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춘산
6권
의천중 장편소설
제157화
가엾은 향주의 모습을 보고 단유유는 측은지심마저 생겼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죽어도 상관없지만 자신은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신념을 떠올리고,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현주가 그네를 타자며 떼를 썼다. 유모가 놀라 어쩔 줄 몰라하며 간신히 현주를 떼어냈다.
저녁 식사 시간, 단유유는 이미 눈이 풀렸다. 거기다 팔다리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고 식욕도 사라진 상태였다. 수왕비가 기쁜 모습으로 단유유에게 자신의 옆에 앉으라 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교와 친해져서 친구가 되면 글을 가르쳐 주는 건 어떠하겠느냐?”
단유유는 하마터면 젓가락을 떨어트릴 뻔했다. 놀아주는 것도 모자라 글까지 가르치라 할 줄이야.
이 망할 놈의 고대 노예 생활!
단유유가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수왕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말했다.
“또 귀찮아하는 병이 도진 게냐? 교교가 먹는 것과 자는 걸 좋아하고 책 읽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면, 네게 부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유유가 괴로워하며 말했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고…. 저도 까막눈이라서….”
수왕비가 그녀의 이마를 톡, 하고 건드리고는 말했다.
“또 거짓말을! 네가 글을 쓰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까막눈이라고? 차라리 장님이라 하거라. 이렇게 하자꾸나. 네가 글을 모르면 향광에게 배워서 다시 교교를 가르치도록!”
단유유가 얼굴을 감쌌다. 정말이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식사를 마친 단유유는 도망치듯 수왕부를 나섰다. 유지가 마음 아파하며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소저.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돌아가면 제가 확실하게 시중을 들어드릴게요. 안마도 해드리죠.”
유지의 향기롭고 부드러운 몸에 기댄 단유유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응, 오래 해 줘야 해.”
단유유는 예상하고 있었다. 수왕비 같은 늙은 여우를 상대하는 것이 쉬울 리 없다는 것을.
나를 좋게 생각해 교교의 친구로 삼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진짜 목적은 내게 노동을 시키기 위함이잖아! 나에게 그 말광량이 계집애의 글공부를 맡기려는 수작이라고!
세자비가 말하길, 교교는 책 읽는 것을 꺼려한다고 했다. 수많은 계몽 선생을 모셔 왔지만, 모두 교교의 괴롭힘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고 했다. 참고로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울렸다고.
남자 선생은 잠시 졸고 있는 사이 수염이 잘리는가 하면, 얼굴에 온갖 낙서를 당했다고 했다. 중요한 건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탓에 갖은 창피를 당했다고. 수왕까지 나서서 선생을 붙잡으려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고 한다.
또한 여자 선생은 머리카락이 잘리거나, 폭죽에 맞고 깜짝 놀라 눈물을 흘렸었다. 그녀는 망나니 같은 교교를 더는 가르칠 수 없다며 울분을 토하며 도망치다시피 수왕부를 떠났다.
세자비가 연신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이 나이에 간신히 교교를 낳았는데 이렇게나 속을 썩일 줄이야. 심지어 한쪽 다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얼마나 애를 먹었던지…. 평범한 백성이었다면 까막눈이어도 상관없지만, 명색이 수왕부인데 어떻게든 전력을 다해 가르쳐야지 않겠느냐. 곤란한 부탁이라는 걸 알지만, 교교가 유독 너를 좋아하고 따르니 부디 거절은 말아다오.’
단유유가 힘겨운 모습으로 마차 앞에 다다르자, 지업이 얼른 걸상을 옮기면서 공손하게 말했다.
“공자께서 찾아오셨는데, 아무 이상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들 밥은 먹었어?”
단유유의 본래 계획은 선물만 주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설마 이 시간까지 머무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마 배융도 그녀가 계속 돌아오지 않자 혹시나 사고를 쳤거나 수왕부에 잡아먹힌 것이 아닌가 걱정했을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밖에서 마차를 지키고 있던 지업에게 수왕부의 사람들이 과연 식사를 대접해 줬을지 의문이었다.
지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왕부의 집사들과 함께 식사했습니다. 아마 소내내의 체면을 봐서 배려해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단유유가 힘겹게 마차에 올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지가 바로 다가가 그녀의 이곳저곳을 주물러 주었다. 중도에 이르러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단유유가 다짐하듯 말했다.
“만약 내가 나중에 현주 같은 아이를 낳으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울부짖을 때까지 혼쭐을 내 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내 성인 단씨를 갈아버리겠어!”
유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저의 성은 이미 배단씨로 바뀌었는걸요.”
