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8권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8권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8
Cadilet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8권
차례
Chapter 01. 슬퍼하는 남자 - 2
Chapter 02. 골치 아픈 일은 연달아 오기 마련
Chapter 03. 준비된 자만이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Chapter 04. 높은 곳에 걸린 깃발은 노려지기 십상 - 1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8권
Chapter 01. 슬퍼하는 남자 - 2
“일단 말하라며?”
빌헬미나는 잠시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머지는 돌아가서 이야기한다. 누가 들을까 두렵군.”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휙 가버렸다.
현준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알베르트를 돌아봤지만, 그도 창백한 안색으로 현준을 빤히 보고 있었다.
“이상해?”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결국 현준도 따라서 빌헬미나의 천막에 들어갔다.
빌헬미나는 그녀의 침대에 앉아 현준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자세히 말해봐라.”
“그냥 말만 해본 건데,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문제야?”
“…이건.”
빌헬미나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국과의 전쟁도 아니고, 내전이다. 왕국의 영토 내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고.”
“아니, 일단 말하라며…….”
현준이 투덜거리다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도 그것이 미친 짓이란 것을 알고 있다. 단지 생각의 폭을 넓히기 위해, 또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일단 말한 것이다. 하지만 내심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궁지에 몰렸다면 시도할 만하지.”
“미친 소리다.”
“정말로?”
“…….”
현준이 씩 웃으며 한 물음에 빌헬미나는 싸늘한 얼굴로 현준을 바라봤다.
“사제님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지. 마법사와 물약이 아무리 많아도 귀족들 살리는 것으로 한계야. 병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병사들, 도시 한두 개 몰살하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뒤늦게 사제님들이 달라붙어도 전쟁을 수행할 상황은 아니겠지.”
그리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숨을 푹 내쉰 뒤 말했다.
“안덱스를 걸어 잠그고 아스칸에 주둔한 병사들에게 전염병을 뿌린다거나, 아니면 마법으로 운석이나 지진을 때려 박으면…….”
“그런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없다.”
“그래, 그냥 해본 말이야. 하지만 병을 퍼뜨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는 못하겠지.”
“…….”
현준은 턱을 괴고 한숨처럼 말했다.
“마법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궁지에 몰린 지휘관이라면, 생각해볼 법한 것이지.”
빌헬미나는 잠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묵묵히 생각을 정리하다가 현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너도 실제로 할 생각은 하지 말고. 내가 찾아갈 거니까.”
“그래, 믿고 있겠다.”
마법이 있고, 신의 힘이 실존하는 세계다. 그 힘으로 언제든 상처와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전염병이 돌아도 사제들이 작정하고 달라붙으면 얼마나 퍼질 수 있을까? 유전병이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순식간에 치료될 것이다.
더욱이 신전은 항상 아래로 향한다. 전염병이 퍼지기 가장 좋은 빈민가에 위치해서 밤낮으로 날카롭게 사방을 훑고 있다. 병이 돌 낌새라도 보이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온 사제들이 빈민가를 뛰어다니며 신성력을 뿌릴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세계의 사람들은, 특히 도시 사람들과 귀족들은 전염병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있다.
전염병은 주로 사제가 없는 작은 마을이나 전장에서 퍼진다. 마을의 피해는 수치로 나타냈을 때 고작 두 자릿수에 그치는 손실이며, 오랜 기간 큰 전쟁이 없었다. 때문에 모두 그 두려움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지구에서는 모두가 질병의 두려움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온 생화학 무기들도 있고, 전염병이 돈다고 하면 모든 것이 통제된다. 현준은 그것들에 대해 자세하게는 몰라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다.
그것은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 실로 공포스러운 발상이다. 화공을 펼쳐 왕국 전체를 불태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충격적이다. 적어도 화공은 모두가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전염병으로 몰살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현준의 작은 한 마디로 이세계에 생화학 무기가 등장할 뻔했다. 아니, 이미 그 개념이 뿌리내려버렸다. 신전이 그것을 깨달은 이후 전염병이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백 년간 애써온 것이 단번에 허사가 됐다. 여왕이 될 빌헬미나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기록도 남기지 마라. 라한센, 너도 마찬가지다.”
