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3권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3권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3
Cadilet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3권
차례
Chapter 01. 모험가 54인의 탄원서 - 2
Chapter 02. 붉은 숲 마을 공방전
Chapter 03. 천 개의 눈
Chapter 04. 작은 보상 - 1
상점 쓰는 이세계 전사 03권
Chapter 01. 모험가 54인의 탄원서 - 2
그는 엠마의 집에서 싸게 묵을 수 있고, 카르마와 실적이 목적이었기에 돈에 집착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숲에서 일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까 갑자기 참을 수 없어졌고, 그대로 대가리를 들이받았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고, 마찬가지로 전혀 그답지 않다.
‘이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애도 아니고…….’
이제 와서 때늦은 사춘기가 온 것도 아니고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지?’
신전에서 나올 때만 해도 아쉬움이 남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더그를 만나 배를 타고 강옆마을로 가서 쇼산나와 만나고, 하크만과 이야기를 한 뒤…….
‘…이델리아한테 꼬맹이라고 할 처지가 못 되는군.’
현준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쇼산나와 하크만 때문이다.
스칸덴을 도망치듯 나온 것은 신전 사람들과의 이별이 아쉬웠지만 그렇게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크만은? 하크만이 쇼산나를 자기 딸처럼 아낀다고 해도 쇼산나는 이 세계에서 그가 처음 마음을 놓고 사귄 첫 친구이다. 그렇게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게 쫓아내 버려서는 안 됐다. 하크만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현준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화가 난 이유를 아니까 여유가 생기는군. 사람이란 게 참 묘하단 말이지.’
현준은 피식 웃어버렸다. 자기 꼴이 웃겨서다. 하지만 붉은 숲 마을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는 여전했고, 이미 일을 벌였다.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D급 이상인 사람 손 들어봐라.”
갑작스러운 말에도 모험가들이 손을 들었다. 칼을 포함해서 일곱 명. 역시 너무 적다.
“C급은? 없나?”
“C급이 올 의뢰는 아니었으니까.”
누군가의 말에 현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고작 놀 잡는 거로 생각해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 에르제베트도 일반 놀과 다를 것 없다고 들었다 했다. 즉, 애초부터 잘못된 정보가 돈 것이다.
“누구 정식 의뢰서를 본 놈 있냐?”
“내가 봤지.”
“기억나?”
“이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그의 말을 들어보니 의뢰서는 E급과 D급에 각각 있었고, 그저 눈이 세 개 달렸을 뿐인 평범한 놀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다.
“좋아. E급들, 싸워보니 어땠냐? 할 만하냐?”
“아니, 뭐…….”
“똑바로 말해. 쓸데없는 곳에서 자존심 챙기지 말고.”
“젠장, 당연히 상대도 안 되지. 혼자서는 싸울 엄두도 안 난다.”
“그럼 D급은?”
“하나라면 상대할 수 있지만 좀 위험하지. 그리고 혼자 다니는 놈들도 아니고.”
“그래. 하지만 의뢰서는 E급과 D급에 걸려 있었다고. 이게 무슨 뜻인 거 같냐?”
“그러니까… 우리가 속았다는 거냐?”
“그래. 애초에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고 의뢰를 올려서 모험가들을 끌어모은 것이다. 저 정도로 강한 걸 알았으면 C급 아래로는 쳐다도 안 볼 것이고, C급이 저딴 푼돈 벌겠다고 오지는 않았겠지.”
다시 모험가들이 소란스러워졌다. 돈 가지고 개 같이 구는 것도 그렇지만, 알고 보니 그들의 목숨 가지고도 장난질을 치고 있었다는 뜻이다.
“강가마을에 가면 이 사람의 도움을 받아 탄원서를 쓰겠다. 길드 직원과 이 정도 수의 모험가가 탄원서를 쓰면 길드에서도 무시하지는 못하겠지.”
“이야! 너 진짜 대단한데?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너네랑 달리 똑똑하니까 그런 거 아냐!”
다들 낄낄거리며 숲길을 걸었다. 이 정도 수가 몰려다니는데 동물이고 괴물이고 싹 다 도망가고 가까이 오는 놈은 없다.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금방 강가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고, 갑자기 수십 명의 무장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마을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곧 입구의 문이 쾅 내려가고 목책에 경비병들이 줄지어 섰다.
