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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생의 본분은 공부일 텐데 1권
지은이│슬로프
펴낸곳│로즈엔
투고메일│editor@ridi.com
ⓒ 슬로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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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저번 편지에 적어 주신 송아지 이야기 잘 읽었어요. 그 조그만 것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다니 아쉬워요. 다음에 제가 집에 갈 때면 송아지는 이미 다 자랐겠지요.
수도에는 슬슬 찬 바람이 불고 있답니다. 그래도 기숙사는 무척 따뜻해요. 훈훈한 공기가 좋으면서도, 가끔은 슬픈 기분도 듭니다. 저만 잘 지내는 것 같아서요.
북쪽에 있는 퀄츠는 이곳보다 훨씬 춥겠지요. 할머니가 걱정됩니다. 폐렴이 있는 엘리도요. 여기에 넘쳐 나는 마정석 하나만이라도 집에 가져다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니. 얼굴을 뵙지 못한 지 너무 오래되었어요.
뜨거운 물에 어머니가 주신 체리 청을 몇 스푼 풀어 마시면서 편지를 쓰는 중이에요. 익숙한 맛이 혀끝에 맴도니, 어머니가 더욱 보고 싶어져요. 할머니와 동생들도요.
벤클리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행운인데… 이 상황에 온전히 감사하지 못하고 종종 외로움을 느낀다면, 제가 철이 없는 걸까요?
내년에는 저도 성년이 되니, 의젓하게 굴어야겠지요. 하지만 어머니의 편지를 읽을 때면 퀄츠에서 뛰놀던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말아요.
이번 방학에는 집에 갈 줄 알았는데 무산되어서 더 슬픈 마음이 드나 봐요.
물론 마거릿 교수님의 실험을 도우면서 배움의 깊이는 더 깊어지겠지요. 4학년이 되기 전에 참 감사한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려고 해요.
조교 주급을 받더라도 저는 딱히 쓸 데가 없을 것 같아요. 방학 동안 어차피 실험실에서만 지낼 테니까요.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라 민망하지만 주급을 받는 대로 조금씩 부치도록 할게요. 가족들이 겨울을 나는 데에 보탬이 되기를.
매 편지에서 그립고 외롭다고 칭얼거리기는 하지만… 아카데미 공부는 정말 재미있어요. 마도공학은 배울수록 신기하고 매력적인 학문 같아요. 마정석을 엔진 삼아 움직이는 기계들을 보면, 가끔은 그 정교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돼요.
참, 조만간 북쪽에 철로가 더 깔린다는 기사를 봤어요. 기차가 퀄츠까지 닿을까요?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요.
그리고 제 걱정은 하실 필요 없어요. 편지에서 어머니의 걱정과 슬픔이 느껴져서 저 또한 마음이 아팠답니다.
저는 정말로 잘 지내고 있어요. 그 누구에게도 제 예전 이름을 들키지 않았고요. 그 남작가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보지 못했어요.
얼마 전에 우연히 옛 친우를 만났다고 하시더니… 그 이후로 마음이 계속 어지러우셨나 봐요. 블루어드 백작 부인이라면 저도 몇 번 뵈었지요. 신망이 두텁고 인자하신 분이라 기억하고 있어요. 밀고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을 저버릴 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때 저희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는지도 아시니까요.
어머니, 저는 이제 로즈 벨이란 이름이 더 친숙해요. 물론 아버지가 독단적으로 작위를 팔아넘긴 것은 명백한 잘못이에요. 우리 가족에게 영영 상처로 남겠지요. 늘 치안 판사만 보면 불안에 떨어야 하고요. 하지만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그러니 어머니께서 미안하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그저 어머니를 안아 드리고 싶어요.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그만 글을 줄여야겠어요.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열심히 공부해서 꼭 장학금을 받도록 할게요.
다음에 또 편지할게요.
애정과 감사함을 담아, 첫째 딸 로즈.
