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핑 히어로 09권
도핑 히어로 09권
도핑 히어로
09
소락
도핑 히어로 09권
차례
Chapter 01. 그 의뢰, 접수한다니까 - 2
Chapter 02. 내 조건은 까다로워
Chapter 03. 편 가르기
Chapter 04. 협상의 기술
Chapter 05. 용갑
Chapter 06. 서라벌의 달밤
Chapter 07. 사바세계
Chapter 08. 단숨에 오르다 - 1
도핑 히어로 09권
Chapter 01. 그 의뢰, 접수한다니까 - 2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도천 법사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이미 명분도 체면도 몽땅 잃어버린 상황. 그러나 김신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서슬 퍼런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날 것만 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저 교활한 놈이 쳐둔 덫에 걸렸어.’
이강호를 보며 도천 법사는 내심 혀를 찼다.
화랑 길드에서는 몇 달 전부터 이강호에 관한 모든 것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러나 정보가 모두 엉터리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이강호 파티원 전원이 예상했던 능력을 뛰어넘었다.
“신아, 일단 참아라.”
“죄송합니다. 이강호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길드로 끌고 가겠습니다.”
“지금 데려가는 게 문제가 아니다. 저놈 입에서 의뢰를 받아들인다는 말이 나온 이상, 공격했다간 우리 꼴만 우스워져.”
도천 법사는 밀려드는 한기에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도 김신을 말리기 바빴다.
만약 김신이 정상적인 상태였더라면 도천 법사가 추위를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즉, 이성을 잃고 있다는 증거.
이를 유도한 강호는 얄밉게도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 길 막고 서있을 생각이야? 먼 길 다녀오느라 피곤하니 비켜줬으면 하는데.”
“빠드득!”
김신은 이를 악물었다. 물러나자니 분통이 터져 죽겠고 공격하자니 길드장의 당부가 걸렸다.
만약 그의 성격이 냉철한 편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강호를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줄기 이성이 그를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의뢰를 받아들이겠다고?”
“그렇다니까. 왜? 못 믿겠어?”
“너 같으면 믿겠나?”
“어. 정 못 믿겠으면 자리 옮겨서 한 판 붙어서 끌고 가시던가. 이번엔 제대로 붙어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네가 조건을 붙일 처지나 될 거 같나?”
“곱상하게 생겨서 성격은 참 급해.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계속 떠들어봐라. 어차피 잠시 후면 입을 열 수 없게 될 테니.”
“싸우는 건 나도 상관은 없어. 대신 내가 이기면 의뢰 수락은 없었던 일이 되는 거야. 어때? 그 정도는 돼야 나도 싸울 마음이 생기지. 안 그래?”
내가 괜히 저 재수 없는 얼음덩이의 약을 바짝 올린 게 아니다. 솔직히 화랑이 어느 유적을 공략할지는 진작 짐작했다. 화랑은 신라와 관련된 유적에 환장한 길드다. 그리고 신라 유적의 대부분은 경주에 몰려 있다. 그러나 경주가 어느 곳이던가? 대한민국에서 서울과 함께 가장 위험한 지역이다.
당연히 지금 나라도 눈이 뒤집힐만한 등급의 유물이 잠자고 있지만, 화랑에서 얌전히 내게 넘길 리는 없지 않은가?
물론 조건만 맞으면 의뢰를 수락할 생각도 있다. 그러나 놈들의 하는 짓이 괘씸해서라도 그냥은 못 받아들이지.
“일대일인가?”
“큭큭큭! 너 양심은 어디다 팔아먹었냐? 잘나가는 권능자 씩이나 돼서 도핑 헌터와 결투를 하겠다? 너 같으면 받겠어?”
강호가 웃음을 터뜨리자, 김신의 잘 다듬어진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가 아무리 분노로 이성이 흐려졌다지만, 아야의 존재마저 까맣게 잊은 것은 아니다. 거기에 새로 등장한 놈의 파티원 또한 존재감이 강렬했다.
“그래서 새로운 인원까지 데려오느라 어제 꽁무니를 뺏나?”
“왜? 쫄려? 쫄리면 뒈지시던가.”
