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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생의 본분은 공부일 텐데 5권
지은이│슬로프
펴낸곳│로즈엔
투고메일│editor@ridi.com
ⓒ 슬로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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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가을 학기의 중반부를 넘어서고 점점 졸업 무도회가 다가올 무렵. 벤클리 아카데미는 여러 이야기로 소란스러웠다.
아카데미 재학생이 발명품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 주인공이 한 학년에 한 명씩 있는 평민 장학생이었다.
로즈 벨은 원래도 유명했지만, 이제는 다른 학년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다들 로즈의 천재성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신문에도 콘테스트 관련한 기사가 하나둘씩 실리면서 세간의 관심도 쏠리고 있었다.
하지만 빛나는 성공에는 질시가 따라붙기 마련이었다. 로즈가 이룬 성취를 깎아내리려는 이들 또한 당연히 존재했다.
“아니, 왜 기사에 로즈 얘기는 단 한 줄도 없는 거야? 말도 안 돼!”
점심 직후의 산책 서클실, 기사를 살피던 브라일리가 성을 내면서 신문을 테이블 위에 집어 던졌다. 신문을 먼저 발견하고 가져온 레베카도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델라가 신문을 집어 들면서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요?”
기사를 빠르게 훑어 내리던 아델라는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기사는 마치 테오 조교님 혼자서 발명품을 만든 것처럼 적어 놨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죠? 공동 연구였잖아요.”
레베카와 브라일리가 동의하면서 분한 표정을 지었다. 정작 당사자인 로즈는 덤덤한 얼굴로 다음 강의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로즈가 난감한 눈빛으로 친구들을 바라보며 뺨을 긁적였다.
“으음….”
언젠가부터 콘테스트 대상의 주역은 오로지 테오인 것처럼 묘사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카데미 내에서도, 로즈가 테오의 연구에 살짝 발만 얹어 놓았던 것 아니냐는 등의 이야기가 떠돌았다.
사실 로즈는 이런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사람들은 학생인 자신보다는 테오가 연구를 이끌었으리라 생각할 만했다. 구태여 그걸 일일이 정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테오가 아니었다면, 콘테스트에 나갈 생각 자체를 못 했을 터였다. 그리고 테오가 현실적인 상용화 가능성에 관해 짚어 주지 않았다면, 입상은 몰라도 대상까지는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신문 기사나 소문 하나하나에 신경 쓰기에는 로즈가 너무 바빴다. 졸업 시험에서 수석을 따내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수석 졸업자는 졸업식에서 연단에 설 기회를 얻는다. 당연히 신문에도 이름이 언급될 것이며, 벤클리 수석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은 내내 영광처럼 남을 것이다.
로즈는 졸업식에서 자신을 한 번 더 알리고 싶었다. 종종 황제의 말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네 능력으로 네 이름을 알리거라.”
그래야만 제스퍼와의 관계도 마냥 손가락질받지 않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 공부하느라 제스퍼와 만나는 시간은 줄었지만, 제스퍼 때문에 더 열심히 하는 셈이었다.
로즈는 신문을 곁눈질하다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브라일리가 욱하며 소리쳤다.
“세기의 천재는 너인데! 다들 테오가 천재인 줄 알면 어떡해!”
“테오 선배도 충분히 천재인걸.”
“넌 분하지도 않아? 널 테오의 잡일이나 처리하는 비서처럼 묘사한 기사도 있다구. 안 되겠어. 내가 이건 항의를 해야….”
테오 릭스턴이라는 이름에 가려지는 기분이 썩 유쾌할 리만은 없었다. 로즈가 잠깐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당연한 반응이야. 예상했어. 내가 아직 보여 준 게 없어서 그래.”
로즈의 담담한 목소리에 열을 내던 브라일리가 멈칫했다.
“더 많은 결과를 보여 주고 인정받아야지. 지금 나서서 세상 사람들에게 날 더 인정해 달라고 외쳐 봤자, 아무도 듣지 않을 거야.”
“로즈….”
“내가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는 없어.”
벤클리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새로운 발명품도 꾸준히 낸다면.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어린 여자애. 아직 졸업도 못 한 학생. 게다가 평민. 자신을 향한 여러 의심의 눈초리를 잠재우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되게 노력해야만 했다. 이 사실이 분하게 느껴질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화낼 시간에 계산식 하나 더 들여다보는 게 더 생산적이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레베카가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와 로즈의 어깨를 팔로 감싸 안았다. 평소 이렇게 살가운 스킨십은 잘 안 하던 레베카인지라, 로즈가 놀라서 돌아보았다.
“널 믿어. 하지만 나는 내 친구가 엄청나게 대단한 천재라고 쉴 새 없이 말하고 다닐 생각이야.”