추신. 흥신소에서 아버지를 곧 찾아낼 것 같다는 연락이 왔어요. 수도 근방의 도박 하우스들을 전전하는 모양이에요. 곧 제가 아버지를 찾아뵐게요. 집문서도 꼭 되찾아 올 거고요.
추신 2. 다음 편지에서도 송아지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요즘 벤클리 아카데미에서 가장 뜨거운 가십거리는 이것이었다.
로즈 벨이 자퇴한대.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건, 3학년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코앞에 다가왔을 무렵이다.
종합 성적이 로비에 내걸렸다. 늘 1등을 사수했던 로즈 벨의 이름이 저 아래에 처박혀 있었다.
벤클리 아카데미에서 로즈 벨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자그마한 몸집에 늘 혼자 다니는 조용한 애였지만, 그녀는 유명 인사였다. 기수마다 한 명씩 선발하는 평민 장학생이었기에.
로즈는 입학시험에서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만점을 기록했다. 명망 있는 귀족 자제들을 모두 제치고 입학식에서 학생 대표로 선서까지 했다.
“누구야? 어느 집안 영애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평민이래….”
여러 시선과 말이 로즈에게 따라붙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에서 평민과 젠트리 계급에게 문을 연 것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았다.
변화하는 사회 분위기에 맞추어 학교의 문턱을 조금 낮추었지만, 드높은 유명세만큼이나 비싼 학비는 그대로였다. 귀족에 준하는 부를 지닌 젠트리 외에는 쳐다도 못 볼 아카데미였다.
별다른 재산이 없는 평민에게는 바늘구멍처럼 자그마한 기회 하나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그게 평민 장학생 전형이었다.
평민 응시생 중에서 최고점을 받은 학생 한 명에게만 학비가 전액 지급되었다.
그러나 장학생들은 4학년까지 가지 못하고 자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학생 유지 조건이 상당히 빡빡했기 때문이다.
매년 종합 성적에서 5등 안에 들 것.
그 밖으로 밀려나는 순간, 학비 지원이 뚝 끊겼다. 평민이 비싼 학비를 자력으로 댈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들 저절로 자퇴라는 절차를 밟아 아카데미를 떠나곤 했다.
10년간 무사히 졸업장을 따낸 장학생은 단 한 명.
그리고 두 번째가 로즈 벨이 될 것이라고, 아카데미의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진 모두 의심치 않았다.
로즈 벨은 평민 중에서 뛰어난 학생이 아니라, 아카데미 전체를 통틀어 보기 드문 수재였다.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것은 그녀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아카데미생들이 적당히 청춘을 즐길 때, 로즈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다.
무엇보다도 로즈 벨의 진가는 마도공학에서 두드러졌다. 다른 학생들이 언제나 골 아파하는 과목이었다. 심화 전공으로 마도공학을 선택하는 사람은 변태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로즈는 1학년 때부터 4학년이 되어서야 배우는 공학 원리를 곧장 이해했다.
공학 쪽 교수들은 모두 로즈를 탐냈다. 로즈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면, 자기 실험실에 데려가기 위해 다들 밑 작업 중이었다.
물론 로즈가 모두에게 사랑만 받는 것은 아니었다. 로즈가 평민이자 여성이라는 점은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견고하던 봉건제가 흔들리고, 작위가 아니라 부로 권력이 나뉘는 시대.
기존 귀족 중 이런 시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보수파가 꽤 있었다. 계급제를 공고히 지키기를 바라는 자들.
그런 자들에게 벤클리 입학식에서 선서한 평민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매년 종합 수석을 떡하니 꿰차는 데다, 귀족에게 아양도 떨지 않는다.
로즈 벨은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불편한 존재였다. 손톱 옆에 일어난 거스러미처럼.
14위 로즈 벨
그런데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던 그 로즈 벨이 4위도 아니고 14위를 했다.
