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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생의 본분은 공부일 텐데 4권
지은이│슬로프
펴낸곳│로즈엔
투고메일│editor@ridi.com
ⓒ 슬로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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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제스퍼 콘웨이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드윈을 조용하게 처리할 때를.
사람들이 다 모인 곳에서 대뜸 에드윈에게 총을 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건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임무였으므로.
조용하게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독극물이 가장 유용하다. 제스퍼가 황제에게서 받아 온 합성 화학 물질은 1분 내로 사람의 심장을 멎게 하는 독약이었다.
이 약으로 죽은 자는 급성 심장 마비가 사인인 것처럼 보였다. 현재의 기술로서는 시신에서 독극물을 검출해 내기도 힘들었다.
에드윈은 제스퍼가 자신을 죽일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오늘도 호텔 지하의 바에서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 에드윈이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오, 진짜 내가 이긴 거야? 이런 날이 있네.”
제스퍼는 에드윈을 들뜨게 하려고 일부러 카드 게임에서 져 주었지만, 겉으로는 기분이 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늘 좀 피곤했어.”
“기분 좋을 때 딱 끝내야겠다. 오늘은 내가 이긴 거다?”
에드윈이 킬킬대며 테이블에서 일어서더니 머리에 베레모를 푹 눌러썼다. 제스퍼가 에드윈을 따라 일어서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에드윈은 제스퍼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 이제 네가 싫어할 곳 갈 건데.”
“어디.”
“여자 만나러!”
에드윈은 발로크에서 번 돈을 대부분 유흥과 여자에 쏟아부었다. 항구 도시 외곽에 자리한 사창가를 제집처럼 들락거리고는 했다.
제스퍼는 도저히 사창가는 견딜 수 없어서, 에드윈이 같이 가자고 할 때마다 거절했다. 그러나 오늘은 에드윈에게 바짝 따라붙어야만 했다.
제스퍼가 무심한 듯 말했다.
“오늘은 나도 가 볼까.”
에드윈이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공자님께서 웬일로?”
“하도 같이 가자고 떠들어 대니까 궁금해져서.”
“남자가 되기로 마음먹었구나.”
에드윈이 제스퍼의 어깨에 팔을 척 걸치면서 웃었다. 제스퍼는 불쾌한 표정을 너무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도대체 뭐 하는 자식이지.’
에드윈은 황제를 배반하고 도망친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태평하게 굴었다. 공화국으로의 망명이 실패해서 딱히 갈 곳도 없는 듯한데.
늦은 밤, 제스퍼는 에드윈과 함께 호텔을 나섰다. 사창가가 있는 항구 도시의 외곽으로 향할수록 가로등이 드물어졌고 거리의 폭이 좁아 들었다.
제스퍼는 에드윈의 반 발자국 뒤에서 걸으면서 그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에드윈은 술을 몇 잔 걸친 데다가 제스퍼에게서 돈을 따서 무척 들뜬 상태였다.
에드윈이 주절거렸다.
“맞다. 나 조만간 여길 떠날지도 몰라.”
“왜?”
“발로크에서의 삶도 나쁘진 않지만…. 슬슬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야겠다 싶어서.”
“취직이라도 됐나 봐.”
“확정은 아니고. 아, 잘되기만 하면 대박인데.”
“어딘데?”
“돔 인더스트리 알아?”
에드윈이 비스듬하게 제스퍼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돔 인더스트리라면 최근에 부상 중인 제조업 회사였다. 신문에서 이름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쪽에 기술을 팔아넘기려고 하는 건가?’
아직 추측에 불과했지만, 돔 인더스트리와 에드윈이 접촉한 것만은 확실했다.
‘제국의 기술을 훔쳐 가려는 기업이 있다고?’
혹은 돔 인더스트리 측에서 에드윈이 팔려는 기술이 황립 연구소에서 나왔다는 걸 모를 수도 있었다. 훗날에 이 일이 밝혀지면 엄청나게 큰 파장이 일 것이다.
‘에드윈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당장 큰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상관없는 건가.’
에드윈이 황실의 비밀 친위대로서 일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신중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입도 너무나 가벼웠다.
정말로 비밀 친위대였을까. 제스퍼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황제라면 능글맞게 거짓을 말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물론 에드윈의 정체가 무엇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만이었다.
때마침 에드윈과 제스퍼는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섰다. 제스퍼가 조용히 재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에드윈은 신나서 떠들어 대는 중이었다.
“사창가에 처음 가면 긴장할 수도 있는데, 내가 다 알려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
탁. 에드윈의 뒤통수에 차가운 금속 물질이 닿았다. 술기운에 풀어져 있던 에드윈이 입을 다물고 걸음을 멈추었다.
