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모님은 현실 육아중
3권
윤희사 장편소설
CH 1
“아이들과 여기까지 동행해 줘서 고마워요.”
잘 자고 잘 먹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한 것이 풀렸는지 에밀리아와 토미는 한참을 울어 대고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
이로써 예블레 백작 부부를 단독으로 마주하게 된 레라는 식은땀을 흘리며 찻잔을 들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잠에 빠져들면서도 연신 그쪽을 내보내면 안 된다고 어찌나 성화인지.”
예블레 백작 부인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레라를 바라봤다.
“말씀 낮추세요. 백작 부인.”
“우리 집에 온 손님인데 어찌 그럴 수 있겠어요. 그건 차차 서로가 편해지면 그리합시다.”
예블레 백작 부인의 말에 레라가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았다. 비에른 공작가의 일이었다.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을 확률을 무시하지 못하는 거다.
“예블레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정말 우연히 만났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방학 때 일하는 부모의 곁을 떠나 시골로 향하는 아이들이 없지는 않아요.”
“저리 어린아이들을 그것도 이틀씩이나 걸리는 바깥으로 내모는 부모는 없지 않나요?”
예블레 백작 부인의 날카로운 일갈에 레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추궁받는 기분이었다.
“예블레 백작 부인.”
작지만 냉엄한 목소리에 예블레 백작 부인이 고개를 들고 레라를 바라봤다.
“…….”
“장담하건대 아이들을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틀씩이나 걸리는 거리를 아이들만 보낸 것이 의아하기는 했으나 세상엔 자식의 안위보다 본인의 안식을 더 중히 생각하는 부모도 있으니까요.”
“…….”
“에밀리아와 나눴던 대화가 께름칙해 아이들을 주시한 것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엄마가 두 명일 수도 있냐고 묻더군요.”
레라의 말에 그림 같던 예블레 백작 부인의 얼굴에 금이 갔다. 손이 떨리는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예블레 백작 부인이 조용히 제 가슴을 눌렀다.
반면에 레라는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집안일, 그것도 긍지 높은 귀족 가문의 비밀에 대해 함부로 떠들 생각은 없습니다. 에밀리아와 나눈 대화는 잊겠습니다.”
“고마워요. 내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레라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직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레라에 대한 감사가 먼저였는지 예블레 백작부인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요. 레라. 지금 에밀리아의 부모가 이리로 오고 있답니다. 그때까지 예서 머물러 줄 수 있겠어요?”
정중한 부탁에 레라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겠습니다.”
***
“지금쯤 어머니를 만났겠죠?”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로제타가 창밖을 바라봤다. 먹지도 자지도 못했던 터라 하얗게 거스러미가 일어난 입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삯마차의 시간은 생각 외로 정확하니까. 지금쯤 예블레 저택에서 안전하게 있을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
에런의 위로에도 로제타는 초조한지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런 로제타를 에런이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에밀리아는 괜찮을 거야. 로제타.”
에런이 로제타를 다독거렸다. 속이 타들어 가지만,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는 로제타를 곁에 두고 다른 걱정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겠죠?”
“물론, 아이들이 수도를 빠져나간 것도 빨리 발견했잖아. 그것도 모자라 정확한 행선지까지 알아냈고.”
“정말!”
로제타가 얼굴을 묻었다. 에런은 그런 로제타의 등을 쓸었다.
“에밀리아 혼자도 아니고 토미도 함께 있잖아. 토미 그 녀석. 우리한테 일부러 행선지를 알려 주려고 분홍색 스카프를 묶어 놓은 거야.”
에런의 말대로였다.
낡은 삯마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스카프는 사람들의 눈을 끌기에 충분했다. 에런과 로제타가 에밀리아의 소재를 빨리 파악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셈이었다.
“에런.”
로제타의 탁한 목소리가 에런의 신경을 긁었다. 단순한 안쓰러움에서 미안함이 겹쳤다.
“응.”
“……내가 한 말 기억해요?”
한참을 머뭇거리다 내뱉은 말에 로제타의 등을 쓸던 에런의 손이 멈추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
에런의 침묵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로제타였다.
“내가 말했잖아요. 내가 물러나야 하는 시기가 온다면 다른 사람의 입이 아니라 당신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다고.”
로제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에런과는 달리 그녀의 시선은 아무것도 없는 마차 앞을 향해 있었다.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당신이야말로 에밀리아의 가출을 빌미 삼아 떠나고 싶은 건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마리안느와 에밀리아의 일로 인해 정신이 없었지만, 함께 해결해 나가며 진정한 가족이 되어 간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에런의 믿음 속에서 로제타의 말은 그녀를 향한 애정과 믿음에 실망을 안겨 주기 충분했다.