로비에 붙은 3학년 종합 성적표는 큰 파란을 일으켰다.
장학생 요건을 맞추지 못한 로즈 벨은 어떻게 되는가. 그녀를 두고 여러 추측이 쏟아졌다.
방학을 며칠 앞두고서 때마침 심심했던 아카데미생들에게는 좋은 화젯거리였다.
“1년만 더 다니면 졸업인데. 자퇴하려나? 학비 감당 못 할 거 아니야.”
“그래도 1년 학비 정도는 어떻게 가능하지 않겠어? 아무리 평민이라도….”
“너 모르는구나. 로즈 벨 어디 출신인 줄 알아? 퀄츠야.”
“퀄츠가 어딘데?”
“들어 본 적 없지? 그렇다니까. 완전히 깡촌이라고.”
로즈는 언제나처럼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무관심하게 대했다.
섣불리 로즈 벨에게 말을 걸어 물어보는 이도 없었다. 신입생 때에는 몇몇이 로즈에게 먼저 다가오곤 했다. 대개 평민이라는 이유로 쿡쿡 찔러보고 놀리려는 애들이었다.
하지만 차차 로즈 벨의 무반응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어떤 괴롭힘에도 로즈는 덤덤하게 굴었다. 교칙에 어긋나는 행위를 당했을 때만, 학교에 조용히 신고하는 게 다였다. 독이 올라 아득바득 달려드는 쪽이 갈수록 민망해졌다.
로즈 벨과는 엮이지 말 것. 어느 순간부터 이걸 불문율로 삼으며 로즈를 고립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로즈는 오히려 고독해진 생활을 반기는 듯했다.
그렇게 로즈 벨은 아카데미에서 가장 친구가 적지만, 손꼽히게 유명하고 수상한 여학생이 되었다.
늘 구석진 책상에 붙어 있는 도서관의 망령. 속을 도통 알 수 없는 자그마한 천재. 로즈 벨의 향후 거취로 아카데미가 떠들썩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 이대로 자퇴를 할까? 한 번 성적이 미끄러진 것 정도야 아카데미가 봐줄지도 모르잖아. 다른 애도 아니고 로즈 벨이니까….”
“그러면 형평성에 어긋나지!”
사람들의 의견은 첨예하게 갈렸다.
만년 수석 로즈 벨이니 봐주어야 한다. 아니다, 그것은 공평하지 않은 처사다.
제3의 의견도 있었다.
“후원자가 붙을 수도 있지. 교수님들이 후원자를 알아봐 주지 않을까?”
“그러려나. 하기야, 공학 교수들이 엄청나게 예뻐하니까.”
와중에 모든 아카데미생들이 빠짐없이 공통으로 궁금해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로즈 벨이 14등을 했을까?
과연 로즈 벨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 해답은 보름 전 시험 날에 있었다.
1장
보름 전, 로즈 벨은 지저분한 골목 사이를 뛰어가고 있었다.
“밤부엉이라는 이름의 도박 하우스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몇 주간 묘연했던 아버지의 행방을 드디어 잡아냈다.
하나로 묶인 로즈의 다홍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때마다 곱실거리는 잔머리가 몇 올씩 튀어나왔다. 말랑한 두 뺨에는 홍조가 돌았고, 동그란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달칵. 로즈가 손에 쥐고 있던 회중시계를 열었다. 세 시였다. <사교댄스 예절: 중급반> 시험은 다섯 시 시작이었다.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에서 쇠 맛이 났다.
‘빨리… 빨리 가면 돼.’
지금 아버지를 놓치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아버지의 얼굴이야 전혀 반갑지 않았지만, 그가 들고 튄 집문서가 문제였다.
로즈의 친부, 조지 벨. 8년 전까지만 해도 베르덴 남작이었던 남자.
조지가 도박에 빠진 지는 꽤 오래되었다. 로즈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의 장면에서도 조지는 도박판을 찾아다니는 사람이었다.