“예, 예.”
빌헬미나가 라한센에게까지 주의를 줬다. 사실 죽여버리는 것이 옳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녀는 벌써 후일 일어날 수도 있는 그 끔찍한 전쟁을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고, 머리가 지끈거려 이 개자식을 쥐어패고 싶었다.
왕국의 군주로서 마땅히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대응책을 마련하려면 주요 인물들에게 알릴 수밖에 없고, 결국 이 미친 생각이 아래로 흘러들어갈 것이다.
“신전에 말하면 잘해줄걸?”
“닥쳐라…….”
안 그래도 여왕이 된 이후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시한폭탄을 그 꼭대기에 슬쩍 올려버렸다. 빌헬미나는 묵묵히 생각을 정리하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그래, 신전과 관계를 돈독히 할 계기로 쓸 수도 있지. 그래…….”
“합리화하네.”
“…….”
깡!
빌헬미나는 묵묵히 앉아 있다가 현준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사바톤을 착용해 강철이 마나 나이트의 힘으로 정강이뼈를 후려쳤는데도 현준은 조금 인상을 쓰고 말았고, 오히려 빌헬미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발목을 털었다. 바위를 찬 것 같다.
“무슨…….”
“또 생각나는 것은, 뭐…… 타국의 개입?”
“그건 이미 손을 써 뒀다니까?”
“바다로 들어오는 건?”
“……이렇게 또 네놈의 무지함을 깨닫는군.”
“왜?”
빌헬미나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괴물이 득실거리는 바다를 어떻게 건너겠나?”
“……상인들은 잘만 다니잖아.”
“육지가 보이는 곳으로만 다니고, 결코 깊은 곳으로 가지 않는다. 그것도 괴물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소규모로 나눠서 다니지. 군을 움직이면 모를 수가 없다.”
얕은 바다는 제법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넓지만, 어떤 곳은 해안으로부터 1km만 멀어져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위험 지역에 들어서면 마법사로 가득 채운 군함이라 해도 운이 좋아 하루 버티면 선방한 것이고, 재수 없으면 산책 나온 수백 미터짜리 바다 괴물이 단숨에 배를 부숴버릴 것이다.
바닷길은 대륙에 바짝 붙은 큰길과 섬 사이를 가로지르는 작은 길로만 이루어져 있다. 군대라면 자연스럽게 해안을 훑듯이 지날 수밖에 없고, 군대가 출발하는 순간 모든 곳이 그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정도로 제대로 된 해군을 만드는 병신 짓을 할 이유도 없다. 해전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란을 피우면 호기심에 고개를 내민 바다 괴물이 새로운 장난감을 즐겁게 부수며 놀 것이다. 오죽하면 해적도 작은 섬 단위로 활동하는 자잘한 놈들밖에 없을 지경이다.
현준은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왜 그가 스칸덴에서도 해군을 보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항구에 병사들을 깔아 뒀지만, 명색이 왕실령인 항구 도시인데 군함 한 척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육지에도 수십 미터짜리 괴물이 득시글거리는데 바다는 오죽하겠는가?
바다는 인류의 것이 아니다.
“그럼 인체 실험으로 강화 인간을 만드는 건?”
“…….”
빌헬미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그래, 계속해봐라.”
“강화 인간을 만들 수도 있고, 여차하면 전열에 던진 뒤 폭파시켜 독을 뿌릴 수도 있겠지.”
“……제발, 네놈의 그 사악한 머리 좀 어떻게 해 봐라!”
알베르트와 라한센도 경악해서 현준으로부터 물러날 정도였다.
이 미친놈은 대가리에 뭐가 들어찼는지 잘도 저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지껄인다!