김신은 더는 참지 못하고 성큼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도천 법사가 황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자, 잠깐. 둘의 다툼을 왜 엄한 사람까지 끌고 들어가나? 신이 넌 열 좀 식히고 있어.”
얼음덩이한테 열을 식히라는 말이 웃겨 강호는 킬킬댔다. 그러자 김신이 울컥한 얼굴로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게 아닌가?
아니, 이번엔 진짜 웃겨서 웃은 건데? 여기서 혓바닥을 놀렸다간 진짜 죽자고 달려들겠지? 솔직히 나도 도핑 부작용으로 피곤해 죽을 지경이라 싸우고 싶진 않다. 반골 기질 때문에 저 잘난 자식을 약 올리는 것일 뿐. 안 그래도 대정과 치고박고 해야 하는데 화랑까지 적으로 돌렸다간 진짜 피곤해진다.
“험험, 이강호 씨. 우리 길드 의뢰를 받겠다는 말 사실인가?”
“어색하게 반 존대하려거든 그냥 말 편히 하시죠. 그리고 의뢰 접수한다는데 못 믿겠다고 자꾸 사람 귀찮게 구는 건 또 뭡니까? 나 원,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모르겠네.”
삐딱한 강호의 태도에 도천 법사는 속이 부글거렸지만, 겉으로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내게 타협안이 있네. 자네만이라도 우릴 따라오는 거지. 어떤가?”
“글쎄요……. 아직 강원도에 벌려놓은 일이 많아서요. 일단 그것들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크험험!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한…….”
“한 달?”
“한 일 년?”
“…….”
도천 법사의 얼굴이 구겨지자, 강호는 피식 웃으며 은근슬쩍 말을 바꿨다.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한 뒤 함께 화랑 길드에 들리는 건 어떻습니까? 한 달 정도면 대충 정리한 뒤 얼른 다녀오면 될 것 같은데.”
“다시 이곳에 온다고?”
“어차피 화랑 길드도 곧장 움직이진 않을 거 아닙니까? 이것저것 준비도 해야 할 테니.”
도천 법사는 입을 오물거리다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그럼 길드에 연락을 넣어보겠네. 대신 약속은 꼭 지켜야 할 게야.”
“제가 원래 약속은 칼 같이 지키는 편이라.”
김신은 느물거리는 강호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도천 법사의 단호한 눈빛에 몸을 휙! 돌려 사라졌다.
* * *
그날 밤.
오랜만에 파티원 전원이 모였다. 다들 할 말이 많았지만, 강호가 입을 열지 않아 입만 달싹이는 중이었다.
“다들 고생 많았다.”
“헐! 웬일이래?”
강호가 공치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보니, 다들 살짝 놀란 눈빛으로 보았다.
“대정 쪽 일은 내 개인적인 문제였으니까. 이번 일은 내가 신세 진 거로 하지. 소정방,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됐어?”
“어, 아직도 어지러워. 몸에 힘도 하나도 없고.”
강호는 아야를 보았다.
“생체 데이터는 많이 안정된 상태여요. 다만 치유사에게 제대로 치료받는 게 좋을 것 같사옵니다.”
“여기 일 대충 정리 끝나면 소정방은 치유사를 한 번 찾아가 봐.”
“응.”
소정방은 저승 문턱까지 다녀오더니 저번보다 더 음식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도 대화보다는 먹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강호가 잠시 생각에 잠기자, 동일이 확장팩을 뒤적였다.
“이거 대정 놈들이 가지고 있던 건데, 한 번 봐.”
“그건 외장 하드가 아니냐?”
아야가 손을 뻗어 장치를 조작했다. 그러자 허공에 홀로그램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영상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강호 도령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나 봅니다. 이런 조잡한 영상으로는 개도 안 믿을 것을.”
영상에는 괴물 몰이를 하는 강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다만 편집이 조잡해 아야는 영상이 조작된 것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소스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어차피 회사에 넘긴 뒤 내 목줄 채울 용도로 대충이나마 준비했겠지.”
강호의 말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럼 어쩌려고? 확 언론에 제보할까?”
