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7권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7권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7
Cadilet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7권
차례
Chapter 01. 출정식 - 2
Chapter 02. 아스칸 전투
Chapter 03. 슬퍼하는 남자 - 1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7권
Chapter 01. 출정식 - 2
현준은 프리니온을 대할 때처럼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를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나이가 조금 있는 브리긴데를 상대로 힘을 빡 준 가성으로 요정 연기를 할 수는 없다.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를 재밌게 듣던 브리긴데는 시녀의 눈짓에 고개를 끄덕이고 살짝 손을 들었다.
“이제 가야겠군요.”
“예.”
현준은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난 브리긴데가 현준과 발을 맞춰 걸었다. 시녀가 문을 열어주고, 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계속 이야기나 했으면 마음이 편하겠다.’
하지만 파티에는 참석해야 하고, 이대로 불참하면 브리긴데와 단둘이서 파티에도 안 나오고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돌 것이다. 절대 안 된다.
이미 파티는 시작돼서 다들 삼삼오오 모여 가벼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현준은 처음 비마른에서 고블린을 죽이러 숲에 들어갔을 때를 떠올렸다. 정말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그동안 여러 자리에 얼굴을 비췄지만, 리베트란과 드반에게 싹 맡기고 뒤에 서 있기만 했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는 싫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다.
그 혼자라면 그냥 프리니온 곁에 붙어서 그녀를 보호하거나 구석에 숨어 있겠지만, 지금 그의 옆에는 벤팅의 혈통인 브리긴데가 있다.
브리긴데는 현준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눈치채고 슬쩍 그를 이끌고 걸었다. 곧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뜨거운 감자인 현준과 벤팅이 함께 하고 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브리긴데는 곧장 후작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현준은 멀리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후작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저, 딸인지 손녀인지 모를 아이를 보내 놓고 잘도 실실 웃음이 나오지.
“할아버님.”
“오, 브리긴데.”
그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진작 눈치채고 있었으면서 저런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브리긴데를 바라봤다. 현준은 웃는 얼굴 뒤로 칼을 갈았다.
후작은 딱 본 순간 일이 잘 안 풀렸고, 현준이 화가 났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문제 삼을 수 없는 일이다. 후작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파티는 즐기고 있나?”
“예, 각하 덕분입니다.”
이 빌어먹을 후작 덕분에 식은땀 좀 흘렸다. 하지만 어쨌든 후작과 현준 모두 웃고 있고, 현준의 파트너는 벤팅의 직계다. 다들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준에게 여자를 밀어붙이려던 이들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벤팅이 먼저 손을 썼는데 어떻게 수작을 부리겠는가?
현준은 후작의 곁을 지키는 나이 지긋한 여인을 봤다. 그녀 또한 웃는 얼굴로 수많은 귀족들을 상대하고 있다. 자기 손녀가 웬 정체 모를 놈한테 보내졌는데 괜찮은 건가?
현준은 잠시 후작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주변에 보여준 뒤 그곳에서 벗어났다.
브리긴데는 어린 나이임에도 능숙하게 현준을 끌고 온갖 곳에 얼굴을 비췄다.
“아버님.”
“브리긴데.”
‘맙소사…….’
브리긴데의 아버지면 후작의 아들이다. 서른이 넘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현준을 훑어봤다. 웃는 얼굴이지만 눈빛이 심상치 않다.
“잘 안 됐어요.”
“……그래…… 그래야지…….”
아무렇지 않게 한 브리긴데의 말에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현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준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드미트리 벤팅일세.”
“준 투레이온입니다.”
드미트리가 현준의 손을 꽉 쥐어짰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손이 으스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준에게 고통을 주기에는 부족했다. 현준은 별달리 힘을 주지 않고도 그 손을 마주 잡고는 도로 놨다.
드미트리도 현준이 꿈쩍도 않자 포기하고 손을 놨다. 하지만 얼굴에는 핏줄이 솟아서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현준이 쥐어짜듯 대답했다. 드미트리는 으르렁거리듯 답하고 브리긴데에게 웃음을 보냈다.
‘…내가 뭔 잘못을 했냐?’
후작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왜 나한테 화풀이하냐? 현준이 속으로 투덜거리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이곳저곳 끌려다니며 인사를 하다 보니 주인공께서 등장하실 때가 됐다.
“남부 왕국의…….”
빌헬미나에 대한 긴 수식어가 힘차게 읊어졌다. 하지만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그딴 말들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으니까.
