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핑 히어로 08권
도핑 히어로 08권
도핑 히어로
08
소락
도핑 히어로 08권
차례
Chapter 01. 신선놀음 - 2
Chapter 02. 울고 싶다니 뺨 때려줘야지
Chapter 03. 너희가 괴물을 불렀다
Chapter 04. 오른뺨을 때렸으면 왼뺨도 때려야지
Chapter 05. 대정이 잘못했네
Chapter 06. 주인이 책임져야지
Chapter 07. 그 의뢰, 접수한다니까 - 1
도핑 히어로 08권
Chapter 01. 신선놀음 - 2
오대산 무릉계곡을 가는 길은 딴 세상에 온 것처럼 평화롭고 고즈넉했다.
우뚝 솟은 기암 괴벽에 단단히 뿌리 내린 금강송이 기이하게 구부러져 계곡 아래를 굽어살피는 모습은 무릉계곡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여기가 그 무릉도원이란 말이지? 그럼 선녀님도 있으려나?”
동일이 흑심을 드러내자, 전복치는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흐흐, 너도 형 나이 돼봐. 사나이의 본능이야, 본능!”
“그 수컷 본능이 죽기 직전에도 남아있길 빌게요.”
“어허!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런 험한 말 하는 거 아니다.”
아야가 없으니 혓바닥에 모터를 단 동일을 제지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강호가 나서면 조용해지겠지만, 불가살 사냥 이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다들 조용. 유적 들어가기 전에 하나 확인할 게 있다. 모여봐.”
간만에 강호가 지시를 내리자, 다들 눈빛이 변해 모였다.
“뭘 확인하는데? 설마 또 그 쓴 약 먹으라는 건 아니지?”
동일이 지레 겁을 먹자, 강호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저 자식은 몸에 좋은 걸 먹여줘도 저러네. 그냥 확! 죄다 토해내게 해?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면 입에 사약을 붓는 수가 있다.”
동일은 얼른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그 모습에 다들 피식거리며 강호의 말을 기다렸다.
“불가살과 싸울 때 은설의 권능 말인데……. 다들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은설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나지도 않는 냄새를 신경 쓰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악취가 났다는 게 아니야. 오히려 못 맡아본 향이라 묻는 거야.”
“난 냄새가 났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당장 죽게 생겼는데 그걸 누가 신경 써?”
동일의 말에 소정방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사정을 잘 모르는 전복치만 어리둥절해 사람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동일이 대충 설명을 해주었다.
“그 죽을 뻔한 악취가 은설 누나한테 나는 거라고요? 지금은 하나도 안 나는데요?”
“근데 냄새가 안 나면 좋은 거 아닌가?”
“좋고 나쁜 문제가 아니야. 은설의 권능은 일정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우리도 그 영향권 아래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
은설의 몸에서 나는 향은 환각을 경험하게 한다. 그랬기에 좀처럼 공격을 적중시킬 수 없었던 흑도사의 본체를 공략할 수 있었다.
강호는 그것 말고도 다른 가정을 했다.
다만 검은 대지가 만들어낸 환상 세계 속이었기에 그조차 긴가민가했다. 그래서 파티원들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어떤 영향을 받진 않은 것 같은데요.”
전복치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강호는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아야가 없는 게 아쉽군. 일단 나중으로 미뤄야겠어.
늑돌이에게 물어보았지만, 녀석도 정확한 답을 주진 않았다. 오히려 추상적인 말을 지껄이는 통에 머리만 복잡해졌다.
아야가 있었더라면 쉽게 확인했을 문제다.
늘 파티원들의 생체데이터를 수집했으니, 그걸 분석하면 됐을 테니까.
“알았다. 그럼 일단 유적 공략에 집중하고 추후에 다시 알아보는 거로 하자. 전복치, 설명해.”
“제, 제가요?”
“너 때문에 우리가 왔잖아. 당연히 이곳 정보도 너에게만 있고.”
“예에.”
전복치는 사람들 앞에서 주도적으로 나선다는 게 영 어색해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강호 말대로 이곳 정보를 하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여긴 신선놀음이라는 유적이에요.”
“또 신선이야?”
동일의 말에 전복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선을 본 적 있어요.”
“어. 그때 죽을 뻔했어.”
“와! 신선한테 엄청 밉보였나 보네요.”
동일 때문에 브리핑이 삼천포로 새자, 강호는 그만 참지 못하고 주먹부터 나갔다.
빠악!
“으악! 이씨, 왜 때려!”
“내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하하, 쏘리 쏘리. 지금부터 입도 뻥긋 안 할게.”
동일을 얌전하게 만든 강호는 전복치에게 물었다.
“유적 이름은 누가 정했는데?”
“제가 정했는데요?”
“…….”
다들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보자, 전복치는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해명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정한 건 아니에요. 진짠데…….”
“진짜고 가짜고 간에 잘 들리게 말해. 유적 공략하자는 놈이 제일 자신감이 없으면 누가 같이 들어가고 싶어 해?”
강호의 차가운 말에 전복치는 당황해 사람들을 보았다.
“너는 왜 애를 윽박질러서 기를 죽이고 그래? 싸늘한 눈빛 한 방이면 나오던 말도 쏙 들어가겠다. 우리 도사님, 같이 들어갈 테니 몸에 좋은 약이나 팍팍 지원해 줘.”