“정지! 정지! 뭐 하는 놈들이냐!”
“붉은 숲 마을에 있던 모험가들이오!”
현준이 나서서 외쳤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옆에 있던 칼이 귀를 틀어막았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몰려왔나!”
“돈이 다 떨어져 나왔소! 안 그러냐!”
“맞지!”
“물가가 너무 비싸서 말이야!”
경비병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경비대장의 눈치만 살폈다. 평소에는 모험가들한테 통행세나 받아먹으면서 거들먹거렸지만 이렇게 몰려오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무장한 전사 수십 명이 있는 것이다. 경비병이 목책을 지킨다고 해도 작정하고 달려들면 강가마을이 함락되는 일도 시간문제다.
“마을 안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 약속하면 들여보내 주겠소!”
“됐소! 돈 없다니까! 자리들 잡아라!”
“아, 야영하는 거 싫은데.”
다들 툴툴거리면서도 마을 입구 앞에 야영 준비를 척척 하기 시작했다. 현준이야 경력이 짧아서 야영 경험이 없다지만, 모험가로 활동하면서 야영 안 해본 놈은 거의 없다. 어어, 하는 사이에 커다란 야영장이 만들어졌다. 멀리서 보면 그것은 그냥 군기가 좀 빠진 군인들의 숙영지처럼 보였다.
“이, 이게 무슨…….”
경비대는 어떻게 할지 몰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돈이 없어서 안 들어오겠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다. 마을 내에서 밤에 어슬렁거리는 놈은 경비대에서 체포해야 한다. 이 많은 놈들이 마을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야! 다 모여봐라!”
현준의 외침에 다들 구시렁거리면서 모였다. 짐을 풀고 나니까 그냥 쉬고 싶어진 거다.
“지금부터 붉은 숲 마을에서 겪은 불합리한 일을 다 읊어라. 탄원서 쓸 거다.”
구시렁거리던 모험가들이 핏대를 세우고 악을 쓰고 욕을 지껄이며 단숨에 소란스러워졌다. 멀리서 바라보는 경비대들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현준은 길드 직원의 도움을 받아 항목을 쭉 적었다. 그리고 몇 번의 수정을 가한 뒤 모두 앞에서 읽었다.
“뭐야! 내 이야기 빠졌잖아!”
“여자한테 차인 건 니 얼굴이 잘못한 거고! 자, 더 없지?”
“그래. 된 거 같다.”
다들 수긍하자 현준이 잉크가 마른 양피지를 둘둘 말아서 끈으로 묶었다.
“야, 파티별로 먹을 거 사러 갈 놈 한 명씩 나와라. 한 명만 나와라. 몰려가면 저분들 지리겠다.”
현준의 말에 웃음이 터지고 몇 놈이 낄낄거리며 현준을 따라 나왔다.
“무슨 일이오!”
“긁어모아 보니 돈이 좀 있어서 먹을 것만 좀 사겠소.”
경비대장이 이를 악물었다. 위험해 보이지만 거절하면 진짜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결국 경비대장은 얌전히 굴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알아서 사고 입구에 있어. 칼, 여기. 내 것도 사줘.”
현준은 칼에게 동화가 몇 개 든 자루를 던졌다. 칼은 그것을 탁 받고 얼떨떨하게 현준을 바라봤다.
“이렇게 막 줘도 돼?”
“내가 아는 여자애가…….”
“아, 젠장! 알았다! 알았어!”
현준은 손을 대충 흔들고는 길드 직원의 안내를 받아 접수처로 향했다.
“뭐야, 니가 왜 여기 있어?”
“뒤질 것 같아서 튀었다. 여기.”
“이건 또 뭐야?”
“모험가 길드에 올리는 모험가 54인의 탄원서.”
“뭐?”
접수처의 직원이 황당해하며 양피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뭐 이런 걸 썼나 싶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읽었지만, 이내 표정이 굳더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야, 길드가 완전 뒤집힐 거다.”
“아니까 닥치고 바로 올려.”
“난 모른다. 니 이름으로 올릴 거야. 책임 안 진다?”
“닥치고 그냥 좀 해라. 좀.”