곧 문이 열리며 그녀가 당당한 걸음으로 파티장을 가로질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번에도 눈을 가리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그 황홀한 라우츠하른의 황금을 보며 넋을 잃었다. 빌헬미나는 드레스가 아닌 금실로 수 놓인 화려한 정복을 입고 망토까지 두른 채 파티장의 가장 안쪽까지 걸어갔다. 파티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그녀는 거침없이 걷다가 현준을 보고는 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눈이 색다른 빛을 내뿜었다.
‘그래, 놀릴 거리 하나 잡으셨군.’
현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결혼 안 하려고 애를 썼는데 옆에 벤팅의 직계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비웃음을 지은 것이다.
한편 브리긴데는 빌헬미나의 눈을 보고 넋이 나갔다가 현준에게 웃음을 보낸 것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현준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현준은 그녀에게 살짝 웃음을 짓고는 다시 빌헬미나를 봤다.
빌헬미나는 정말 이곳의 그 누구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화려한 파티장에 새로운 색이 덧씌워진 듯하다. 그녀는 가장 안쪽으로 이동하더니 돌아봤다. 누군가 파르르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나를 환영해줘서 고맙다.”
그녀의 또렷하고 당당한 목소리가 파티장을 꽉 채웠다.
그녀는 자리를 마련한 후작과 다른 귀족들을 입에 담으며 힘을 실어줬고, 짧지만 확실하게 그녀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현준은 그녀가 눈을 깜빡이는 것을 섬세하게 조절하고 있음을 깨닫고 감탄했다.
전선에서 대화할 때는 그를 골탕 먹이거나 알베르트와 단둘이 있을 때만 눈을 보여서 잘 몰랐는데, 빌헬미나는 그녀의 눈이 가진 마력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눈을 깜빡이는 타이밍과 눈을 감고 있는 시간까지 조절해서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놨다. 그러면서 그녀의 말은 귀에 딱 박히게 했다. 실로 절묘한 조절이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현준도 가볍게 박수를 쳤다. 잘도 저런 헛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군 싶다. 정치란 게 원래 그런 거지만, 의미도 없고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참 그럴싸하게 한다.
현준은 그녀가 저런 헛소리를 내뱉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도 평소처럼 굴 수는 없겠지. 여왕이 될 사람이 아닌가?
다시 파티가 재개됐다. 고상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후작을 필두로 고위 귀족들이 빌헬미나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현준은 브리긴데가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그녀를 이끌고 천천히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힘들지는 않나요?”
“그 아이 대하는 듯한 말투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네요.”
브리긴데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그녀는 이제 현준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고, 보다 마음을 편하게 놓았다. 현준은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겨 리베트란과 프리니온에게 다가갔다.
리베트란은 다른 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녀의 손을 꼭 잡은 프리니온은 빌헬미나의 반짝이는 눈에 홀려 그것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현준은 슬쩍 프리니온의 앞에 서서 그것을 가렸다.
“프리니온, 괜찮나요?”
“네?”
현준은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프리니온은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흥분으로 가득 차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준, 왕녀 전하의 눈이…!”
막 떠들려던 프리니온은 현준이 슬쩍 입에 손을 가져다 대자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흥분으로 가득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나중에 돌아가서 이야기해줘요.”
“…네.”
그 모습에 귀족들이 현준을 힐끔힐끔 봤다. 전에 모임에서 그를 봤던 이들이다. 현준이 당장이라도 여럿 죽일 것처럼 굴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저렇게 다정한 모습에 다들 혼란스러워했다.
브리긴데는 소문이 자자한 투레이온의 레이디를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어린 아이다. 이런 아이한테 잘해준다고 자기를 보냈다니, 자신의 꼴이 비참하고 우습다.
프리니온은 브리긴데를 보고 조금 머뭇거리다가 리베트란의 뒤로 숨어버렸다.
“왜 아이한테 겁을 줍니까?”
“…지금 저한테 말한 건가요?”
“예.”
현준의 말에 브리긴데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현준은 여상스럽게 대답하고는 테이블에 놓인 작은 과자를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다시 하나를 들어 프리니온한테 슬쩍 주고, 자기도 하나 집어먹었다.
“…….”
파티장에서 정말 그걸 집어먹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브리긴데는 엉겁결에 그걸 받아 놓고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부드럽다.
“……준, 술을…….”
“브리긴데, 술을 마시기엔 아직 이릅니다.”
