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5권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5권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5
Cadilet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5권
차례
Chapter 01. 벤팅
Chapter 02. 동부 산맥 전선
Chapter 03. 가장 아름다운, 가장 고귀한, 가장 두려운 - 1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5권
Chapter 01. 벤팅
현준은 문득 추위를 느껴 망토를 여미고자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손은 움찔거리는 것에 그쳤다.
그가 몸을 떨자, 갑자기 무언가가 그의 몸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현준은 그것을 잡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예르두.’
현준의 눈이 번쩍 떠졌다. 어두운 시야 한구석에서 번져오는 빛이 보였다. 현준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초점이 맞지 않아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흐흐흐, 정신이 드냐?”
“…….”
현준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만 벙긋거렸다.
군터는 조심스럽게 현준의 몸을 일으켜 그의 입에 수통을 가져가 아주 조금씩 물을 흘려 넣었다. 현준은 그것을 정신없이 마셔 쩍쩍 말라붙은 목을 축였다.
군터가 다시 현준을 조심스럽게 눕히고, 현준이 입을 열어 간신히 중얼거렸다.
“죽은 놈 있냐…….”
“흐흐흐, 네놈보다 상태가 안 좋은 놈은 없다.”
“다행이군…….”
현준은 다시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다. 현준이 자꾸만 눈을 깜빡이자 군터가 말했다.
“좀 더 자라.”
“그래…….”
현준은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현준은 몸이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힘겹게 눈을 떴다. 눈앞이 뿌옇게 보여서 현준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앞에서 휘저었다.
“준, 정신이 드냐?”
“…그래.”
용병 하나가 현준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말하자 다른 용병들도 현준을 돌아봤다.
“후우…… 흡!”
현준은 숨을 크게 내쉬고 힘을 줘서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머리를 후려 맞은 듯한 어지러움에 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다들 무사하냐?”
“니가 제일 상태가 나빠.”
“그럼 다 멀쩡하겠군.”
“망치에 대가리 깨진 놈도 너보다는 상태가 좋을 것 같은데?”
“지랄하지 말고.”
현준이 마법으로 물을 만들어 마시고 다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지?”
“이제 겨우 하루다. 터프한 거에도 정도가 있지.”
현준은 어지러움이 조금 가시자 눈을 뜨고 마차 안을 둘러봤다. 마차 위에 천을 씌워 그를 위한 공간을 만들었나 보다. 다른 놈들을 보니 팔다리나 어깨에 붕대를 감은 놈은 있어도 확실히 중상을 입은 놈은 없다. 현준이 천을 걷어내고 한 명의 어깨를 짚어 벌떡 일어났다.
“저저, 환자가 벌떡벌떡 일어나고 말야, 응?”
어깨를 잡힌 놈이 구시렁거렸지만 현준이 넘어지지 않게 그의 손을 꽉 잡아줬다. 현준은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마차에 올라탄 놈과 자리가 없어 걷는 놈들, 그리고 말에 올라탄 군터와 라한센까지 확인한 현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군터.”
“아, 일어났냐?”
현준의 말에 군터와 라한센이 돌아보고는 다가왔다.
“잘했다. 아무도 안 죽었군.”
“니가 할 말은 아니지. 난 처음 네 꼴을 보고 이미 죽은 줄 알았다.”
현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내가 죽은 줄 알았다.”
“미친놈아, 니가 죽으면 여기 있는 놈들 다 고꾸라지는 거야.”
“그래도 이번은 어쩔 수 없었다.”
군터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라한센은 잠시 현준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예르두 경은 어땠나?”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운 자였다.”
“…그래.”
현준은 피식 웃고 손을 뻗어 라한센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하지 마라.”
라한센이 그 손을 탁 쳐내고 조금 거리를 뒀다. 현준은 작게 킬킬 웃고 군터에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
“숙영지와 기사의 파우치에 물약이 있었다. 기사의 것은 너한테 다 썼고, 숙영지에서 찾은 건 조금 남아있다.”
“음, 그래.”
현준은 마차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현준은 마차에 실린 짐을 뒤져 소시지를 하나 찾아 턱 베어 물며 말했다.
“군인들이 먼저 공격했냐?”
“흐흐흐, 그래. 먼저 덤비길래 싹 죽였다.”
“열다섯이서 정규군 스물을 죽이다니, 어디 가서 용병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하겠군.”
“흐하하! 기사를 홀로 죽인 놈이 할 말인가!”