“만약, 에밀리아가 마리안느와 살고 싶다고 해도요?”
로제타의 말에 에런이 숨을 멈췄다.
에밀리아가 없는 삶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에런이었다. 어느새부터인가 에런의 삶에 로제타와 에밀리아는 늘 함께였다.
“…….”
“나는 우리의 계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어요.”
로제타의 말에 에런이 입을 다물었다.
엄마가 가지고 싶다는 딸의 소원.
처음을 상기하던 에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뒤늦게 단호하게 말해 보지만 이미 신뢰를 잃었는지 로제타는 대답이 없었다.
“생각해 봐요. 당신 나와 결혼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이나 해 봤어요?”
로제타의 말에 에런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해 보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한 듯 에런이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고는 앞만 바라보고 있는 로제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내가 로제타 당신에게 제대로 된 믿음을 주지 못한 것 같군.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진실이야.”
“…….”
갑작스럽게 심각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로제타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난 마리안느 오를레앙을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었어.”
가만히 에런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던 로제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로제타가 눈을 깜빡거렸다. 에런은 혼란에 빠진 로제타를 가만히 두었다. 마치 그녀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를 향한 시선을 거둘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에런을 바라보고 있던 로제타가 힘을 잔뜩 주고 있던 손을 풀었다.
찰나의 순간, 어찌나 힘을 줬는지 손안에서 제멋대로 구겨진 드레스가 볼썽사나웠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여력은 없었다.
“…….”
로제타의 침묵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런이었다.
“그녀와는 아주 좋은 친구였지만, 세간에서 떠들어 대는 것처럼 연인은 아니었어.”
“그럼…….”
에밀리아를 하늘빛 눈동자를 떠올린 로제타가 급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불행히도 나 또한 그날 밤에 대한 기억이 없어.”
“기억이 없다고요?”
에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말 파티였어. 술을 과하게 먹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눈을 떠 보니 낯선 천장이더군.”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에런의 얼굴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로제타는 그런 그의 기분을 고려해 입을 다물었다.
“…….”
“일어났을 땐 나 말고 다른 이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누군지는 몰랐어. 그날의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에밀리아가 저택 앞에 버려져 있더군.”
“세상에나.”
로제타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나도 에밀리아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보고 나서야 그날의 기억과 함께 마리안느가 떠오르더군.”
에런이 괴로운지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에밀리아를 보고 그녀를 찾아가지 않은 건가요?”
로제타의 물음은 적당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만나 주지 않더군. 아니, 만날 수 없었다는 말이 더 맞겠어. 그때는 이미 왕국과의 혼사가 결정된 후였으니까.”
에런의 부연 설명에 로제타가 혀를 내둘렀다. 에런의 말대로라면 마리안느는 에밀리아를 임신한 채로 왕국과의 결혼을 진행시켰다는 것이 된다.
‘에런과 왕국을 손에 올려놓고 저울질이라도 한 건가?’
참으로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고서야 저지를 수 없는 일이었다.
에밀리아와 에런은 그저 마리안느의 선택에 놀아난 거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볼 것을 그랬어.”
짙은 후회가 절절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이에요. 에런.”
“그 과거가 나의 현재를 농락하고 있으니 문제지.”
말은 사나웠지만, 로제타의 위로에 에런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편해졌다.
“에런.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에밀리아에겐 절대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하룻밤의 실수로 태어난 아이라는 것을 알면 분명 크게 실망할 거예요.”
“당신은 참…….”
로제타의 말에 에런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큰마음 먹고 한 고백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로제타는 에런보다 에밀리아를 먼저 떠올렸다.
에런은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로제타를 흘깃거렸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엄마였다.
한편, 로제타는 자꾸만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일부러 에런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린 채였다.
‘사랑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저만 사라지면 완벽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던 마리안느였다.
그 앞에서 로제타는 몇 번이나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에런과 마리안느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실인 에밀리아까지 있으니 어쩌면 제가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런 로제타에게 마리안느를 사랑한 적 없다는 에런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밤낮없이 달린 마차는 예블레 백작가에 도착했다.
“어서 오렴. 로제타.”
“에밀리아는요?”
백작이 보낸 기사에 의해 아이들이 무사히 예블레 저택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하지만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로제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잠들었어.”
“잠든 얼굴이라도 봐야겠어요.”
로제타의 재촉에 한숨을 내쉰 예블레 백작 부인이 손짓하자 하녀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게.”
“죄송합니다.”
허리를 숙인 채 일어나지 못하는 에런을 내려다보던 예블레 백작이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