“…….”
현준은 지나가는 사용인에게 부탁해 음료를 받아서 브리긴데와 프리니온에게 하나씩 들려줬다. 그러고는 자신은 유유히 술잔을 들어 마셨다.
“…….”
방금 전까지는 현준이 아이 대하듯 하는 것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는데, 그것이 이 열 살도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아이와 동일한 취급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부아가 치민다.
하지만 브리긴데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음료를 마셨다. 아무튼 오늘 하루만 볼 사이다.
프리니온은 달콤한 음료를 마시고는 배시시 웃었다. 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과자를 집어 먹고 음료를 마셨다. 그냥 꼬마 아이들과 보호자로 보일 지경이었다.
현준은 작게 속삭이듯 쉬지 않고 이야기를 꺼냈다. 프리니온은 늘 그렇듯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고, 브리긴데도 아닌 척하면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딱 봐도 남녀 관계가 아니었지만 아무도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어째 끼어들기는 힘든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들에게 거침없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현준은 보지도 않고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눈썹을 모으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전하.”
“무례하긴, 기어코 내가 먼저 찾아오게 하는구나.”
“제가 어찌 감히 전하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겠습니까?”
“하.”
빌헬미나가 이 가증스러운 놈을 위아래로 살피다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슬쩍 비웃음을 지었다.
“파티에 참석하고 파트너로 벤팅의 직계까지 데리고 왔구나.”
“후작 각하께서…….”
“흥.”
현준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브리긴데가 당황해서 눈을 굴렸다. 프리니온은 또다시 빌헬미나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전하, 그냥 가시지요.”
“내가? 왜?”
“짜증 난다고 괜히 엄한 사람 괴롭히지 마시고 빨리 파티장을 나가서 알베르트 경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시는 게 어떻습니까?”
“건방진 놈…….”
현준이 속삭인 말에 브리긴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 정신 나간 놈이 감히!
“네 레이디께나 잘 해줘라. 멍청한 놈.”
“전하의 사랑하는 임께서 기다리지 않습니까? 빨리 가십쇼, 좀. 그래야 저도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날이 갈수록 맛이 가는 것 같군.”
“다 전하의 덕입니다.”
“…….”
이 개자식이 단 한 번을 안 져준다. 빌헬미나는 이를 악물면서 웃고는 현준의 어깨를 두드리는 척하며 엄지로 쇄골과 승모근의 사이를 꾹 짓눌렀다. 물론 현준은 꿈쩍도 안 했다.
빌헬미나는 브리긴데에게 쓱 눈길을 줬다. 그녀는 그 아름다운 눈에 잠깐 넋을 잃었지만, 곧 오싹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다.
빌헬미나는 다시 자리를 옮겨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알베르트가 쓰게 웃으며 현준과 악수를 하고는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현준과 빌헬미나가 워낙 작게 떠들어서 바로 옆에 있던 브리긴데와 프리니온만 그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들이 웃으며 대화를 하고, 심지어 빌헬미나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기까지 하자 머리가 복잡해져서 수군거리기 바빴다. 현준은 다시 자리에 앉고 한숨을 내쉬었다.
“브리긴데,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죠.”
현준은 빌헬미나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는 프리니온을 다시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브리긴데는 이 황당한 상황에 혼란한 머리를 수습하며 자리에 앉았다.
“무슨…….”
“그냥 그러려니 하시면 됩니다.”
현준이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브리긴데는 입술을 깨물었다.
빌헬미나는 벤팅의 직계이면서 그 형질을 제대로 물려받지 못한 그녀를 철저하게 무시했고, 현준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대하고 있다. 그 수치에 결국 그녀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끝까지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서 더 비참해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 드미트리가 그녀를 아끼듯 행동했던 것도, 그녀가 결함을 가진 아이였기 때문이다. 직계로서 그에 걸맞은 상대와 결혼해야 한다. 하지만 벤팅의 혈통을 타고났음에도 체격이 작고 몸도 약하다. 때문에 굵직한 가문에 보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직계인데 별 볼 일 없는 곳에 보낼 수도 없다.
정치적으로 가치가 없기에 비로소 드미트리는 아버지로서 온전히 그녀에게 사랑을 건넬 수 있었다. 가문의 일원이 아닌 그저 사랑스러운 딸이기 때문이다. 후작은 그런 그녀를 일말의 망설임 없이 현준에게 밀어 넣었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