현준과 군터는 서로를 마주보며 씩 웃었다. 이 대화를 한지 불과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반년은 된 것 같다.
“전리품은 잘 챙겼겠지?”
“그래. 덕분에 다들 든든하게 무장하고 있지.”
그제서야 현준이 마차에 앉은 용병들의 무장을 살폈다. 다들 투구는 벗고 있지만 판금 갑옷으로 든든하게 잘 무장하고 있다. 현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누가 보면 탈영병인 줄 알겠군. 그래서, 내 갑옷은?”
“앞에 있다.”
그 말에 현준이 벌떡 일어나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휘청거린 현준이 다시 균형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서 앞에 있는 마차에 훌쩍 올라갔다. 다들 그에게 손을 내밀어 팔과 허벅지를 툭툭 때리며 인사를 건넸다. 현준은 그 인사에 주먹으로 놈들의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쳐 안쪽에 놓인 풀 플레이트 아머를 넋을 잃고 바라봤다.
“하아…….”
현준이 그렇게 후려치고 마법을 퍼부었던 갑옷은 곳곳에 조금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을 뿐 반질반질하게 빛나 새것처럼 보였다. 현준은 움직이는 마차 위에서 홀린 듯 걸어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기가 막히는군.”
“나는 네놈이 더 기가 막힌다.”
앞의 마차까지 따라온 군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죽다가 살아난 놈이 제 몸보다 갑옷부터 보다니, 완전 미친놈 아닌가? 현준은 갑옷을 꼼꼼하게 살피다가 투구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정면에서 묵묵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예르두는?”
“라한센이 잘 묻어줬다.”
“그래.”
아직도 자신이 예르두를 죽였다는 것이 실감이 가지 않는다. 이 갑옷을 입고 투구의 슬릿 너머로 차가운 눈빛을 보내던 그 충직한 기사를 정녕 자신의 손으로 죽였단 말인가? 현준은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했다. 예르두를 어떻게 죽였는지는 기억나지만, 그 상황을 머릿속에 그릴 수는 없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앞도 제대로 못 보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쇼산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그녀가 보인 기술로 기사를 넘어뜨리고, 그녀가 선물한 검으로 기사를 죽일 줄을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현준도 믿기지가 않아서 피식 웃어버렸다. 검술을 익히겠다고 온갖 고생을 한 것 같은데,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쇼산나 덕에 승리했다니.
“라한센, 갑옷 입는 것을 도와다오.”
“…알았다.”
현준의 말에 마차가 멈췄다. 현준은 상관없지만, 라한센은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현준에게 갑옷을 입혀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라한센은 능숙하게 현준에게 갑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장 막혔다.
“왜!”
“기사의 몸에 딱 맞춘 거니까 당연히 안 맞지.”
라한센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현준은 예르두와 비교해서 키는 더 크고, 몸은 조금 호리호리했다. 흉갑은 아슬아슬하게 착용할 수 있었고, 그것과 연결된 복부를 가리는 폴드와, 폴드에 연결해 허벅지를 가리는 태싯도 착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도 착용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투구도 목의 길이와 머리 크기까지 고려해 만들어진 물건이고, 팔다리 부분은 말할 것도 없다. 아, 그래도 건틀릿과 발을 덮는 사바톤은 착용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만족해라. 입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라한센이 어른스럽게 타일렀지만 현준은 미처 입지 못해 남은 갑옷들을 노려보며 집착을 숨기지 못했다. 저걸 다 입어야 진짜 풀 플레이트 아머인데. 이럴 수는 없다!
“한 세트로 입지 못하면 마법도 못 쓰잖아.”
풀 플레이트 아머에 부여된 마법은 모든 부위가 있어야 제대로 발동할 수 있다. 마법 방어와 치료 같은 것은 하나의 갑옷으로도 발동할 수 있지만, 기사의 풀 플레이트 아머의 진가라고 할 수 있는 폭발적인 움직임은 완벽히 세트로 착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지금 현준이 마법을 발동하더라도 손과 발을 강하게 움직이고, 허리를 강하게 접고 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리고 그것도 다른 갑옷과 동시에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팔다리 갑옷 없이 마법을 발동하면 대차게 바닥을 구를 것이다.
“마법 방어와 치료 마법만 있다고 생각해라.”
“아아아!”
현준이 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었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그도 잘 알고 있는 거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애초에 다른 기사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을 생각을 한 것 자체가 멍청한 거다.”
