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춘산
3권
의천중 장편소설
제55화
단유유는 열심히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얌전히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똘망똘망한 눈으로 두 마마를 바라보았다. 하 마마가 말했다.
“모든 종실의 관혼상제에는 종인부가 사람을 보내 주관합니다. 그리고 부모나 손윗사람이 타계하거나 심한 병으로 인해 앓아누우면, 그 또한 저희가 처리를 돕습니다.”
“후부인께서 일찍이 타계하시고, 안락후는 오랜 세월 병을 앓으셨고, 배 공자는 아직 너무 젊으시죠. 때문에 왕야(王?)께서 일을 처리하도록 저희를 이곳에 보내신 겁니다.”
공 마마가 이어서 말했다.
“종실이 아내를 맞이하는 것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정조입니다. 원말을 굳이 후야께 보여드릴 필요는 없지만, 규율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의식이 끝났으니, 저희가 경성으로 서신을 보내면 종인부의 서기가 이 혼사를 책자에 기록할 것입니다. 소내내, 이제 잘 아시겠습니까?”
“네. 알겠어요.”
단유유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군께서 일찍이 일러주시는 것을 잊으셨나봐요. 어쩌죠, 귀한 두 분께 폐를 끼치고 말았네요.”
“아닙니다.”
두 마마는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 떠났다.
“소저, 저 두 사람, 기세가 당당하네요.”
유지는 살짝 겁을 먹었다. 단가에서 시녀 노릇을 하면서 지금까지 저런 인물을 가까이에서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유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배융이 어제 서슴없이 저 둘을 대하는 모습과, 그런 배융을 두려워하던 두 마마를 지켜봤던 탓에 별것 아닌 인물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두 마마는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었다.
‘나와 배융을 감시하기 위해 종인부에서 파견한 자들이었다니!’
다른 각도로 생각한다면 단유유와 배융의 관계에 불안함을 느낀 윗사람들이 미행을 꽂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말 같은 사적인 것까지 요구하다니. 아무래도 앞으로의 나날을 편하게 보내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순진했던 단유유가 단 동지의 허튼소리에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가 버렸다. 안락후부의 도탄을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기껏해야 한물간 집안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아니야. 배융이 인색한 것도 아니고 복왕세자와 친분도 두터우니, 길바닥에 나앉을 일은 없겠지.’
그럼에도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제대로 손해 본 기분이야!’
단유유가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제 처지가 새장 안에 갇힌, 자유를 잃어버린 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남색은 사람을 해치고, 재물은 탐내어서 안 된다고 하는 거구나. 배융이 추남에 가난뱅이였다면 애초에 시집오지 않았을 것을.’
“고야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유지가 생각에 잠긴 단유유에게 일러주었다. 그러나 이미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단유유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은 은 채,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신을 헤어 나오지 못하는 늪에 빠트린 배융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헛기침을 한번 한 배융이 눈살을 찌푸린 채 단유유를 노려봤다. 팔걸이에 나른하게 걸치고 있는 두 손, 길게 뻗은 두 다리, 마치 척추가 의자 등받이에 붙은 듯 단유유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배융의 평온했던 표정이 점점 무겁게 변하더니 이제는 매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유지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녀가 몰래 단유유를 콕, 찔러 눈치를 줘도 반응이 없자 그녀의 귓가에 대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소저! 고야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난 귀머거리가 아니야. 그리고 장님도 아니고.”
한참 후에야 힘없이 고개를 든 단유유가 배융을 바라봤다.
“공 마마와 하 마마가 방금 원말을 거둬 가셨어요. 그리고 저에게 종인부를 아는지 묻더군요.”
배융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리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가 있도록.”
“네.”
단유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지와 연지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옷걸이를 지나칠 때 은서(?鼠 *변색족제비)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날씨가 말도 안 되게 추웠기 때문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건강은 꼭 챙겨야지 않겠는가.
“유지와 연지에게 한 말이오. 그대는 남으시오.”
배융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단유유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눈을 낮게 뜬 배융이 다시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유, 그대는 남으시오.”
드디어 그녀를 ‘유유’라고 불러줄 마음이 생긴 모양이다. 하지만 하필 이런 상황에 불러주다니.
‘이 음흉하고 교활한 배 모씨! 유지의 말이 맞았어. 나의 운명은 너무 고달프잖아.’
하지만 후회한다고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배융이 이내 문을 닫았다. 건장한 체격의 그가 단유유의 앞을 막고 말하기 시작했다.
“종인부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오. 너무 깊이 생각할 필요 없소.”
