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춘산
4권
의천중 장편소설
제89화
배융이 말을 돌렸다.
“도가 지나친 그대의 활달한 성격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경성에 가면 자중하도록 하시오.”
단유유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평소 주씨의 단정한 모습을 따라하며 밋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요? 저도 할 줄 알아요.”
배융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단유유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배융의 잘생긴 옆모습을 보던 단유유는 어렴풋이 그가 살짝 달라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차가 길목에 이르자 배융이 마부에게 말했다.
“반 백부로 향하도록.”
단유유가 의아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반 백부는 왜 가는 건가요?”
배융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일 일찍 복왕세자도 우리와 같이 경성에 갈 것이오. 지금 시간 있을 때 세자에게 장인과 대구형의 일을 부탁드리고 또 반 백부에게 도움도 청하려 하오. 장인께서 준비하신 게 있다고 하지만, 만반의 준비를 더 해서 나쁠 건 없지 않소.”
“감사합니다, 부군.”
단유유가 진심을 다해 고마움을 전했다. 방금까지 온 가족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단유유를 포함해 모두 그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서 아버지와 장남은 한 집안의 기둥과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그들은 내 가족이기도 하오.”
배융이 계속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내게 진정 고맙다면 앞으로 내가 덜 화를 낼 수 있도록 행동하시오.”
“제가 언제 화나게 했다고요.”
단유유가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배융이 노려보자 바로 나약하게 말을 바꿨다.
“설령 그랬어도 아마 고의는 아니었을 거예요.”
배융이 아량이 넓은 사람답게 말했다.
“괜찮소. 고칠 수 있도록 내가 도울 것이니까.”
단유유가 몸서리를 쳤다. 더 이상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반 백부의 사람들은 역시 모두 잠든 상태였다. 배융이 문지기와 대화를 하고는 마차에 돌아와 말했다.
“심야에 반 백부 사람들을 깨우는 건 미안하니 세자께 얘기를 나누자고 밖으로 불렀소.”
단유유가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부군과 세자는 친한 사이인가요?”
이렇게 추운 겨울밤에 고귀한 왕부 계승인을 침상에서 깨울 수 있다니. 심지어 멀리 나와 얘기를 나눌 정도면 친한 친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배융이 말했다.
“생사를 같이할 수 있을 정도의 사이지.”
단유유가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얘기해 주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며 단유유에게도 똑같은 동작을 하라고 요구할 뿐이었다.
눈을 감자마자 단유유는 바로 잠들어버렸다. 다시 일어났을 때 창밖에는 열정 가득한 복왕세자의 모습이 보였다.
“제, 오랜만이오. 걱정 마시오. 단 동지의 일은 내가 잘 처리할 터이니.”
날이 밝자마자 단유유가 하품하며 마차에 올랐다. 오르자마자 단유유가 첫 번째로 한 행동은 바로 마차의 침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적당한 두께인지, 충분히 푹신한지 확인을 마친 그녀는 만족한 표정으로 구석에 앉아 이불을 덮은 뒤 다시 잠에 들었다.
잠시 눈을 붙이자마자 양모운이 정색한 표정으로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오른쪽 구석에 앉자마자 베개를 들어 올리더니 단유유와 자신의 중간에 놓아 명확하게 경계선을 그었다. 단유유가 오른팔을 그 베개에 올려놓고 편한 자세를 취하고는 씩, 웃었다.
“표매, 고마워.”
“…….”
양모운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베개는 당신 편하라고 그 자리에 놓은 게 아니라, 괴롭히려고 가져 온 거라고! 천하에 어찌 저렇게 뻔뻔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지!’
양모운이 반박하려는 순간, 밖에 서있던 배융이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는 길이 매우 힘들 거요. 그러니 서로 배려하고 챙겨주도록 하시오. 둘 다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조심히 행동하도록.”
“네, 부군. 표매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챙길게요.”
미소 띤 얼굴의 단유유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융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전히 무거운 표정으로 양모운을 바라봤다. 양모운이 입을 삐죽 내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누구의 보살핌도 필요 없어요.”