라한센의 따끔한 일침을 들으며 현준은 힘없이 무너졌다. 용병들 모두 그 꼴을 혀를 차면서 바라봤다. 그들의 갑옷은 풀 플레이트 아머처럼 체형이 완전히 일치해야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갑옷의 수가 스물이나 있었기에 부족함 없이 자신에게 맞는 것을 입을 수 있었다.
“네 흉갑 박살 났던데 그냥 고맙게 생각하고 입어.”
한 용병이 하는 말에 현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좋은 갑옷이긴 한데, 더 좋아질 수 있음에도 그것을 포기해야 하다니! 방법, 방법이 없나?
“그래! 다음 마을에서 크기를 조정하면…!”
“헛소리하지 마라. 조금 구부릴 수는 있지만 늘릴 수는 없다. 그리고 마법이 부여된 플레이트 아머를 마을의 대장장이가 무슨 수로 만지겠나?”
“왜 자꾸 안 된다고만 하는 거야!”
“안 되니까 그러지 않나? 진짜 미쳐버린 건가?”
현준은 장난감 코너에서 12단 합체 로봇을 발견한 10살짜리 꼬마처럼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며 악을 질렀지만, 라한센은 프로 주부와 같은 단호함으로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추하게 발버둥 치던 현준도 결국 라한센의 잔인한 현실 주입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떨궜다.
“이런 놈이 예르두 경을 이겼다니…….”
“이렇게 된 거 싹 팔아버리겠어.”
사실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 슬쩍 맛이 가서 얌전해진 것이었다.
“정신 차려라. 그걸 팔면 네 갑옷은 어떻게 할 건가?”
결국 현준은 라한센이 그의 개소리를 다 받아주고 나서야 간신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일단 입고 나중에 새로 하나 만들면 되지…… 기사가 되면 갑옷 하나쯤은 줄 거 아냐?”
“이제와서 냉정한 척하지 마라. 내가 다 창피해지네.”
군터가 한숨을 팍 내쉬며 말했다. 다른 용병들도 고개를 돌리고 수군거리고 있다.
“남은 부위는 일단 몸에 맞는 사람이 입어라.”
팔다리와 투구만 남아있지만,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갑옷이다. 기본적으로 갑옷의 성능이 훌륭한 것도 있고, 그것에 부여된 마법도 전투 지속능력을 월등하게 높여줄 것이다. 물론 현재 갑옷의 마나는 바닥이기에 현준과 마도구에 마나가 차는 대로 틈틈이 마나를 충전해줘야 할 것이다.
현준의 말에 용병들이 단숨에 달려들어 남은 갑옷을 낚아채려 했다. 군터도 달려들어 뱀브레이스를 손에 넣었는데, 현준도 못 입는 것을 덩치가 좋은 군터가 입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갑옷이 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 놈들이 입맛을 다시며 내려놓고, 흥분을 가라앉힌 용병들이 돌아가면서 갑옷을 입어 보기 시작했다.
“후우…… 딱 맞는군. 미안하지만 이 갑옷은 내가 갖겠다.”
“쪼그려 앉아 봐.”
“…….”
“벗어, 병신아.”
하지만 결국 몸에 맞는 사람이 없어 그대로 마차 구석에 처박히게 됐다. 예르두가 현준보다는 키가 작지만 이 세계인 기준으로는 키가 큰 편이다. 거기에 기사로서 몸을 극한까지 단련했다. 그런 예르두의 갑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
“기사의 풀 플레이트 아머가 애물단지가 됐군…….”
라한센이 허무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들 고개를 돌렸다. 모두 머릿속에서 저 갑옷들을 입을 필요가 없다고 합리화하며 정신 승리를 시도했다.
이미 군인들의 갑옷에서 든든한 플레이트 아머를 챙겼다. 팔다리는 비록 플레이트 아머는 아니지만 사슬 갑옷으로 잘 보호하고 있고, 투구도 좋은 걸로 바꿨다. 이야, 이 건틀릿 좀 봐라. 손에 아주 착 감기네.
“아, 풀 플레이트 아머 입고 싶다!”
“닥쳐!”
하지만 현준이 솔직하게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 다들 정곡을 찔려 아우성을 쳤다. 전사 중에 저런 훌륭한 갑옷을 입고 싶지 않은 놈은 없다! 단숨에 용병들이 현준에게 달려들어 팔다리를 잡고 갑옷을 벗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