단유유가 눈을 내리 깐 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깊게 생각한 적 없어요. 이따가 뭘 먹으면 좋을까 고민했던 것뿐이에요. 아버지와 이낭, 그리고 태태라면 제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원하는 대로 다 마련해 주실 거예요.”
배융에게는 마치 ‘최후의 만찬은 두둑하게 먹여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축 늘어진 눈썹, 잔뜩 오므린 입술. 그런 단유유의 모습을 보던 배융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설득하고 싶어도 좀처럼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방 안의 적막한 분위기 속에 숯불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배융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변해가는 순간, 단유유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부군, 왜 일찍 말해주지 않으셨나요? 두 분을 그저 평범한 어멈으로 대할 뻔했잖아요. 제가 평소에도 겸손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경솔한 태도로 사고 쳐서 그들의 미움을 살 뻔했어요! 후부에 누를 끼칠 뻔했다고요!”
배융은 제가 방금 잘못 들은 줄 알고 미간을 구긴 채 의아한 눈빛으로 단유유에게 재차 확인했다.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이오?”
“당연하죠! 설마 제가 후회하고 겁먹은 줄 알았나요? 제가 그런 사람인가요?”
단유유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용감함이 묻어나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배융을 마주 봤다.
‘형세가 어떻게 기울든, 그 전에 뽑아 먹을 수 있는 건 다 뽑아 먹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의 고생이 전부 허투루 돌아갈 거야!’
배융은 단유유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 눈빛에 단유유는 제 발 저리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사원이 도망치다가 사장에게 잡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배융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도망치려 하지 않았소?”
“그런 적 없어요!”
“거짓말 하지 마시오!”
“아니에요! 그런 생각 한 적도 없어요! 정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주세요!”
그렇다, 그에게 증거 같은 건 없었다. 단유유가 단여혜를 따라 하기로 결심하고는 바로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던 거군요? 알겠어요. 부군의 추측이 맞아요.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래서 후회하고 있어요! 부군에게 시집온 걸 다시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을…!”
단유유는 나머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갑자기 앞으로 다가온 배융이 그녀를 힘껏 품에 껴안는 동시에 왼손으로 작고 동그란 머리를 감싸,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단유유가 배융의 품에서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내 인생…. 아니, 내 인생보다도 코가 너무 아파. 하마터면 코뼈가 부러질 뻔했다고! 이 망할 놈의 배융! 가슴에 돌이라도 심어둔 거 아니야? 어떻게 이렇게 단단할 수 있지?’
“울지 마시오. 내가 잘못했소.”
코가 새빨개져 울고 있는 단유유를 본 배융이 몸을 숙여 서툴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손이 아닌 깨끗하고 은은한 향기가 나는 손수건으로 부드럽게.
“고기가 먹고 싶어요.”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때다 싶어진 단유유가 기회를 틈 타 원하는 걸 늘어놓기 시작했다.
“알겠소. 사슴고기와 닭다리를 준비하라고 하겠소.”
“닭다리는 됐어요!”
“닭다리는 준비 하지 말라고 하겠소.”
“여우 털로 만든 외투도 가지고 싶어요! 양 표매가 입은 것 같은 거요. 흰색 말고 불여우 요!”
“알겠소. 불여우 외투로 준비하겠소.”
“하나로 부족해요! 갈아입어야 하니까요!”
“검은 양 가죽으로 만든 것도 준비하겠소.”
“요 며칠 하인들에게 상금을 하사해 주느라 지출이 많았어요.”
“다 메꾸어 주겠소.”
“두말하기 없기예요!”
“두말하지 않을 것이오.”
배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유유가 눈물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새하얀 새끼 손가락을 내밀고 약속하라 했다.
“만약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면 부군은 남자도 아니에요.”
배융이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눈으로 단유유를 바라보더니, 마지못해 그녀와 손가락을 걸어 약속하고는 황급히 손을 뗐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 창피한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부군, 저를 싫어하지 않으실 거죠?”
단유유는 상대가 저를 어린아이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럴 일 없소.”
배융이 살짝 답답하다는 투로 답했다.
“준비는 끝났소? 슬슬 마무리 하시오. 구형(舅兄* 손위 처남)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는 길이니.”
이 일은 이렇게 일단락 짓기로 했다. 단유유는 재빨리 유지와 연지를 불러 몸을 치장하고 의복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틈틈이 아침밥을 먹으며 배를 채웠다. 덕분에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다.
그녀를 데리러 온 단지금이 도작했다고 밖에 있던 하인이 알렸다. 준비를 마친 단유유가 미소 띤 얼굴로 배융을 불렀다.
“부군, 빨리 주원으로 가 후야께 인사를 드려요.”
