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춘산
8권
의천중 장편소설
제225화
단유유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하고 웃으며 몸을 돌렸다. 단여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제기를 손에 꽉 쥔 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사소저, 설마 겁먹은 것이오?”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복왕세자가 세상 물정 모르는 척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제수는 호랑이처럼 흉악하지. 후각과 청각이 예민하고 눈도 날카롭소. 하지만 이미 혼인한 사람이, 그것도 여동생이면서 너무 많은 걸 간섭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심란해하던 단여혜가 고개를 숙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유는 분명 태태께 말씀드릴 거예요. 그리고 태태께서는 저를 다시 추성으로 돌려보내서 가두실 거고요. 세자, 제발 부탁이니 더 이상 저를 찾아오지 마세요!”
복왕세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잘못된 추측이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제매가 섣불리 말할 리가 있겠소. 소저는 그냥 이 문이 줄곧 열려있던 것이라고 잡아떼면 될 것이오. 벌을 받는 건 문을 지키던 어멈일 뿐, 소저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말이오.”
마음을 가라앉힌 단여혜가 용기를 내어 그를 바라봤다.
“세자, 이렇게 된 이상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를 찾아오는 목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복왕세자가 그녀를 눈을 찡긋하고는 말했다.
“당연히 소저가 마음에 들어서요. 혼인을 청하고 싶소.”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란 단여혜가 놀라움에 정신을 잃은 듯 했다.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그녀가 이내 말했다.
“그…. 그럴 리 없어요. 세자께서 이미 약혼하셨다는 얘기는 저도 알고 있어요. 경성의 고귀한 가문의 여인이라고….”
복왕세자가 웃으며 답했다.
“고귀한 가문까지는 아니고, 어느 정도 이름 있는 가문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아름다움과 인품은 소저에 비할 수 없소. 내 생각을 들어보시오. 그녀가 정처로, 소저가 첩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소? 나중에 내가 왕위를 계승하면 소저를 측비의 자리에 앉히겠소.”
단여혜가 복왕세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편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매혹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측비, 왕부의 측비라니…. 단유유, 단여의보다 훨씬 고귀한 신분이었다. 때가 되면 태태가 나에게 인사를 올려할 지도 몰라….
단여혜가 계속 말을 아끼자 복왕세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가는 고결함을 중시하는 가문이기에 이 혼사를 동의해 줄지가 걱정이군.”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단여혜가 더 생각하지도 않고 말을 뱉었다. 상대의 의도를 알게 된 단여혜는 안심하기 시작했는지, 복왕세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저 세자께서 진심으로 저를 생각해주시는 걸까 걱정됩니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차차 알게 될 것이오.”
말을 마친 복왕세자가 담벼락 밖으로 뛰어내리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곧바로 단지문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그런 그가 의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방금 누구와 얘기를 나눴던 거야?”
단여혜가 고개를 숙인 채 제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누구랑 얘기를 나누다니요? 그냥 혼잣말한 건데요? 이 집안에서 누가 저를 상대해 주겠어요? 지금도 보세요. 가가도 저를 도둑처럼 경계하고 있잖아요.”
단지문이 눈살을 찌푸리고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내가 언제 너를 도둑처럼 경계했다는 거야?”
단여혜가 비꼬듯 물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여기 계신 건가요? 유유가 말해준 거죠?”
단지문이 인정하지 않았다.
“유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냥 후문이 열려있고,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도둑이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얘기했을 뿐이야. 그리고 태태께서 나를 믿고 후문을 지키는 일을 맡기신 거고. 나는 직접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지.”
“그러면 제가 괜히 유유와 가가를 의심했네요.”
단여혜가 고개를 숙였다.
“저는 먼저 돌아가 볼게요.”
단지문이 그녀의 앞을 막아 선 다음 다시 물었다.
“이 문은 왜 열려있던 거야? 그리고 너는 왜 혼자 있던 건데?”
눈을 치켜 뜬 단여혜가 그를 바라보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집안 모두가 저를 상대해주지 않고, 제 옆에 붙어다니는 시녀도 태태의 사람이라 시종일관 저를 안중에 두지 않는데, 제가 혼자 노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리고 문이 왜 열려있는지는 이곳을 관리하던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죠! 제가 아니라!”
단지문이 입술을 꾹 다문 채 단여혜가 떠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가 바로 주위를 샅샅이 둘러봤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여자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앙증맞은 발자국뿐, 이상하다고 생각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후문을 열고 살펴봤지만, 역시나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단지문이 곧장 집사를 불렀다.
