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9권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9권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9
Cadilet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9권
차례
Chapter 01. 높은 곳에 걸린 깃발은 노려지기 십상 - 2
Chapter 02. 두 다리로 서다
Chapter 03. 황금의 왕국, 왕국의 황금, 그리고 기사
Chapter 04. 좁은 문 - 1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9권
Chapter 01. 높은 곳에 걸린 깃발은 노려지기 십상 - 2
“카이투스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 있긴 한가?”
“저를 굉장히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시나 보네요.”
“아닌가?”
메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웃고는, 잠시 그렇게 있다가 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그리고 조금 우울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충고하는 것도 잘못인가요?”
“그게 진정 충고라면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빌헬미나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메리를 위아래로 살폈다.
백 명이 보면, 백 명 모두 그녀를 가녀린 여인으로 볼 것이다. 빌헬미나도 저택 입구에서 든 의심이 진정 맞는지 계속해서 다시 검토했을 정도였다.
메리 라우츠하른은 정말 완벽한 여자다. 능력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모습에서 그랬다.
폭신폭신해 보이는 외모, 가녀린 몸, 맑은 목소리, 우아하면서도 소녀 같은 몸짓, 때 묻지 않은 순진한 말.
카이투스가 왕이 될 거라면서 떠들고 다녔다는 것도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아가씨처럼 조잘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대체 누가 마르크에 백기를 올리고 성문을 열었으며, 누가 영주관의 귀족을 비우고, 누가 한낱 의미 없는 말 몇 마디로 그녀를 덫에 빠뜨렸단 말인가?
한 달도 더 전에 도망쳤다는 카이투스? 일주일째 얼굴을 보이지 않고 저택에 처박혀 있다는 영주?
“귀족파를 규합한 것은 너인가?”
“후후, 카이투스는 멋진 카리스마를 가진 아이였죠.”
“제국과 연락을 취한 것은?”
“제 작은 조언이 힘을 발휘하긴 했죠.”
“안덱스에서의 전략도 네가 한 짓인가?”
“제법 괜찮았죠? 열심히 생각했답니다.”
“영주를 죽이고 명령을 내린 것도 너인가?”
“아버님이 자꾸만 방해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는 것인지 볼을 부풀리며 투정 부리듯 말한다.
“이 상황에서 순순히 항복한다고 마르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멍청하다니까요.”
메리는 잔을 들어 차를 마시고, 식어버린 차를 다시 따랐다. 빌헬미나는 그녀의 말을 음미하듯 입 안에서 천천히 굴려보다가 말했다.
“함정임을 부정하지도 않는군.”
“우리 둘밖에 없는데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든 저 멀리 선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현준조차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멀다. 아무런 증거도 없고, 빌헬미나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카이투스는 어디에 숨겼나?”
“후후, 이미 늦었답니다. 왕국에는 없어요. 한 달이면 충분하죠.”
“진작 봉쇄령이 내려졌을 텐데?”
“어머, 순진하게 정말 그런 걸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메리는 다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방법이야 많죠. 지금 당장에도 열… 개는 넘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고, 시선을 내려 찻잔을 빤히 바라봤다. 독살스러워 보일 정도로 새빨간 잔에 담긴 선홍색 차에 가늘게 파문이 생겼다.
“네 손에서 놀아나던 카이투스가 돌아와 왕이 될 거라는 망상을 하는 거냐?”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마요. 당신도, 아이를… 가지면 알 거예요.”
메리는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듯 말했다.
“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면… 위태롭게… 흔들… 리는 법… 이랍니다.”
빌헬미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지 이상하다.
“그리고…….”
전부터 말을 길게 늘이며 숨을 고르던 메리는 이제 제대로 말을 하기도 어려운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이 빌헬미나를 향하는 순간, 빌헬미나는 그녀가 지금 앞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리의 입술이 멈칫멈칫하다가 겨우 작게 속삭였다. 손으로 가리며 말하던 입이 보이고, 피에 흠뻑 젖은 새빨간 이빨과 혀가 보였다. 코피가 후두둑 떨어지고, 입에서 넘친 피가 쏟아진다.
“그걸로 충분해.”
팍!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은 메리가 입에 잔뜩 머금은 피를 힘껏 내뱉었고, 빌헬미나가 그것을 피하기 위해 테이블을 뒤집으며 뒤로 몸을 날렸다.
쾅!
높게 올라간 가제보의 지붕이 박살 나며 커다란 검은 신형이 떨어져 내렸다.
