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핑 히어로 11권
도핑 히어로 11권
도핑 히어로
11
소락
도핑 히어로 11권
차례
Chapter 01. 개나 소나 왕
Chapter 02. 산 자와 죽은 자
Chapter 03. 강호 없는 강호 팀
Chapter 04. 황룡
도핑 히어로 11권
Chapter 01. 개나 소나 왕
악귀들이 합창과 함께 진군을 시작하자, 성벽이 어지러워졌다.
토기 병사들은 활과 창으로 공격했지만, 물리 공격은 악귀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반대로 악귀들의 공격은 토기 무사들에게 유효했다. 순식간에 성벽 일각이 완전히 악귀들의 놀이터가 됐다.
전각의 지붕에서 쪼그려 앉아서 지켜보던 강호의 분신체는 혀를 찼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나네. 진짜 재수 없는 새끼라니까.”
약속을 어길 때를 대비해 분신체를 보내놓은 강호였다. 제임스 돌턴이 악귀 몰이를 아예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저 시차를 두고 이쪽을 골탕먹일 때를 대비한 것뿐.
하지만 유자광이 누구던가?
과거에 강호가 뒤통수를 맞은 것은 유자광의 성향을 파악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권능을 지니고 괴물 박멸을 위해 항상 선두에 서서 싸운 사내.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도 늘 겸손함을 잃지 않은 이가 제왕검이다.
심지어 강호는 몇 차례 놈과 함께 싸운 적도 있었다. 그랬기에 유자광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표리부동한 인간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그 오판 때문에 뒤통수를 얼얼하게 맞았다.
“아깝군. 고작 이 정도로는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가? 뭐, 기회야 또 오겠지.”
이성적으로는 저들이 약속을 지켜 반가워해야 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약속을 어기길 바랐다.
아쉬움에 혀를 차던 분신체는 홀연히 사라졌다.
* * *
네 갈래로 나뉘어 악귀를 유인하던 파티원들은 한곳을 향해 달렸다.
앞을 막는 토기 병사들의 공격을 흘리면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아니, 줄일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그대로 악귀의 파도에 집어 삼켜질 테니까.
“하! 유자광 그 새끼 착한 척하는 건 여전하네. 아니지. 지금이 오히려 더 심할 땐가?”
유일하게 홀로 악귀를 유인하던 강호는 쇠좆매를 휘둘러 달려들던 토기 병사 하나를 아예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꼬투리만 잡히면 요 쇠좆매 맛을 보여주려 했는데.”
쇠좆매는 조선 시대 태형에 쓰던 형구로 수소의 생식기를 말린 무기다.
사적급 유물이지만, 길이가 50㎝ 정도밖에 되지 않아 지금 사용하기 적절하지 않아 보이나 토기 병사 한정으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피부에 닿으면 터지는 신통이 있어, 흙으로 빚은 토기 병사에겐 안성맞춤이다.
“어때? 주변에 강한 기운이 느껴져?”
― 이곳 자체가 기운이 넘치는 곳이라 감지하기 쉽지 않다.
“대단한 존재께서도 어려운 게 있나 봐?”
― 흥! 하찮은 네 녀석의 도발 따위에 넘어갈 것 같으냐?
“도발 아닌데?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그러지 말고 대충이라도 살펴봐 줘. 9층에 오르면 너한테도 좋잖아?”
강호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늑돌이의 뭉툭한 앞발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삐죽 솟았다.
만약 아야가 보았더라면 귀엽다고 발을 동동 굴렀을 법한 장면이다. 하지만 늑돌이는 이 건방진 인간의 머리통을 날려버릴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 감히 날 속이려 하다니. 네놈의 그 가벼운 혓바닥이 언제고 큰 화를 가져다줄 거다.
“응, 인정. 그리고 그 화는 너랑 함께 나누고.”
순간 늑돌이는 말문이 막혔다. 그야말로 제 얼굴에 침 뱉기가 아닌가.
홀로 키득대던 강호는 은근한 목소리로 늑돌이를 달랬다.
“황룡도 고대의 존재인 데다 격이 높은 생명체야. 당연히 이 사태에 대해 뭔갈 알지 않겠어? 나야 하찮다고 무시당할지 모르겠지만, 넌 아니잖아? 대등한 존재라면 호의를 가지고 이것저것 알려줄지도 몰라.”
― 고작 이런 곳에 나와 대등한 존재가 있을 리 없다.
젠장! 덩치는 솜뭉치 주제에 자부심은 아주 에베레스트 산이세요. 여기저기 쓸모가 많으니 봐준다.
“그으러엄! 우리 늑돌이와 대등하려면 적어도 신 정도는 등장해줘야지. 그래도 너도 궁금하긴 하잖아?”
신까지 들먹이자, 늑돌이의 콧잔등이 주름이 잔뜩 잡혔다.
― 근방에 강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 그냥 안으로 들어오라는 건가? 내가 또 자신만만하다 뒈진 놈들 많이 봤지.”
강호의 입술이 차가운 비웃음으로 비틀렸다.
* * *
옥좌에 앉은 사내는 감았던 눈을 떴다.
“어떤 재주를 피우는지 구경하려 했지만, 황궁에 삿된 존재까지 용납하기 어렵구나. 쫓아버려야겠다.”
금관을 통해 악귀들이 황궁을 어지럽히는 걸 알아차린 기호월은 사납게 웃었다.
“저희가 나서겠습니다.”
“이미 적당한 이를 보냈다.”
공하진은 내심 불만이었지만, 감히 드러낼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에 기호월은 골난 아이 달래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화랑의 상대는 따로 있다.”