“내 앞에서 배씨를 언급하지 마!”
단유유가 몸을 돌리고 아랫배를 들춰냈다.
“한번 만져 봐. 뱃살이 많이 줄었는지.”
유지가 배를 어루만지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혀 줄지 않았습니다.”
단유유가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고생했는데 왜 줄지 않은 거야!”
“그렇게 많이 먹는데 왜 돼지처럼 살찌지 않는 것이오!”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말을 타고 마차를 뒤따라오던 배융이었다. 그가 대놓고 단유유를 조롱한 것이다.
“부군, 마중 나오신 건가요?”
창가에 기대어 웃던 단유유가 칭얼거리며 말했다.
“저는 너무 가엾은 사람이에요. 이렇게 더운 날에 밖에서 종일 고생했음에도 부군의 연민을 조금도 받지 못하고, 되레 조롱만 당하다니. 과연 이 하늘 아래 저보다 불쌍한 사람이 있을까요?”
배융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나는 아직 식사도 못했소.”
단유유가 버럭 성을 냈다.
“주방에 주낭이 없나요? 설마 부군께서는 제가 집에 돌아가 직접 음식을 차려 앞에 가져다드려야만 드시겠다는 뜻인가요?”
죄 나쁜 버릇만 들었잖아! 지가 황제야 뭐야!
배융의 시종인 소오가 황급히 설명했다.
“소내내, 그게 아닙니다. 공자께서는 소내내를 걱정해 줄곧 부근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
단유유가 멋쩍은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성의 없이 말했다.
“부군, 고생했어요.”
배융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대도 고생 많았소.”
“…….”
진지한 배융의 모습에 별안간 앞으로 펼쳐질 ‘가정 선생님’ 생활이 떠올랐다. 단유유는 속으로 도망치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원래 수왕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련한 각본은 이런 내용이 아니었다.
배융이 조용히 단유유 대신 가림막을 내리고는 사위를 경계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단유유가 귀찮은 듯 마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군, 지쳤어요. 업어주세요.”
지켜보는 눈이 많은데, 배융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리 없었다. 그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위를 살피고는 작은 목소리로 호통쳤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내려오시오! 도저히 못 움직이겠다면 포가에게 업어달라고 하겠소.”
“흥, 양심도 없지.”
단유유가 작은 목소리로 욕지기를 뱉고는 힘겹게 마차에서 내렸다. 곧이어 유지와 연지에게 몸을 기댄 그녀가 칭얼거렸다.
“역시 믿을 건 너희 밖에 없어.”
배융이 정색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인들은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각자 할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하지만 지업만이 마차 옆에 남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단유유가 배융을 위해 주방에 가서 음식을 만들어 줄 리 없었다. 그녀는 목욕을 마친 후 바로 침상식 의자에 몸을 누이고 두 시녀의 시중을 받았다. 배융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배융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목욕을 마쳤다. 창문과 문을 닫은 다음 단유유를 안아 침상에 옮겼다. 고개를 숙이고 깊이 냄새를 맡자 달콤한 꽃향기가 났다. 단유유가 몸을 돌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얌전히 계세요! 제가 그렇게 쉬운 상대인 줄 아세요? 엉덩이를 때리기 전에 얌전히 있으라고요!”
배융이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었다. 잠시 후 그 뜻을 이해하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배융이, 머리맡의 서신 봉투를 열었다. 그 속의 서신을 꺼내 등불에 비추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수 왕세자가 친필로 쓴 서신이었다. 정중하게 단유유를 교교의 선생으로 모시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말투는 겸손하면서도 간절했다. 매일 마차를 배정하며, 선물은 물론 공봉(供奉)도 줄 것이니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이는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였다. 배융이 혼인하지 않았다면 수왕부에서 이렇게나 큰 호의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단유유로 인해 생겨난 기회임이 분명했다.
배융이 서신을 거두고 손을 깨끗하게 닦은 후 불을 끄고 단유유의 옆에 조용히 누웠다. 단유유는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다음날 아침, 단유유가 눈을 슬쩍 떴다. 아침햇살에 희미하게 비치는 건실하고 힘 좋은 사내의 단단한 몸이 보였다. 그녀가 이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상대를 밀쳤다.
“뭐하는 거예요!”
아침 식사를 할 때까지 단유유의 어두운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 뻔뻔한 남자 같으니라고! 그제는 달콤한 향기니 뭐니 없다고 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갑자기 달큰한 냄새가 난다며 속삭인다고?