브라일리가 부산스럽게 손뼉을 쳤다.
“그래! 나라도 소문을 내야지.”
아델라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 왜… 공동 연구자라는 테오 릭스턴 씨는 이런 기사에 반박을 안 하셨을까요. 기사가 사실과 다르다는 건 그분 또한 잘 아실 텐데요.”
로즈의 어깨가 살짝 움찔했다. 주변에서 무어라 떠들든지 전혀 상관없었지만,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아델라가 언급한 테오의 저 태도였다.
그러나 로즈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옅게 미소 지었다.
“글쎄. 기자들이 테오 선배의 말을 믿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런 걸까요.”
아델라는 여전히 찝찝하다는 표정이었다.
“…일부러 남의 공을 빼앗을 사람은 아니야.”
적어도 지금까지 로즈가 알고 지냈던 테오 릭스턴은 그런 사람이었다.
“신문에서 어찌 떠들든, 상금과 상패는 나도 받으니까. 그거면 돼.”
로즈는 보름 내로 지급된다는 상금만 생각하려 했다. 그 돈을 어떻게 쓸지 이미 계획까지 빼곡하게 세워 두었다. 지금으로서는 이것만으로도 기뻤다.
***
테오는 자신의 정장 중에서 가장 비싼 것을 챙겨 입었다. 긴장해서 얼어붙은 손끝을 녹이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펴며, 커피 하우스 앞에 멈추어 섰다.
커피 하우스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숨을 골랐다. 오늘의 만남에서는 꼭 원하는 것을 얻어 가리라 다짐하며 발을 옮겼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자는, 돔 인더스트리의 임원이었다.
발명품 콘테스트 결과가 발표되고 언론에서 떠들기 시작하면서, 돔 인더스트리라는 큰 회사에서 테오에게 관심을 지니게 된 것이다.
‘위어 컴퍼니에 비하면 많이 처지지만….’
그래도 돔 인더스트리라면 만족이었다. 우선은 이 지긋지긋한 제국 땅에서 벗어나 해외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커피 하우스에서 테오를 기다리던 남자는 중년의 나이대였고, 손목시계를 몇 초에 한 번씩 힐끔거리고 있었다.
‘바쁜가.’
테오가 그에게 다가가자, 남자가 먼저 알아보고서 중절모를 벗으며 인사했다.
“아, 릭스턴 씨. 이리 앉으시죠.”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전혀요.”
마주 앉은 직후에는 가볍게 신변잡기만 오가는 듯하더니, 남자가 이내 본론을 꺼냈다.
“발명품에 관해서는 아주 흥미롭게 봤습니다. 황실에서는 위어 컴퍼니와 연계해서 릭스턴 씨의 발명품을 실제로 제작하려는 것 같더군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아쉽습니다. 황실에서 주최한 콘테스트만 아니었더라도, 제가 그 기술을 사 왔을 텐데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화력 마정석이 아니라 다른 마정석을 활용해 신소재를 개발한다는 발상이 아주 흥미로웠어요.”
“하하, 네….”
테오는 어색하게 웃었다.
‘빌어먹을.’
겉으로는 미소 지으면서도, 테오의 속은 따끔거렸다. 사실 돔 인더스트리가 칭찬한 부분은 모두 로즈가 낸 아이디어였다. 이 자리에는 자신이 아니라 로즈가 왔어야 했는데.
요즈음 신문에서 나는 기사들도 문제였다. 젠트리 계급의 자본이 들어간 언론에서는 평민 스타를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테오는 세기의 천재가 되어 있었다.
가난한 평민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학문을 향해 달려 나간 천재. 새 시대의 등불.
테오는 그런 삶을 지독하게 소망했으나, 자신이 절대로 그렇게 되지 못하리란 것도 알았다. 하지만 기자들이 몇 번 글을 써 주고 나자, 세간에서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테오는 머리로는 사실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에요. 사실 연구에서 보조 역할을 한 것은 오히려 저였고, 진짜 천재는… 로즈 벨이란 친구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인데,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유혹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내가 의도적으로 한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나도 성공할 수 있어. 지금까지의 노력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이런 생각에 테오가 비참하면서도 들떠 있을 때, 돔 인더스트리의 임원이 그를 부른 것이다. 임원이 테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혹시 우리 회사와 일해 보실 생각 없습니까?”
테오가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뒷덜미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평생을 바라 왔던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손을 내뻗어 붙잡기만 하면 된다.
‘위어 컴퍼니와는 다르게 이 사람은 몰라. 이번 연구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로즈였다는 걸.’
테오는 위어 컴퍼니 쪽에는 직접 로즈에 관한 자랑을 늘어놓았었지만, 이번에는 침묵했다. 심장 한구석이 따끔거리면서도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설렘과 욕망을 내리누르기 힘들었다.