“아니, 이게 의외로 가능성이 있어 보인단 말이지.”
반면 현준은 말하고 보니 그것이 제법 그럴싸하다고 느꼈다. 현대에서 온갖 게임과 영화 등으로 접한 매체에서 워낙 자주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고. 마법을 이용하면 어렵지 않잖아.”
“…신전이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다 죽여버리면 누가 말할 건데? 그리고 은근슬쩍 섞어 넣으면 눈치채기도 힘들겠지. 아무튼 인간 모양이잖아.”
신전에서 알면 대륙에 있는 모든 신전에서 들고 일어나 전투 사제를 파견할 것이다. 인간 그 자체를 소중히 여겨 노예도 금지했는데 인간을 폭탄으로 쓰다니! 하지만 현준의 말대로, 정말 절벽 끝에 몰려 뒤가 없으면 할 수도 있는 것이라 더 두렵다.
“그리고…….”
현준은 잠시 어물쩍거리며 말을 골랐다.
빌헬미나는 이 미친놈이 무슨 말을 지껄이려고 말까지 고르나 싶어 이를 악물고 각오를 다졌다.
“음…… 강화 인간은 사실 이미 있다고.”
“……타흐만의 인형 말인가?”
“그렇게 불러?”
현준은 그 말에 불쾌감을 표하며 인상을 썼다.
빌헬미나는 현준의 날카로운 반응에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직접 겪으며 그들을 증오해도 모자랄 현준이 어쩐지 방어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카리오스의 견습 성기사님을 알고 있는 현준에게 그 말은 대단히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걸 쓸 수도 있다고?”
“……그래.”
‘그거’라고 지칭하자 현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빌헬미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끔찍한 생각을 하는 놈치고 그 역겨운 피조물에 애정을 가지고 있구나.”
“……서로 존중하자고.”
“그래, 내가 이해해줘야지.”
빌헬미나는 날카로운 지각 속에서 한 줄기 의심을 붙잡았다. 그녀는 이미 현준이 아이라면 목숨까지 걸고 지킬 이상한 놈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구석에 밀어버렸다. 현준의 말대로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또한 현준이 헛짓거리를 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그가 그 책임을 질 것이다.
“아무튼, 타흐만의 힘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마법사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지 않을까?”
“완전히 다른 힘이다. 네 말은 신성력을 마나로 대체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아니, 음…….”
초월의 힘이 있기에 과학의 발전이 뒤처진 세계다. 생명공학에 대해 말해도 그녀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현준은 고민하다가 대충 얼버무렸다.
“아무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타흐만의 힘을 이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잖아?”
“적발되면 신전이 검을 뽑을 것이다.”
“원래 있는 놈들은 몰래몰래 법을 어기고 사는 법이지.”
“건방진 놈.”
왕국의 최고 권력자가 될 빌헬미나에게 하는 따끔한 충고다. 현준도 너무 위험한 것을 말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신전에 홀랑 일러버리겠다는 위협이다.
빌헬미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안전장치는 많을수록 좋고, 현준은 훌륭한 최후의 보루가 되어줄 것이다. 그녀도 그런 끔찍한 것들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둘은 잠시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현준이 너무 터무니없는 것들, 그것도 신전이 기염을 토하며 당장 목을 쳐버릴 것들만 말해서 큰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럼 뭐, 암살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는데.”
“그렇다면 암살에 대해 말해봐라.”
“암살은 나보다 잘 알 거 아냐?”
“네놈의 사악한 머리통만 할까?”
“누가 들으면 내가 나쁜 놈인 줄 알겠네…….”
“…….”
모두가 싸늘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이 미친놈을 신전에 처박아 세상을 위협할 사악한 계획을 실토하게 해 미래를 지키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지만 현준도 억울한 것이, 그는 그저 현대에서 본 것들을 말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신전에 의해 정화된 이곳 인류는 알지 못하는 것들이기에 광기의 산물로 보이지만.
“뭐, 기습하고, 독을 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