배융이 가림막을 내리고 출발하라 명했다. 마차가 성문 부근에 도착하자 복왕세자가 합류했다. 복왕세자가 마차가 아닌 배융, 양모비와 똑같이 말을 탄 모습에 단유유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고귀한 신분이라 고생은 못하실 줄 알았는데.”
그런 단유유가 못마땅했는지 양모운이 말했다.
“세자께서는 황실 자제 중 말타기와 활쏘기 기술이 제일 출중하신 분입니다. 황실의 자제는 공적을 제일 중요시 여겨 7살 때부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술을 배우죠. 그런데 여인들처럼 마차를 타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어요?”
“그렇구나! 역시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겠네.”
단유유가 말했다.
“어쩐지, 부군께서도 눈바람이 휘몰아치는데도 마차에 오르지 않고 말을 탄다고 고집하더라고.”
양모운은 더 이상 단유유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밀랍(蜜蠟)을 만지작거리며 놀기 시작했다. 하품을 한 단유유는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역시 미천한 집안 출신답네. 예의범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아!”
양모운이 싫증 부리며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바람에 그녀도 어느샌가 잠들어버렸다.
1시진 후, 마차가 멈춰 서고 유지가 다가왔다.
“소저, 고야께서 혹시 볼일을 보시겠냐고 물어보십니다.”
“응, 볼래.”
잠에서 깨어난 단유유가 제 몸에 기댄 채 인사불성으로 잠들어 있는 양모운을 깨웠다.
“같이 갈래?”
깜짝 놀라 깨어난 양모운은 제가 연적의 몸에 기대 잠들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화가 났다. 그녀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저는 됐어요. 이런 황야에서 어떻게 볼일을 보라는 건가요? 창피함이라는 게 없나요?”
단유유가 가볍게 웃고는 마차에서 펄쩍 뛰어내리고는 유지와 연지를 데리고 작은 숲으로 들어갔다.
과거 회사의 노예였던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장님이 볼일을 볼 시간을 주면 생각이 없어도 화장실에 한번 들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중요한 순간에 여건이 되지 않아 더 오래 참아야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장소를 고르고 유지와 연지가 각자 우산을 펼쳤다. 그리고 주인과 하인이 돌아가면서 볼일을 봤다.
작은 숲 밖에서 지키고 있던 배융이 그녀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버틸 만하오?”
밖에서 지켜주고 있던 그의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단유유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계속 자고 있었거든요. 부군은 춥지 않나요?”
말하면서 그녀가 배융의 손을 잡아 온기를 확인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란 배융이 손을 거두고 말했다.
“장난치지 마시오!”
배융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사라진 단유유가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그만 갑시다.”
멀지 않은 나무에 몸을 기댄 채 한쪽 다리를 걸치고 서 있는 복왕세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한 손에 마편(馬鞭)을 들고 두 사람을 흘려보며 말했다.
“시도 때도 없이 장소도 가리지 않고 애정행각이라니. 누가 서로 혼인을 맺지 않았다고 의심할까 봐 그러는 건가?”
그의 말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배융이 단유유에게 말했다.
“자, 마차에 오르시오.”
단유유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올리고는 마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복왕세자 옆을 지나치는 순간, 그가 단유유를 불러세웠다.
“제수, 우산은 왜 챙겼소?”
단유유가 말했다.
“비밀이에요.”
복왕세자가 입을 삐죽 내밀더니 웃으며 말했다.
“제수는 비밀이 참 많아.”
마차에 오른 단유유는 차를 마시고 있는 양모운의 모습을 보고 한번 더 조언했다.
“정말 볼일을 안 봐도 괜찮겠어? 이따가 힘들면 어떻게 하려고?”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양모운의 모습을 보고 단유유는 웃는 얼굴로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반 시진 후, 양모운에 의해 단유유가 단잠에서 깼다.
양모운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녀의 옷깃을 당기더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표가에게 잠시 마차를 멈춰달라고 부탁해 줄 수 있을까요? 그…. 가고 싶어졌어요.”
아직 출가하지 않은 귀한 따님이라 그런지 남자들에게 민망한 부탁을 하기가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녀를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 단유유는 바로 가림막을 올리고 배융에게 청했다.
“부군, 잠시 마차를 멈춰주세요. 볼일을 보고 싶어요.”