접수처의 직원은 창백한 얼굴로 손을 덜덜 떨며 도장을 찍고는 양피지를 옆에 두려고 했다.
“개자식아, 바로 올리라고!”
“이 새끼야! 너무한 거 아니냐!”
“너무한 건 붉은 숲 마을에 처박혀 있던 나한테 니가 한 짓이고, 이 개―자식아!”
결국 접수처 직원은 욕을 구시렁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디로 가는 거요?”
“탁시스로 가는 마차로 가겠지. 그냥 두면 언제 갈지 모르니까.”
담담하게 말하지만 아까 모습을 보면 사실 한 성깔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만큼 붉은 숲 마을에서 겪은 일에 진절머리가 났다는 것이겠지.
“맥주라도 한잔 사야겠군.”
“사양 않고 마시겠소.”
현준은 길드 직원을 데리고 주점에 들어가 맥주를 두 잔 시켰다. 길드 직원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원샷을 때려버렸다. 현준은 어깨를 으쓱이고 그에게 자신의 잔을 내밀었고, 그는 아무 말 않고 한 잔 더 원샷을 때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상남자군.”
“사실 좀 후회되는군. 배가 터지겠어.”
“맥주니까 다시 나오겠지.”
길드 직원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글렌이오.”
“강현준. 준이라고 부르시오.”
현준은 그 손을 꽉 잡았다. 둘은 피식 웃고는 마을 입구로 돌아갔다. 이미 모험가들이 돌아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나갈 테니 열어주시오.”
경비대장의 손짓에 경비병들이 문을 열었다. 현준은 경비병들은 쳐다도 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젠장.”
경비대장이 중얼거렸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탄원서 보냈다. 말해 두겠는데, 탄원서 보냈다고 바로 뭔가 바뀔 거로 생각하지 마라. D급 파티가 와서 일 다 끝나고 나서야 반응이 올 거고, 아무 반응 없을 수도 있다. 지금은 그냥 잊어버려.”
“그래, 그래. 너도 앉아.”
현준은 그들을 따라 커다란 모닥불 주위에 자리 잡고 앉았다. 어느새 해가 기웃기웃 넘어가려 한다. 이렇게 모닥불을 둘러싸고 여럿이 앉아 있으니 수련회 캠프파이어 같다.
“야! 마셔! 마셔!”
“저 병신, 술은 또 언제 샀냐?”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혼자 도망치듯 나왔다면 손해 본 것 같고 자존심이 상해서 욕을 지껄이며 침이나 뱉었겠지만, 다 같이 몰려서 나오고 촌장에게 거하게 한 방 먹인 데다가 이렇게 둘러앉으니 자신들이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 같아서 크게 웃으며 떠들기 바빴다. 술이 돌자 취기가 슬슬 오르고, 모험가들이 음담패설과 쓸모없는 자존심 싸움을 하며 분위기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이봐! 준이라고 했지?”
“그래.”
“야, 너 멋지더라. 진짜 통쾌했다고! 내가 모험가 하는 동안 온갖 개 같은 일은 다 겪어 봤는데, 오늘같이 기분 죽이는 날은 처음이다!”
현준도 씩 웃으며 모험가가 건네는 맥주잔을 받아 쭉 들이켰다. 여전히 소 오줌 같은 맥주지만 분위기가 달아오르니 참고 먹을 만하다.
“그래서, 넌 등급이 뭐야? D? C? 설마 B냐?”
“하하하! 준은 모험가 된 지 보름밖에 안 됐는데 E급이라고! 대단하지 않냐!”
현준은 가만히 있는데 정작 칼이 신나서 외쳤다. 그도 취기가 많이 올랐는지 휘청휘청한다.
“이야! 보름 만에 E급이라고? 뭔 짓을 한 거야?”
“보름이면 신기록 아니냐? 붉은 도끼가 이십 일이니까.”
“붉은 도끼는 또 뭐야?”
“아, 새끼. 보름 일 한 티를 내네. 붉은 도끼 몰라? 붉은 도끼.”
“모르니까 묻겠지 병신아.”
“그래서 붉은 도끼가 뭐냐고.”
“붉은 도끼는 말이야. 어? 크으… 진짜 유명한데 그걸 모르네.”
“이거 시비 거는 거 맞지? 때려도 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