빌헬미나는 워낙 급박하게 움직이느라 바닥을 굴러야 했고, 덮쳐드는 이에게 검을 뽑아 맞서지 못하고 마나를 돌리며 재빨리 팔로 머리를 보호했다.
칵!
“크으…!”
무지막지한 힘이 빌헬미나의 팔을 후려치고, 그녀의 팔이 밑으로 팍 내려갔다.
무지막지한 힘이다! 마나를 느낄 수 없었다. 헌데 이 힘은…!
하지만 빌헬미나도 남은 손으로 이미 곡도를 뽑았다.
그녀는 뒤로 휙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가 습격자를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검고 쫙 달라붙는 옷을 몸에 두르고 얼굴까지 가린 놈은 팔뚝만 한 짧고 두툼한 검을 들고 있었다. 그것을 오른쪽 어깨너머로 당긴 채 달려든다.
빌헬미나는 찰나의 순간 놈의 움직임을 읽고 자세를 낮춘 채 놈의 좌측으로 파고들어 허리를 베어버리려 했다. 갑옷도 안 입은 놈이다. 이대로 베어버리면…….
“흡!”
놈이 검을 크게 휘두르고, 놈의 좌측으로 파고들려 하던 빌헬미나는 처음 생각과는 달리 재빨리 걸음을 내디뎌 거리를 유지한 채 미끄러지듯 놈의 주위로 크게 돌았다.
빌헬미나의 곡도가 놈의 왼팔을 길게 베었다.
그리고 그 순간 놈의 오른팔이 휙 돌아가더니,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어져 들어와 빌헬미나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거리를 유지한 빌헬미나는 그대로 힘껏 도약해 간격을 벌렸다.
그녀를 추격하기 위해 곧장 뒤를 돈 습격자를 향해 섬광이 내달려 충돌했다.
칵!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찌르는 검이 놈의 왼쪽 등에서부터 파고들어 폐와 심장을 꿰뚫었다. 돌을 예쁘게 깔아 둔 바닥을 부수며 검이 틀어박혔다.
현준은 방심하지 않고 오른손으로는 검을 단단히 고정하고, 다리를 걸어 움직임을 막은 뒤 왼손으로 놈의 목을 틀어쥐었다.
“흡!”
꾸드득!
현준은 검을 아래로 힘껏 당겨 내리며 놈의 목을 위로 밀어 올렸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걸로 목이 뽑히거나 검이 몸을 갈라버렸겠지만, 놈은 목이 쭉 늘어나는 것에 그쳤고, 검도 몸을 가르지 못하고 걸려서 놈의 근육에 단단히 붙잡혔다.
순간 놈의 오른팔이 휙 솟구쳐오르더니 두툼한 검이 크게 빙 돌아 현준의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현준은 재빨리 왼손으로 검을 단단히 고정하고, 오른손을 뻗어 놈의 팔을 잡아 꺾었다.
우드득! 깡!
어깨가 박살 나는 와중에도 뼈가 없는 듯 유연하게 돌아간 손목이 끝내 검을 휘둘렀고, 그것이 현준의 투구를 빗겨 친 뒤 위로 솟구쳐올랐다.
하지만 한 번 맞아줬으면 됐다.
쾅!
“컥!”
놈의 오른팔을 잡고 있던 현준의 손이 순식간에 놈의 팔을 타고 올라가 뒤통수를 아래에서 위로 힘껏 올려쳤다. 몸을 완전히 밀착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마나 나이트가 있는 힘껏 내달리다가 풀스윙으로 휘두른 주먹보다도 강렬했다.
놈은 뇌가 진탕이 되는 충격에 처음으로 소리를 냈고, 이어서 현준이 놈의 뒤통수에 박치기를 내리꽂았을 때는 결국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준!”
현준은 빌헬미나의 외침을 듣는 순간 놈의 머리 너머로 손을 뻗어 두 눈에 손가락을 박아 넣고 있는 힘껏 위로 당겼다.
건틀릿이 눈알을 뭉개며 두개골을 꽉 붙잡아 당기자 놈의 경추가 벌어지며 목이 쭉 늘어났다.
쉬쉬쉭!
그 작은 틈을 정확하게 노리고 빌헬미나의 쌍곡도가 삽시간에 수차례 휘둘러졌다. 어찌나 피부와 근육이 질긴지 네 번을 휘둘렀을 때 겨우 뼈 사이를 베어버릴 수 있었고, 그제서야 놈은 휘두르던 팔을 늘어뜨렸다. 현준은 빌헬미나에게 외쳤다.
“물러나!”