남자는 긴장한 테오를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희 쪽에서 요즘 개발 중인 게 하나 있습니다. 마나 에너지와 마찰열을 정교하게 계산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게 참 쉽지가 않더군요. 마나라는 물질의 특성이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이라도 계산이 엇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너무나 큰일이 벌어지지요.”
남자는 나긋나긋하게 한참을 말했지만 막상 핵심적인 이야기는 두루뭉술하게 다 둘러대고 있었다.
“이번에 대상을 받은 발명품을 보니, 계산식이 굉장히 정교하더군요. 우리는 지금 릭스턴 씨의 섬세함과 응용력이 필요합니다.”
테오가 잠깐 얼어붙어 있다가 어색하게 웃음을 내뱉었다.
‘그 계산식은 로즈가 짠 건데.’
배 속이 근질거리고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돔 인더스트리에서 진행 중인 연구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과연 자신이 거기에 큰 도움이 될지 의문이었다.
테오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만약에… 그, 함께 일하게 된다면, 어느 연구소로 가게 될까요?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는지….”
“벤클리 조교 계약이 올해까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 쪽 사정이 조금 급해서 말이지요. 바로 연구에 참여하셔서 당분간은 겸업해 주셨으면 합니다. 연구실은 수도 근처에 마련할 예정입니다.”
“기존에 있던 연구소로 가는 게 아니군요.”
돔 인더스트리의 임원은 오묘한 미소를 짓고서는 말했다.
“이번 연구가 끝나는 대로, 향후 거취는 다시 논의하도록 하지요. 보수는 섭섭하지 않게 챙겨 드릴 겁니다. 근로 계약서를 쓰면서 더 조정하실 수 있겠지만, 대략 이 정도….”
임원이 목소리를 낮추어 테오에게 주급을 속삭여 주었고, 테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조교 일을 하면서 받는 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연구자로서의 양심과 사회인으로서의 욕심이 충돌했다. 언젠가는 자신의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게 들통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달만 이곳과 함께 일해도….’
큰돈을 벌어들일 것이다. 여기서 받은 돈을 모아서, 공화국으로 박사 과정 유학을 떠날 수도 있었다. 흔들리는 테오의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꽂혔다.
“함께 일해 보시겠습니까?”
테오는 마침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
며칠 후, 로즈는 뒤늦은 점심 식사를 아델라와 함께하고 같이 서클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델라는 로즈의 옆에서 우아하고도 완벽한 자세로 걸어가며 말했다.
“기말시험에서는 꼭 1등을 하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마도공학이란 정말로 어려운 학문이군요. 선배님은 대단하세요.”
아델라의 목소리나 표정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헷갈렸던 거 다 물어봐. 하나씩 설명해 줄게.”
“감사해요. 선배님도 바쁘실 텐데. 졸업 논문을 따로 내신다고 들었어요.”
박사 과정을 고려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논문을 따로 작성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로즈는 교수님들께 자문할 수 있는 아카데미생 신분일 때 최대한 많은 연구를 해 놓고 싶었다. 모두 좋은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어느 정도 구상은 다 끝나서 괜찮아.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델라 네가 도와달라고 하면, 없는 시간이라도 내야지.”
아델라가 로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동자를 빛내더니 중얼거렸다.
“이게 인맥의 힘이군요.”
“…응?”
“어머니께서 벨 부인의 친우여서 어찌나 다행인지.”
로즈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인걸. 나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며칠 전 주말에 로즈는 아델라와 함께 블루어드 백작가의 타운 하우스에 들렀다. 프리실라를 직접 만나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사실 로즈는 집 안에 들어설 때만 해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프리실라에게는 고마움도 빚진 것도 너무나 많았다. 아직도 퀄츠의 가족들은 프리실라의 별장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방문객 몇 명 거두는 것이야 백작 부인에게는 별일 아니겠지만, 그래도 언제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로즈는 여전히 블루어드가와 콘웨이가의 약혼이 무산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델라야 아무렇지 않다지만, 각 가문의 어른들은 생각이 다를 테니.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프리실라는 반갑게 로즈를 맞이해 주면서 호의를 베풀었다.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안나는 내 별장에서 머무르는 편이 좋겠구나.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이든 경이 너희 가족을 노리는 것 같지는 않다만.”
얼마 전부터 호사가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이든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정기 의회가 점점 코앞으로 다가오는데, 이든은 수도에 돌아올 기미가 없으니 다들 의아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그러다 이든이 이혼을 무르기 위해 애트우드 변경백 영토에 찾아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콘웨이나 애트우드 가문 모두 공식적으로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기정사실로 여겨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