가세는 점차 기울었다. 귀족으로서의 품위 유지는커녕, 배를 곯는 날도 더러 있었다.
난방할 돈이 없어 집에는 늘 냉기가 돌았다. 둘째 동생인 엘리는 그때 폐렴에 걸렸다. 평민보다도 못한 삶이었다. 가족들 모두가 힘들 때도 조지는 집에 없었다.
그러다 조지가 어느 날 갑자기 큰돈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귀족 작위와 족보를 평민 상인에게 팔아넘겼다고 했다.
매작 행위는 엄연히 불법이었다. 몰락 귀족이 늘어나는 요즈음에는 암암리에 성행 중이라지만, 고발당하면 꼼짝없이 치안 판사에게 끌려가야만 했다.
그래도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가족 모두 이름을 바꾸고 머나먼 북쪽 지방 퀄츠로 도망갔다.
아무도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할 곳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작위를 판 돈을 밑천 삼아, 집과 소를 샀다.
로잘리 베르덴은 로즈 벨이 되었다. 애칭을 그대로 이름 삼았다.
잠시간은 조지도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 대상으로 소소하게 낙농업을 하면서 먹고살았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조지가 다시 도박에 빠졌다. 온 가족들이 만류해 봐도 소용없었다.
몰래 소 한 마리를 가져다 판 게 시작이었다. 이후 조지는 쇠그릇 하나까지 탈탈 훔쳐 가서 도박 자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급기야 몇 주 전에는 집문서를 들고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왜….’
로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조지가 원망스럽고 미웠다.
정말로 퀄츠의 집까지 팔아 버리려는 걸까. 그러면 가족들은 길바닥에 나앉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가족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는 걸까?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로즈는 울컥했지만, 눈물을 참고 더 빠르게 달려 나갔다.
벤클리 아카데미는 수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조지가 발견되었다는 도박장은 서쪽 외곽이다. 여러 지방에서 이주해 온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
점점 풍경이 어지럽고 더럽게 변해 갔다. 사람들은 백색 교복을 입은 여학생을 힐끔거렸다. 이 골목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평균보다 작은 신장에 순하게 생긴 얼굴. 옷 밖으로 드러난 모든 부위가 가녀렸다. 그래도 눈빛만은 꼿꼿했다.
로즈는 <밤부엉이>에 도착해서,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계급 상관없이 누구나 출입 가능한 삼류 도박 하우스였다. 오후 세 시는 도박꾼들이 가장 한가할 때였다. 밤의 광란이 휩쓸고 지나간 하우스 안에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바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하우스 가드가 인기척에 놀라 눈을 떴다. 가드는 게슴츠레 눈을 뜨며 로즈를 훑었다. 그러다 로즈의 옷깃에 시선이 멈추었다.
‘저건 벤클리 교복 아닌가. 그, 귀한 집 자식들만 다닌다는?’
오른쪽 옷깃에 아카데미 인장이 큼지막하게 달려 있었다.
반대쪽에는 가문의 인장을 다는 게 관습이었다. 로즈는 여백으로 놔두었지만.
가드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여긴 레이디께서 오실 곳이 아닙니다.”
로즈는 폐부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을 억누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
“예?”
“조지 벨이라고 아시나요?”
가드가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로즈 앞으로 다가왔다. 로즈보다 몸집이 두 배 이상 큰 남자였다.
로즈는 가드와 시선을 마주치기 위해 목을 한껏 꺾으면서도, 주눅 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둥그렇고 아래로 처진 연두색 눈동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겁먹은 티를 내면 얕보인다. 가난한 평민이 벤클리 아카데미에서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즈는 매년 자신을 끊임없이 담금질해 왔다.
투명한 피부, 커다란 눈망울, 작은 체구. 마치 소동물처럼 연약한 인상이었지만, 로즈는 수도에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