“이 문에 두 개의 자물쇠를 채우도록. 두 개를 채워라. 그런 다음 열쇠는 나에게 맡기도록.”
명을 들은 집사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열쇠장이를 찾아 나섰다. 뒤이어 단지문이 뒷문을 지키던 어멈을 불러 자세히 물었지만, 역시나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멈이 장을 보기 위해 직접 문을 열고 나갔고, 문을 잠그는 것을 잊은 것 같았다.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단지문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담벼락을 올려다봤다. 그가 사람을 시켜 사다리를 가지고 오라고 한 뒤 담벼락 위를 살폈다.
담벼락의 기와 두 장이 헐거워져 흔들리고 있었고, 한쪽 귀퉁이가 누군가에게 밟혀 망가진 것이 보였다.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단지문이 한참을 멍하니 있더니 이내 사다리를 타고 다시 내려왔다.
혼수품 정리가 일단락되고, 단여옥이 저녁 식사를 하라고 모두를 불렀다. 그녀의 행동은 이미 안주인의 면모를 갖춘 듯 보였다.
매 이낭이 주씨를 칭찬했다.
“태태, 정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안의 소저와 공자들에게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게 하다니. 앞으로 유능한 사람이 될 겁니다!”
주씨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네. 단가가 추성에서는 훌륭한 편이지만, 경성에서는 정말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달았네. 가문이 번창하려면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 여럿이 힘을 합쳐 땔감을 모아 태우면 불꽃이 거세지는 법. 자식들 모두가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리고 그 힘이 합쳐지면 단가 또한 한 걸음 나아가게 되는 것이네.”
단지금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아들의 혼담을 꺼내지 않으신 이유가, 저희가 한 걸음 더 성장하기를 바라셔서 입니까?”
주씨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건 네가 진사에 붙을 수 있는지에 달렸다.”
그리고 바로 단지청과 단지문에게 말했다.
“너희도 마찬가지이다. 너희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너희에게 달렸다. 너희가 능력이 있어야 동생들의 체면이 사는 게야.”
그때 단여의가 농담을 던졌다.
“만약 가가가 진사에 붙어 높은 집안의 딸을 얻게 되면요? 어머니께서는 며느리를 상대하는 게 걱정되지 않으세요?”
주씨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그저 올바름을 관철하면 된다. 걱정할 게 무엇이 있겠느냐. 그나저나, 다 모인 것이냐? 여혜는 어디 있느냐? 왜 보이지 않지?”
“여혜는 머리가 아프다며 안 먹는다고 합니다.”
단지문이 자신의 생각을 들킬까 봐 저도 모르게 거북한 표정으로 단유유를 바라봤다. 하지만 단유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매 이낭에게 애교를 부릴 뿐이었다. 주씨가 말했다.
“의원을 모셨느냐? 가을이 되어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니 다들 고뿔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약은 줬습니다. 만약 상태가 악화되면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단지문이 말하는 사이 단여혜가 들어오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늦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었습니다. 밖에서 우연히 누군가와 만나서 잠시 얘기를 나누고 왔습니다. 누구와 만난 것인지 맞혀보시지 않겠습니까?”
단유유가 단여혜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고작 반 시진 만에 단여혜가 완전히 딴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에는 의기소침한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단여의에 견줄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잠깐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단여혜의 말을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역시 단지금만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두통은 나아진 거야? 그래, 누구와 만났는데?”
단여혜가 웃으며 답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나아졌어요. 밖에서 오매부와 만났어요. 유유를 데리러 왔다고 하시던데, 술을 드신 것인지 몸에서 술 냄새가 났어요. 기분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앗고요. 유유, 혹시 부부싸움이라도 한 거야?”
온 식구가 단유유에게 눈길을 돌렸다. 특히 매 이낭이 비난의 눈초리로 단유유를 바라보더니 그녀를 꾸짖었다.
“네가 갑자기 우리를 돕겠다며 오고, 또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했더니! 또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니? 이따가 고야를 만나면 얌전히 사죄드리도록 하거라. 알겠니?”
“안 싸웠어요!”
단유유는 억울했다.
“부군께서 술을 마신 이유는 따로 있어요. 옆집 진 가가 댁에 손님이 찾아왔는데, 접대할 사람이 없어서 부군께서 대신 가신 거예요. 저는 단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또 모두가 보고 싶어서 이틀 정도 머물 생각으로 온 거고요. 나오기 전에 부군께도 말씀드렸어요.”
단여혜가 고개를 숙이고 웃더니 단유유에게 기름으로 볶은 죽순을 집어주며 말했다.
“유유는 항상 순진무구한 척을 잘했지. 가족 모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말이야.”