단유유의 어두운 표정과 달리 배융은 시종일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단유유에게 반찬도 집어주고, 국도 떠주다가, 주위에 하인이 없는 틈을 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내지 마시오. 점점 익숙해질 테니.”
단유유가 그를 노려보았다.
“식사 중에는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단유유가 무슨 말을 하든 배융은 미소 띤 얼굴로 평소보다 밥 한 그릇을 더 비워냈다. 식사를 마친 단유유가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배융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어제 수 왕세자로부터 서신을 받았소. 정중하게 그대를 현주의 선생으로 모시고 싶다더군.”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단유유는 화가 났다.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배융이 원망스러웠다.
“설마 벌써 받아들였나요?”
진지한 목소리로 배융이 대답했다.
“이는 가벼운 사안이 아니지 않소. 그러니 그대의 의사를 듣기 전에는 결정하지 않을 것이오.”
그나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단유유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끝났어요.”
“싫다면 바로 가서 거절하도록 하지.”
배융이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군, 감사해요.”
제158화
단유유는 배융이 능청을 부리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저를 위해 나서려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켜봤다. 아무래도 현주의 스승이 되는 일이 안락후부에 가져다줄 이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음으로.
단유유는 줄곧 그녀를 밀어붙이던 배융이 갑자기 태도를 바꿀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단유유여도 가끔은 이용당하기 싫을 때가 있었다. 곧 다가올 그날(*생리) 때문에 예민한 것일지도 몰랐다.
놀랍게도 배융은 준비를 마친 후 바로 밖으로 나섰다. 단유유는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 얌전히 시중을 받으며 아침 햇살을 즐겼다. 앞으로 여유로운 일상이 영영 사라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유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저, 어제 분명 약조하지 않으셨나요? 고야를 속이시면 어떡해요? 만약 정말로 고야께서 수왕부에 가서 거절하시면요? 그쪽에서도 오해를 하게 되잖아요.”
단유유가 말했다.
“오해하면 하는 거지 뭐. 너무 쉽게 얻는 건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법이야. 어제는 내가 너무 성급했어. 낯가죽이 얇아서 조건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고. 부군이 가면 나 대신 더 좋은 조건을 건져 오지 않을까?”
“…….”
유지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물었다.
“고야께서 소저가 본인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부려 먹었다는 걸 알게 되면, 큰 사단이 나지 않을까요?”
“무슨 사단이 난다고 그래?”
단유유가 마저 대답했다.
“남자는 본디 힘껏 부려먹어야 한다고! 괜히 닳아 없어지는 걸 걱정하면 안 돼! 아끼다 똥 되는 거야.”
유지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인지 꽤 설득력이 있었다. 한참 눈을 감고 유지의 시중을 즐기던 단유유가 마침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느릿느릿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는 우유를 섞은 밀가루 반죽이 준비되어 있었다. 단유유가 큰 그릇에 반죽을 옮긴 뒤 일부를 뜯어냈다. 그러고는 가는 면사(面絲, 면 가닥)로 뽑은 뒤, 그 위에 기름을 바르고 설탕을 뿌린 다음 잘라냈다. 남은 반죽은 만두피로 만들어 면사를 감싸고 불에 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한 우유향과 맛있게 익은 면 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화로 옆에서 손을 씻고 있던 단유유는 하인들이 온갖 핑계를 대며 주방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지?”
하인들이 간절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네,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납니다!”
“엄청 맛있을 거야!”
단유유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은사권(??卷)을 꺼내더니 천천히 안에 있는 면사를 뽑고는 천천히 한입 맛을 보았다. 그러고는 하인들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너희에게 주지 않을 거야!”
“…….”
농락당한 하인들이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 유일하게 남은 안보가 침을 흘리며 단유유를 바라보더니 웃는 얼굴로 물었다.
“사낭! 사낭께서는 안보를 제일 아끼시죠?”
단유유가 마지막 하나 남은 은사권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렇지. 이 사낭은 너를 제일 아끼지. 하지만 너에게도 주지 않을 거야!”
안보가 섭섭한 모습으로 소리쳤다.
“사낭 나빠요! 심술쟁이!”
단유유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허, 막말을 하면 쓰나? 내가 언제 심술을 부렸다고?”
이때, 지업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단유유에게 말했다.
“소내내를 수왕부로 모실 마차가 와 있습니다. 공자도 함께 계십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단유유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지에게 남은 은사권을 마저 찐 후, 옆집과 양가에 전해주고 하인들에게도 하나씩 맛보게 하라고 분부했다. 그런 다음 바로 찬합 하나를 챙기고는 마차에 올라 수왕부로 향했다.
중문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수 왕세자가 단유유를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