제스퍼가 에드윈의 한 발자국 뒤에서 그의 뒤통수에 소형 권총을 갖다 대고 있었다. 달칵, 장전하는 소리가 고요한 골목에 울려 퍼졌다.
“이봐, 지금 뭐 하는….”
“가만히 있어.”
제스퍼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두 손 뒤로 하고 천천히 걸어가. 한 발자국씩.”
제스퍼는 조금 더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가서 에드윈을 처리할 계획이었다.
황제는 이번 임무를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하라고 했다. 자신이 이번 일을 사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길 원하지 않는 듯했다.
이대로 공화국 경찰에게 붙잡히면 일이 복잡해질 것이다. 제스퍼와 에드윈 모두 외국인이니 공화국에서 처벌하지 않고 본국으로 송환시키겠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제스퍼는 사람 하나 쓰러져 있어도 크게 눈에 띄지 않을 법한 골목으로 에드윈을 이끌었다. 그곳에서 에드윈의 목에 독극물이 담긴 주사기를 꽂아 넣을 생각이었다.
에드윈은 제스퍼의 명령대로 뒷짐을 지고서 느릿하게 걸어갔다.
“누가 보냈지?”
에드윈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평소에 들어 보지 못한 어투였다. 제스퍼는 에드윈의 뒤통수에 총구를 바짝 갖다 댄 채로 침묵을 지켰다.
“처음부터 날 죽이려고 접근한 건가? 왜? 딱히 콘웨이가와 척질 만한 일을 한 적은 없는데.”
“…….”
“아니면 고모님께서 보냈나?”
“…고모?”
“대 리페티 제국의 태양 말이야.”
“그게 무슨….”
에드윈은 황제를 지칭하고 있었다. 제스퍼는 동요하는 티를 내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이 황제의 조카라고? 그럴 리가.’
그러다가 에드윈을 볼 때마다 들었던 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현 황제의 아버지이자 전대 황제였던 자의 초상화. 제스퍼는 실제로 전대 황제를 본 적은 없으나, 초상화를 통해 그의 이목구비는 알고 있었다. 에드윈은 놀라울 정도로 그를 닮았다.
에드윈은 제스퍼가 계속해서 말이 없자,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정말로 고모님께서 날 죽이라 했어?”
“…페하께 조카가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30년 전, 황제는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다. 당시 황태자였던 자신의 오빠를 직접 죽였다.
워낙 오래전 일이기에, 이제는 그 시절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역사 시간에도 흘리듯이 넘어가는 부분이었다.
제스퍼가 알고 있는 정보도 짤막하고 파편적이었다. 현재와 달리, 수십 년 전에는 리페티 제국이 재정적으로 휘청이고 있었다. 전대 황제의 사치가 극에 달한 탓이었다.
신흥 세력을 내치려던 전대 황제는 전통적인 봉건제로 회귀할 것을 주장했다. 공업 도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국고는 언제나 바닥나 있었다.
설상가상 동방 제국에서 쳐들어왔을 때, 전 황태자는 황가의 핏줄을 보호해 주는 대가로 리페티 제국의 통치권을 침략자에게 넘기려 했다.
나라가 팔리려던 것을 막아 낸 사람이 현 황제였다.
그녀는 황태자를 제국을 기만한 반역자로 지목하며 반정을 저질렀다. 황태자를 죽이고 통치권을 장악한 그녀는 허물어져 가던 나라를 바로 세우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녀를 영웅이라 찬양했다. 국민의 여론이 기울자, 상원과 하원의 만장일치로 최초의 여성 황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전 황태자의 자식들은 모두 죽었을 텐데.’
반정 당시 황태자 측근의 사치와 부패가 극에 달해 있었다. 썩은 뿌리는 도려내야 한다면서, 현 황제는 과감하게 숙청을 감행했다. 자신의 혈육에게도 가차 없었다.
에드윈의 나이는 대략 20대 후반.
‘그렇다면 반정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였을 것이다.
제스퍼가 대강 상황을 파악하고서 중얼거렸다.
“죄 없는 아이라 살려 두셨나.”
에드윈은 비아냥대듯이 답했다.
“그때는 성정이 모질지 않으셨나 보지.”
“기억도 나지 않을 가족의 복수를 하려는 건가? 폐하께서 옹립된 것은 정당한 일이었어. 당신도 알 텐데.”
“복수 같은 거창한 감정이 아니야. 그저 내 신분을 숨기고 그림자처럼 사는 게 지긋지긋해졌을 뿐.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뭐 이리 제약이 많은지.”