“형 또 그 핑계로 그 기자 누나 만나려고?”
“이씨, 내가 이런 상황에도 그런 생각이나 하는 놈으로 보여? 돌쇠 이 자식, 아프다는 거 다 뻥이지?”
“나 살 빠진 거 안 보여? 형은 맨날 나한테만 큰소리더라. 그리고 돌쇠라고 부르지 마. 나 이제 쇠 얼간이 안 할래. 죽기 싫어.”
“살 빠지긴. 거의 다 복구한 거 같구만. 그리고 나도 처음부터 쇠 얼간이 하기 싫었거든!”
둘이 티격태격하자, 다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야 원래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둘 다 시끄러워. 일단 언론 제보는 없다.”
“왜? 우리가 먼저 터뜨려야 하는 거 아냐?”
“왜? 그 기자 못 만나서 아쉬워?”
“야! 너까지 진짜 이러기임? 내가 너 없는 동안 껄떡쇠 때문에 얼마나 개고생했는데!”
그놈의 껄떡쇠 때문에 개고생한 건 나도 마찬가지. 그러나 분신체 탓을 해봤자, 내 얼굴에 침 뱉기다.
강호는 쓰게 웃으며 평소보다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언론은 이미 대정의 통제 아래 있어. 아무리 내가 억울하다고 증거를 내밀어도 기사 한 줄 안 나갈 거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언론이 순수하게 약자의 편에 선 적이 없다고 믿는 강호다. 전생에 언론에 묘사된 이강호는 그야말로 악마 중의 악마, 최악의 테러범, 인류의 흑역사, 재앙급 인류의 적이었다.
“그럼 이대로 손 놓고 있자고?”
“아니. 기왕 멍석 깔아줬으니, 제대로 놀아줘야지.”
“알아듣게 말해.”
“이미 증인은 충분해. 다만 다들 쉬쉬할 거다.”
“하긴. 대정이 인체 실험한다는 소문은 죄다 알고 있더라. 다만 괜히 떠들다가 실험체로 끌려갈까 봐 말을 아끼더라고.”
원래부터 헌터들 사이에서 대정의 평판은 나빴다. 툭 하면 약으로 갑질을 해대니, 좋을 리가 없다.
“일단 양동이 네가 소문을 퍼트려. 보고 들은 게 있으니 쉽게 믿을 거다.”
“그거야 이미 작업 끝났는데?”
“실체를 확인하게끔 하란 말이야.”
강호는 스마트 워치로 다른 영상을 재생시켰다. 그걸 본 동일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쏟아졌다.
“이런 개새끼들! 사람을 상대로 저게 할 짓이야?”
동일만 분노한 게 아니다. 은설을 제외한 다른 파티원들의 얼굴엔 성난 기색이 역력했다.
“영상 쏠 테니, 이걸 다른 헌터들에게 퍼트려. 영상 공유해줘도 된다. 물론 받겠다는 인간은 없을 테지만.”
강호는 입이 썼다.
헌터들의 도움 따윈 애초에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행보를 이해해주리라 여긴 적도 없었다.
그가 원한 것은 오직 단 하나.
재앙 ‘마마’와 싸울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는 것.
그러나 이번에도 쉽지 않은 일이 될 것만 같았다.
“일단 소문만 퍼트리면 된다 이거지? 혹시 모르니 언론에도 제보하는 건…….”
“그러다 그 여자 뒷골목 시체로 발견되는 수가 있다. 소문 퍼트리는 것도 여론을 조성하려는 게 아니야. 헌터들이 대정을 경계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싸늘한 강호의 경고에 동일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아야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어찌할 생각이옵니까? 육군도 쉬쉬할 테고 소녀가 보기엔 가디언 협회도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을 것 같사옵니다.”
“그러겠지.”
“그럼 이번엔 그냥 조용히 묻고 넘길 생각이어요?”
“내가 묻고 싶어 하면 꼭 들추려고 하더라고.”
강호는 소리 없이 웃었다.
전생엔 계속된 대정의 개수작에 열이 오를 대로 올라 대도시에 있는 대정 빌딩들까지 부수러 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