서안(?案 *긴 책상)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적고 있던 배융이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붉은 옷에 새하얀 나비가 수놓인 치마, 홍옥이 박혀있는 머리띠, 옅은 연지로 치장한 얼굴에 달콤한 미소까지. 누가 봐도 어여쁜 새신부의 모습이었다.
이에 배융은 무척 만족한 듯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금 부어있는 단유유의 두 눈을 발견한 그가 물었다.
“눈이 부은 것 같소. 손수건으로 잠시 누르고 있다가 가는 편이 좋지 않겠소?”
“시간이 들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완벽하게 감추지는 못할 거예요.”
단유유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더니 미소를 지었다.
“어제 늦게까지 잠을 못 자서 그런 거라고 하면 되죠.”
제56화
단유유의 몸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배융이 한층 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다시 붓을 들어 올리고 글을 써 내려갔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단유유가 목을 쭉 내밀어 서안 위를 바라봤다. 붉은색 서화 위에 금색으로 쓰인 목록이 있었다.
‘상등급 죽엽청주(淸酒) 스무 단지, 거위 두 쌍, 오리 네 쌍, 새끼 돼지 한 쌍, 자마금 보석한 쌍…….’
자마금 보석이라는 글씨가 채 마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단유유가 눈을 깜빡이더니 배융의 목을 힘껏 끌어안고 물었다.
“부군, 설마 이게 다 오늘 가져갈 회문례 용 선물인가요?”
하마터면 단유유 때문에 질식할 뻔한 배융이 황급히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똑바로 서지 못할까!”
자세를 고쳐 선 단유유가 대답했다.
“잘못했어요. 힘 조절을 잘못해서 너무 세게 끌어안았어요. 다치지는 않으셨죠?”
사내대장부가 조그마한 장난에 목을 다친다니, 남자로서 그만큼 창피한 일은 없을 것이다. 배융이 잠시 침묵하더니 묵묵히 답했다.
“괜찮소. 앞으로는 행동에 신경 쓰시오.”
“왜요? 지금 아무도 없잖아요. 부군께서 어젯밤에 말씀하지 않았나요? 부부는 한 몸이라고. 예절을 따질 필요 없다고도 하셨잖아요. 저는 부군이 좋아서 더 가까워지고 싶었을 뿐인데요.”
단유유가 또다시 떠보듯 배융에게 몸을 기댔지만 배융이 싫다는 듯 몸을 피하며 예단 목록을 집어 들더니 화제를 돌렸다.
“맞소. 회문례 용 선물이오. 더 필요한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시오.”
단유유가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너무 많다고 느낄 정도예요 그나저나 자마금 보석은 왜 넣은 건가요? 엄청 귀할 텐데.”
배융은 어제 회문례의 준비는 진작 끝났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목록에 이것을 더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방금 있었던 소란 때문에 단유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거기다 덤으로 단가의 입을 막기 위해 추가했을까?
배융이 살짝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한 쌍의 자마금 보석은 오늘 창고를 정리할 때 발견했소. 단 동지께서는 좋은 직책을 원하고 계시지 않소. 하니 체면을 세우는 데 필요할 거요.”
“그렇군요.”
단유유가 예단 목록을 배융에게 돌려주더니 더 이상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부군은 돈이 많으니 이 혼사는 금상첨화예요. 아버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거고요.”
‘신경 쓰는 건 나란 말이다! 호화스러운 선물은 나에게 남겨주면 좋겠단 말이다!’
단유유의 뜻을 알아 챈 배융이 그녀에게 떠보듯 물었다.
“그래서?”
예상했다는 듯 단유유가 답했다.
“제 뜻은…. 단가에는 자매가 많잖아요. 모든 자매가 저처럼 고귀한 가문 그리고 돈 많고 인색하지 않은 부군에게 시집갈 수는 없어요. 그러니 회문례는 과하지 않게 적당히 가져가면 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자매들이 난처해할지도 몰라요.”
“그 말도 일리가 있군.”
배융이 붓을 들어 올리더니 ‘자마금 보석 한 쌍’에 줄을 그었다. 본래 이는 단유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적은 것이지만 그녀가 신경 쓰지 않는다면 무리할 필요 없었다.
“후….”
자마금 보석 한 쌍이 지워지는 것을 보던 단유유가 한숨을 내쉬었다. 배융은 고개를 숙인 채 예단 목록을 다시 적느라 단유유의 기분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후….”
단유유가 이번에 좀 더 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오?”
“방이 뭔가 허전한 느낌이에요. 이전 태태께서 혼수품으로 자기로 만든 석류를 주신다고 하셨는데, 제가 거절했거든요. 이제 와서 후회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