찡긋!
동일이 윙크를 보내자, 전복치는 어색하게 웃으며 브리핑을 이어갔다.
“헌터 조합 하나가 이곳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알려진 유적이에요. 근데 놀랍게도 나올 땐 죽은 사람은 없었는데, 죄다 나이가 제각각이 됐어요.”
“좀 더 정확히.”
“예? 그러니까 갑자기 팍 늙은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고 그랬대요.”
“그래서 신선놀음이라고 지은 거냐?”
“예.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건 신선놀음을 지켜본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았지. 나무꾼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이야기니, 네 설명과는 차이가 있다.”
“그건 그렇죠. 하지만 시간과 관련이 있는 유적인 건 분명해요. 신선을 봤다는 증언도 있었고요.”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기도 했지만, 설화이기도 했다.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갔다가 두 백발노인이 바둑을 두는 것을 구경하게 된다. 그러다 돌아가려고 곁에 세워둔 도끼를 집으려 했는데, 도낏자루가 썩어 바스러져 집을 수 없었다.
기이하게 여기며 마을로 돌아오니, 나무꾼이 알던 이들은 모두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다.
신선사상에 바탕을 둔 이야기라 도사인 전우치가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바둑판을 얻어 쓸 데가 있기도 했고.
다만 자세한 위치를 알지 못해 여태 헤매다 보니, 자연스레 강호 일행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설마 아무도 안 들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혼자 들어가긴 무서운데…….’
처음 나섰을 때의 자신감은 불가살과 흑도사에게 말끔히 먹힌 지 오래다.
유적 안에서 폭삭 늙을 수 있다는데 누가 들어가려 하겠는가?
실제로 이곳 유적에는 헌터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
“저기,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그냥…….”
전복치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강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여기 소풍 왔어?”
“예?”
“너 때문에 다들 몸도 성치 않은데, 온 산을 헤집고 다녔다. 그런데 위험할 거 같으니 철수하자고?”
‘철수하자는 소린 안 했는데요오오. 나 혼자 들어가겠다고 말하려 한 건데…….’
전복치는 기가 죽어 속으로만 변명했다.
“안 위험한 유적이 있긴 해? 안전한 곳만 골라 다니려면 관짝에 들어가. 그곳이 제일 안전한 곳이니까.”
죽고 나면 괴물에게 죽을 일도 없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강호의 말에 전복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빚은 꼭 갚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서 공략법은?”
“그게 딱히 없어서요…….”
강호의 관자놀이 부근에 핏대가 섰다.
서릿발같이 차가운 기세가 풀풀 날리자, 전복치는 울상이 되어 소맷자락 안에서 부적 꾸러미를 꺼냈다.
“어떤 헌터가 신선 둘이서 바둑을 두는 걸 목격했다고 했거든요. 아마 그 바둑판이 유적 내에 흐르는 시간과 관련 있을 거예요.”
“그럼 부적으로 시간의 침범을 막을 순 있나?”
“그건 아닌데요오.”
도대체 왜 내 주변엔 죄다 비정상적인 놈만 모이는 건지. 차라리 2대 흑도사로 만들어 데리고 다녔어야 했나?
그랬더라면 적어도 속은 시원했을 거다.
강호는 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짝 털어 잡념을 날렸다. 후회할 바에 차라리 참교육으로 정신머리를 고쳐주는 게 그의 방식이다.
“지금부터 잡설은 치우고 육하원칙에 맞춰서 공략 방안을 말해. 그 부적들은 뭐야?”
“이게 서로 떨어져 있어도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주는 전음부예요.”
“안에서 무전이 안 터지나?”
“예. 서로의 시간대가 틀려지거든요. 갑자기 동료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뒤죽박죽이 된다고 했어요. 이 전음부에 특수한 술법을 걸면 시간대가 달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예요.”
각자도생으로 유적을 공략해야 한다니 엎친 데 덮친 격이군.
강호의 입가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 * *
아야는 공방에 처박혀 있느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몰랐다.
그리고 작업에 어느 정도 진척이 있자, 오랜만에 햇볕이라도 쬘까 싶어 마당으로 나왔다.
볕이 제법 따가워 얼굴을 찡그린 아야는 덩그러니 빈 마당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있을 땐 몰랐는데, 허전하네.”
늘 혼자였던 그녀다. 그러나 이젠 혼자인 게 되려 어색하자 쓰게 웃었다.
“에잇! 이게 다 촐랑대는 마당쇠 때문이야. 백색소음이 없으니, 그런 게 분명해.”
괜히 동일을 탓하던 아야는 볕을 피해 처마 아래 그늘로 갔다.
“그나저나 쥐돌이 이 녀석은 어찌 된 일이지?”
그녀가 작업실에 처박혀 있었다고 해서 쥐돌이에게 아예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드론을 이용해 세종시 곳곳을 수색했다.
사람이 모이는 술집이나 식당에 도청장치까지 뿌렸는데도 쥐돌이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쥐돌이 이 괘씸한 녀석! 돌아오기만 하면 전부 갚아내게 해야겠어.”
쥐돌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신하는 그녀였다. 딱히 마녀의 감 때문이 아닌, 강호의 귀띔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잡혀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건데. 수색 범위를 넓히긴 위험하고 어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