전 황태자의 자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나라가 혼란스러워졌을 터. 에드윈의 정체를 숨기면서 가장 가까이에 둘 방법은, 에드윈을 비밀 친위대의 일원으로 삼는 것뿐.
제스퍼는 예상치 못한 사실을 접해 잠시 당황했지만, 다시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스퍼가 총구로 에드윈의 머리통을 탁 두들기며 말했다.
“왼쪽으로 들어가.”
“저기서 날 죽일 거야?”
“그러면 폐하를 배신하고 살아남을 줄 알았나?”
에드윈이 어두운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서 낮고 음침한 웃음소리를 냈다.
“황제는 위선자야. 영웅은 무슨. 여자의 몸으로 황좌를 얻기 위해 술수를 부렸을 뿐….”
골목길의 어둠이 두 사람을 뒤덮었을 때였다. 제스퍼는 에드윈의 어깨 근육이 꿈틀거리는 걸 포착했다.
그때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에드윈이 몸을 움직였다. 제스퍼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했고, 곧장 소형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으나, 그러다간 자신이 죽을 판이었다.
탕!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에드윈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윽.”
에드윈의 귓불이 총알에 스쳐 떨어져 나갔다.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지고 있었다.
황제가 말한 대로 에드윈은 상당한 실력자였다. 반사 신경이 압도적으로 빠르고 근육의 움직임이 유연했다.
제스퍼는 검술 대회 때도 느껴 보지 못한 긴장감이 들었다. 에드윈은 총상에 주춤할 법도 한데, 곧장 품에서 자신의 권총을 꺼내 들었다.
탕! 다시 한번 골목길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순간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제스퍼를 덮쳤다. 재빠르게 몸을 비틀어 피해서 치명상은 면했으나, 총알이 왼쪽 어깨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엄청난 고통이었다. 총알이 파고든 주변의 피부가 오그라드는 듯했다.
그런데도 제스퍼는 오른손에 든 권총을 놓지 않았다. 비틀거리면서도 에드윈을 겨냥하려는데, 에드윈이 달려들어 제스퍼를 덮쳤다.
쿵, 제스퍼가 바닥에 쓰러졌고 그 위에 에드윈이 올라타 제스퍼의 목을 콱 움켜쥐었다.
“윽….”
제스퍼는 넘어지면서 왼쪽 어깨를 바닥에 심하게 부딪쳤다. 격통에 골이 울리고 눈앞이 새하얘졌다.
에드윈은 제스퍼의 목을 조르면서 분노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 여자는 거짓말쟁이야. 나한테 모든 걸 숨겼어.”
제스퍼는 흐려지는 정신을 붙들면서 손을 움직이려 애썼다.
“위선자…. 이것 봐, 결국 자기 조카까지 죽이려 하잖아. 노망이 든 거야. 여자가 황제가 되는 바람에, 모든 게 흔들리고 있어. 신분제는 무너지고 졸부들이 설치고….”
에드윈의 음성에는 울분에 가득 찬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 여자가 날 옭아맸어. 내 핏줄을 부정하게 하고, 내 부모를 죽였지. 내 모든 걸 빼앗았어.”
평생을 절제하며 살아야 했던 처지에 대한 억울함이 황제를 향한 증오로 변한 것 같았다. 에드윈은 제스퍼의 목을 더 거세게 조르면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달랐을 텐데. 언제는 날 양자로 삼겠다고 해 놓고.”
그 말을 철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애초에 황제의 자비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할 목숨 아닌가. 제스퍼는 그렇게 받아치고 싶었으나,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나 했더니. 에드윈은 황족 행세를 할 수 없게 된 제 신세를 한탄하고 변화하는 세상을 미워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저 분노만 할 뿐, 더 깊은 차원의 신념이나 생각은 없었다.
사실 요즈음 에드윈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회가 빠르게 바뀌면서, 여러 갈등이 첨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특권 계층으로서의 인생을 누리고 싶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된 자들이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고는 했다. 제스퍼는 여태껏 그런 자들을 별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어차피 자신과 엮일 리 없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에드윈 같은 자들이 주로 분노하는 대상에는 로즈 벨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기에.
“계승법에 따르면 내가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 여잔 예전 법을 다 뜯어고치려 해. 아카데미에 평민을 들이질 않나. 귀족법도 바꾼다고 하고. 자신의 정통성이 약하니까 그런 식으로….”
에드윈이 쏟아 내는 말과 그 안에 담긴 증오. 로즈가 계속해서 마주치게 될 것들이었다. 로즈를 아프게 하고 방해하고 좌절시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