“다른 적이 황궁에 들어왔단 말씀이십니까?”
“후후후. 황궁이 어지러운 틈을 타 위로 오르고 싶은 이들이 간을 보는 것 같다.”
“간교한 놈들이군요.”
“영리한 거겠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위로 오르지 못할 테니.”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할 겁니다.”
“글쎄? 오히려 난 몇 놈 정도는 8층으로 올려보낼까 생각 중이다.”
뜻밖의 말에 공하진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걸 본 기호월은 허허롭게 웃었다.
“진정한 절망을 맛보아야 내가 내미는 손을 잡지 않겠느냐?”
“아!”
공하진은 그제야 왕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감탄했다.
7층에서 여전히 옥주의 제안을 거절한 채 호시탐탐 상층을 오를 기회를 엿보는 공략자들이 남아있다.
그들은 모른다.
진정한 절망을.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8층에서 진정한 절망을 맛보았기에 공하진은 확신했다.
유일한 희망은 오직 자신의 주군이라는 것을.
“왕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후후후. 그동안 오랜 기다림이었다. 지루했을 테니, 사냥을 허하노라. 단 옛 친구들은 막지 말거라.”
“존명!”
* * *
황궁의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이다. 자객의 습격이나 반란을 막기 위해, 일부러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랬기에 악귀를 유인한 뒤 모인 파티원들도 곧장 황궁의 대전으로 달릴 수는 없었다.
“일단 성공은 했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가 문제구나.”
도천 법사의 말에 강호는 씩 웃었다.
“우리에겐 0과 1의 마법사가 있잖습니까.”
“으잉? 하지만 이곳은 기운이 너무 강해 쉽지 않을 텐데?”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최중연은 어색하게 웃었다.
“바깥에서는 잘 안 되더라고요.”
“내가 잘 되게 해주지.”
“무슨 방법이 있어?”
“기운이 강하니 안 된다며? 그럼 그 기운을 흐트러뜨리면 되잖아.”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다. 다들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겠지만, 지금은 생각할 겨를이 없는 상황. 그랬기에 강호의 노련함이 참신함으로 포장된 것이다.
“그럼 내가 나설 차례인가?”
도천 법사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 발 나서자, 강호가 황당한 얼굴로 면박을 주었다.
“아저씨가 거기서 왜 나서요?”
“잉? 기운을 억눌러야 한다면서?”
강호는 대답 대신 사방에 무엇인가를 던졌다. 그러자 주먹만 한 물체들이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퍼퍼퍼퍼펑!
폭음과 함께 후끈한 열기가 사람들의 얼굴을 때렸다. 흙먼지만 뽀얗게 날리고 벽은 멀쩡한데도 강호는 최중연을 재촉했다.
“뭐해? 빨리 저쪽 문을 여기로 옮겨.”
“으응? 어, 알았어.”
얼이 빠져있던 최중연이 황급히 태블릿을 조작했다. 기운이 약해졌다지만, 폭발로 인해 밀려난 것일 뿐. 시간이 지나면 금방 복구될 것이다.
그랬기에 최중연이 초조함에 자꾸 실수 연발이었다.
“유적에는 일정한 규칙이나 법칙이 있는 경우가 많아. 그걸 찾는 게 공략의 키지. 근데 별별 방법을 동원해도 못 찾는 경우도 있거든. 그럴 땐 아예 힘으로 부수거나 비틀어버려.”
강호가 옆에서 말하자, 최중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비틀라고? 어떻게?”
“얌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잘난 0과 1의 마법사님께서 알아서 하셔야지. 프로그래머라며? 그럼 일부러 버그를 심어서 망가뜨릴 수도 있는 거 아냐?”
“!!!”
“지금 완벽한 건물 짓는 시합하는 거 아니잖아. 대충해 대충. 무너져도 상관없어. 고작 담벼락에 깔려 죽는 약해 빠진 인간은 여기 없으니까.”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최중연은 정수리부터 꼬리뼈까지 벼락이 관통한 것만 같은 짜릿함을 맛봤다.
그의 권능이 폭주하듯 태블릿에 밀려들며 저 멀리 있던 문이 희미해지며 눈앞에 벽과 뒤바뀌었다.
“휴우, 근데 그런 노하우를 알려줘도 돼? 그런 건 같은 길드원끼리도 잘 안 알려주잖아.”
노하우? 괴물을 죽일 수만 있으면 내 일기장이라도 공개할 판이다. 뭐, 일기를 써본 적은 없지만.
강호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딴 건 노하우 축에도 못 끼어.”
최중연이 거의 존경에 가까운 시선으로 강호를 보는 사이, 도천 법사는 모양이 찌그러진 문에 손을 대며 감탄했다.
“허! 이게 되네?”
“바쁜데 빨리 움직이죠.”
강호는 겁도 없이 문으로 몸을 내밀었다. 원래 문이 있던 곳에 몰려 있던 병사들이 뒤늦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달려드는 병사들을 무력화시키며 점점 황궁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최중연의 활약으로 문 근처에 몰려있던 병사들을 상대하지 않아 빠른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황궁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지만, 강호에겐 길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옥주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은 멀리서도 피부가 따가울 만큼 어마어마한 기운이 이글거리고 있었으니까.
― 이 앞에 무엇인가가 있다.
늑돌이의 경고에 강호는 잠시 머릴 굴렸다.
강행 돌파냐? 아니면 돌아서 가느냐?
옥주라는 강대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체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돌아서 간다고 체력을 보존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 도천이 입을 열었다.
“침선장님, 앞에 강렬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구정아는 잠시 운을 뗀 뒤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며 싱그럽게 웃었다.
“우리의 힘을 보여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