일부러 단유유를 겨냥한 말이었다. 단유유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사저저, 저를 꾸짖는 건 그만하고 음식이나 빨리 드세요!”
뒤이어 안으로 들어온 배융이 주씨, 매이낭과 단유유의 형제자매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단유유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시간 맞춰 오는 게 일찍 오는 것 보다 낫다더니, 저는 먹을 복이 있는 사람인가 보군요.”
단유유가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을 꽉 쥐었다. 배융의 뜻을 좀처럼 헤아릴 수 없었다. 그가 알아차린 것인지 아닌지…. 미소는 자연스럽고 심지어 어딘가 기뻐 보일 정도였다.
단지금과 다른 형제들은 배융에게 자리를 양보하느라 바빠 보였다. 형제 모두가 그를 본인들 사이에 앉히려고 하자 배융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유유 옆에 앉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단여의와 단여옥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실실 웃는 얼굴로 단유유를 바라봤다. 단여혜는 무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는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단유유의 옆에 앉은 배융이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몰래 나왔소?”
“…….”
단유유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진 가가께서도 곧 돌아오시리라 생각됐고,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하실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마침 집안에 바쁜 일이 떠올라서….”
“오늘 밤 이곳에 나도 남겠소.”
배융의 속삭이는 목소리에서는 화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건가? 반씨는 역시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다. 단유유가 속으로 배융의 속마음을 헤아려 보고 있을 때, 매 이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남아서 뭐 하시려고요? 두 사람 다 돌아가세요. 멀지도 않은 거리이니, 고야께서도 유유의 응석을 받아주지 말고 엄격하게 대해주십시오.”
제226화
단유유가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이낭, 제 친어머니 맞으세요?”
주씨가 바로 대답했다.
“아니다. 너는 내가 낳은 아이다.”
그녀의 대답에 온 집안사람들이 웃기 시작했고, 단여혜도 거짓웃음을 짓기 위해 입꼬리를 올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단지문을 향해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단지문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결국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친 후, 배융이 하늘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곧 북이 울리겠군.”
“빨리 돌아가렴.”
매 이낭이 단유유를 재촉하고는 도지에게 짐을 싸서 유지에게 넘기라고 분부했다. 단여의가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이제 곧 어미가 될 사람이 아직도 이낭이 그리워 이러고 있다니. 부끄럽다, 부끄러워.”
단유유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괜히 센 척 하지 마세요! 나중에 태태가 보고싶다고 눈물을 펑펑 흘리기만 해봐요!”
“그만 돌아갑시다.”
단유유의 손을 잡은 배융이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향했다.
“내일 또 이곳으로 유유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단유유가 몰래 자극적인 음식을 먹은 걸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그렇다면 돌아가도 상관없겠지! 이렇게 생각하자 단유유가 기쁜 마음으로 배융의 손을 잡고는 밖으로 나가며 떠보듯 물었다.
“부군, 오늘 식사는 어땠나요? 명로와 원 구구께서 제 요리 솜씨에 대해 칭찬 안 하시던가요?”
아무런 내색 없는 말투로 배융이 대답했다.
“아주 즐거웠소. 모두 그대의 요리 솜씨를 칭찬하더군. 그대가 만든 은사권과 파소포자, 그리고 증분도 먹어보고 싶다고 했소. 하지만 거절했소. 회임한 몸이라 무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소.”
깜짝 놀란 단유유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거절하면 어떻게 해요! 옆에서 제가 하인에게 시키면 되는데! 아! 아니…. 그것보다, 회임한 사실을 말한 건가요?”
단유유가 뒤늦게 깨달은 모습을 본 배융이 참지 못하고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다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최후의 승부였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 하늘에 감사해야겠소.”
단유유가 연이어 물었다.
“다른 말은 없었나요? 아이를 낳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들이요. 부군도 정말 대담하시네요. 바로 사실을 알리다니.”
배융은 당시 자신의 기분을 단유유가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가 몰래 음식을 만들어 먹고 도망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달리 방법이 있겠소? 식탐 가득한 부인이 요리 솜씨도 좋아서 멋대로 집에서 마라샹궈를 해 먹다가 귀인의 눈에 들고 말았는데….”
단유유의 얼굴이 순식간에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평소엔 억지를 부리던 자그마한 입도 지금은 얌전했다.
“그대와는 상관없는 일이오. 우리 집안의 문제에 괜히 그대를 놀라게 해버렸군.”
농을 던진 배융이 다시 단유유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다행히 명로께서 아이를 낳지 말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소.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우리에게 본분에 만족하는 사람으로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오.”
단유유가 배융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어째서인지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