배융이 힐끗 양모운을 바라봤다. 대충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장소가 너무 난처했다.
“이 부근은 전부 공터라 가릴 수 있는 곳이 없소. 더욱이 근처에 민가도 없고….”
양모운이 단유유의 소매를 잡아당기더니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렸다.
“표수, 표수….”
가엾은 그녀의 모습에 단유유가 배융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 중얼거렸다. 배융이 바로 마차를 세우자, 단유유가 유지와 연지 그리고 양모운을 데리고 멀리 이동했다.
다시 마차로 돌아온 양모운에게서는 이전의 오만함과 경솔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채 단유유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단유유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이었다. 제 아무리 밖에서 볼일을 보는 것이 수치인 귀한 집 따님이라고 해도 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단유유가 자발적으로 양모운을 위로할 생각은 없었다. 양모운의 오기를 죽여 놓으면 언젠가 서로 단결하는 것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남은 여정 동안 양모운은 단유유에게 일절 시비를 걸지 않았다. 무언가 해야 할 때는 자발적으로 단유유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비록 태도는 어색하고 거북했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밤중에 단유유와 배융이 그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배융이 단유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실 표매도 그저 버릇이 나쁠 뿐 착한 녀석이오.”
단유유가 턱을 괸 채 물었다.
“저는요?”
“그대는, 음…. 게으르고, 식탐이 많고, 교활하고, 변명하는 걸 좋아하고, 규율을 지키지 않고….”
배융이 진지한 표정으로 수를 세며 말했다. 더 이상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투로 단유유가 말했다.
“제가 그렇게 최악인가요?”
배융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단점은 전부 말했으니 장점을 말해보겠소. 요리 솜씨가 좋고, 마음씨가 착하고 너그럽고, 밥도 잘 먹고, 눈치가 빠르고, 고생도 자진해서 할 줄 알고, 사려 깊고, 서예와 산술에도 능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오.”
기뻐하던 단유유가 다시 물었다.
“제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부군, 그럼 저와 혼인해서 득이라고 생각한 적 있나요?”
배융이 불을 끄고 말했다.
“이제 슬슬 잠자리에 듭시다!”
만족하지 못한 듯 단유유가 그의 품에 매달려 인정받기 위해 떼를 썼다.
“득이라고 생각한 적 있어요, 없어요?”
배융이 그녀를 밀쳐내고는 무겁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지금 이동 중이오. 이동 중에는 불편하거니와 심지어 이 방은 방음도 잘 되지 않소.”
‘이동 중에는 불편하고, 이 방은 방음도 안 돼?’
단유유는 할 말을 잃었다.
‘이 남자, 머릿속에 도대체 뭐가 들은 거야!’
제90화
보름이 넘는 여정동안 너무 고생한 나머지 모두 맥이 빠져 있었다. 쉬면서 요기를 할 수 있는 장소에 도착하면 모두 누워서 휴식을 취할 생각만 했다. 단유유만이 원기왕성한 모습이었다.
휴식도 중요하고 먹는 것도 중요하다. 어디를 가든 단유유는 항상 그 지역의 특산 음식을 구해달라고 배융에게 부탁했다. 덕분에 여정에 오른 일행들은 모두 배부르게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미식 덕분인지 여정의 고단함과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양모운과 단유유의 사이도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이따금 쓴 말이 오갈 때도 있었지만, 예전처럼 악의가 넘치진 않았다. 이날도 복왕세자가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제수는 정말 신기하오. 이렇게 빠르게 양 소저를 굴복시키다니.”
그 말을 들은 양모운은 불쾌해졌다. 하지만 복왕세자의 신분 때문에 쓴 소리는 할 수 없었기에 조용히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양모운은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단유유와 대화하지 않고 식사에만 집중했다. 단유유가 말했다.
“세자, 아니에요. 사람은 지내다 보면 서로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법이죠.”
복왕세자가 단유유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맞소. 내가 말실수했군.”
배융이 담담하게 말했다.
“식사 도중에는 이야기를 삼가세요.”
“참 융통성이 없단 말이야.”
복왕세자가 단유유를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부군께서는 예절에 충실하실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