빌헬미나가 그 말을 듣는 즉시 뒤로 훌쩍 물러났다.
현준은 발목부터 힘을 그대로 전달해 허리를 확 비틀며 있는 힘껏 양팔을 위아래로 벌렸다.
뚜둑! 촤아아!
반쯤 떨어져 나갔던 머리가 현준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찢겨지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현준은 검을 그대로 고정한 채 머리를 바닥에 내리치고 다리를 들어 힘껏 밟았다.
쾅!
“흠!”
콰직!
두 번째 밟았을 때 겨우 뭉개져 곤죽이 된 머리에 마지막으로 마법으로 불을 내뿜어 태운 현준은 검에 꽂혀 비스듬히 서 있는 몸을 밀어서 바닥에 처박았다.
“후우…….”
현준은 머리에 불이 잘 붙지 않아 자꾸만 꺼지는 것을 보고 계속해서 마나를 쏟아부으며 혹시라도 몸이 움직일 때를 대비해 발로 꾹 짓밟으며 검을 뽑아 사지를 자르기 시작했다.
“타흐만의 힘이 깃든 놈입니다.”
“……그래.”
현준이 한 말에 빌헬미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준은 놈의 사지를 완전히 끊어낸 뒤 발로 차버려 멀찍이 떨어뜨렸다. 그리고 뒤늦게 달려온 혁신파의 기사와 귀족들이 빌헬미나를 둘러싸고 주변을 경계했다.
“전하, 무사하십니까?”
“그래, 아무 문제 없다.”
빌헬미나는 대답하며 조금 전의 일을 곱씹었다.
놈에게 달려들던 순간, 빌헬미나는 갑자기 머릿속에서 현준의 목소리가 크게 들린 듯했다.
‘대가리 깨집니다!’
그것이 퍼뜩 떠오른 빌헬미나는 적에게 맹렬하게 파고들어 공격을 퍼붓는 대신 거리를 유지한 채 놈의 바깥으로 크게 돌며 곡도를 휘둘렀고, 간신히 놈의 검을 피할 수 있었다.
투구도 없이 머리에 검을 맞고 멀쩡히 서 있을 수는 없다. 뒷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위험했던 순간이었다.
현준은 완전히 분해된 시체를 보다가 이를 갈았다.
‘밀고 들어갔어야 했다.’
빌헬미나가 잘 반응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놈은 현준보다 힘과 민첩은 떨어지지만, 철사를 꼬아서 만든 듯 억센 몸을 가지고 있었다. 빌헬미나의 첫 공격이 놈의 팔을 길게 베었음에도 얕은 상처가 생긴 것이 전부다. 거기에 말도 안 되게 유연한 관절. 현준이 인체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유연하게 움직인다면, 놈은 그냥 뼈가 없는 듯 관절을 완전히 꺾고 뒤틀어버리면서도 검을 휘둘렀다.
‘내가 놈을 파악할 수 없는 거리로 유인했다. 노린 건가? 아니면 우연인가?’
현준이 이를 악물고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빌헬미나는 주변을 둘러싼 이들의 만류에도 쓰러진 메리에게 다가갔다.
“……메리 라우츠하른, 더 남은 것이 있나?”
메리의 얼굴은 피로 흠뻑 젖어서, 두껍게 화장한 것들이 피와 뒤섞여 부드러운 분홍색으로 떨어져 나갔다. 흐트러진 옷 너머로 검게 죽은 피부가 고스란히 보인다.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고, 잠시 뒤 힘겹게 눈을 떴다.
“…안…… 된… 건가……?”
“그래, 나는 살아있다.”
그 말을 들었는지 메리의 눈이 다시 감겼다. 그녀는 헐떡이다가 다시 피를 토해내고, 자기 피에 질식해가고 있었다. 빌헬미나는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밀어 피를 쏟아낼 수 있도록 해줬다.
“대체 무엇을 노린 거냐?”
빌헬미나가 고뇌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 설령 이 자리에서 빌헬미나가 죽는다고 해도 카이투스가 왕이 될 수는 없다. 이미 끝났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이렇게 비참히 목숨을 버려가며 암살을 시도한단 말인가?
“…넌, 아직… 몰라…….”
“무엇을?”
메리는 피로 흠뻑 젖은 이를 보이면서도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웃고, 이내 천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속이 타들어 가는 지독한 고통에도 내색 않던 그녀의 탁해진 두 눈에 눈물이 맺히고, 일그러진 얼굴이 애통함과 슬픔으로 젖어 들어갔다.
“아아…… 카이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