
단유유가 복왕세자를 힐끗 바라보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세자께서 도화오매가(桃花塢梅家)의 후계자를 모셔 왔다고 들었는데, 어디 계신가요? 화전은 팔고 계시던가요? 인쇄판도요?”
복왕세자가 빙긋 웃으며 요염한 눈으로 단유유를 바라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수도 도화오매가를 알고 있소?”
단유유가 순진무구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당연하죠! 제가 괜히 인쇄판을 사겠어요? 화전도 엄청 많이 모았어요.”
복왕세자가 말했다.
“하기야. 그러나 내가 오늘 찾아온 건 그의 인쇄판과 화전을 팔아주기 위해서가 아니오.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이지.”
단유유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실이라면 제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데요. 부군도 집에 안 계세요.”
“향광과 관계없소. 이 사람은….”
제261화
복왕세자가 손을 들어올리자 시종이 누군가를 앞으로 밀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망토를 뒤집어썼고, 두 손은 묶여 있는 듯했다.
복왕세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머리에 씌워진 망토를 벗기자,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백발이 무성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상국사에서 단유유에게 화전 인쇄판을 팔던 그 사람이었다.
단유유가 아무 말 없이 턱을 괸 채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분은 누구신가요? 세자께서는 왜 이분을 포박하고 계시나요?”
복왕세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강복생이오. 제수의 그 하화 인쇄판과 나의 매화 인쇄판….”
“매화 인쇄판은 세자 게 아니에요!”
단유유가 단호하게 상대의 말을 잘랐다.
“부군께서 사 오신 거예요.”
“알겠소. 향광이 산 것으로 하지.”
단유유와 괜히 따지고 싶지 않았던 복왕세자가 이어서 말했다.
“나의 인쇄판은 모두 이 영감에게서 샀소. 며칠 전 향광이 사람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선, 나도 돕고 싶었소. 운 좋게 바로 찾게 될 줄은 몰랐지만. 곧장 데려가려고 했는데, 이 영감이 도망치려는 게 아니겠소.”
복왕세자가 교활한 표정으로 단유유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제수, 왜 도망치려고 했는지 아시오?”
단유유가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 당연히 모르죠. 혹시 세자께서 너무 험하게 다뤘거나 폭력을 휘두른 것 아닌가요?”
“하…. 영감에게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는데, 매화오 매가와 관련이 있소!”
복왕세자가 강복생을 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영감은 무려 살인범이오! 살인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불까지 질러 매가의 재산을 약탈했소. 그 때문에 20여 년 동안 도망 다닌 것이오. 영감 때문에 피해를 입은 상대는 제수는 이낭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