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핑 히어로 06권
도핑 히어로 06권
도핑 히어로
06
소락
도핑 히어로 06권
차례
Chapter 01. 동상이몽 - 2
Chapter 02. 천강홍의장군
Chapter 03. 손해배상 해야지
Chapter 04. 각자의 사정
Chapter 05. 비격진천뢰
Chapter 06. 어둠의 약사
Chapter 07. 천살갑 - 1
도핑 히어로 06권
Chapter 01. 동상이몽 - 2
주변에 녹두병이 있는데도 회색 머리칼의 사내는 당당히 서 있었다. 그러나 강호는 놀라지 않았다. 보자마자 상대의 정체를 알았으니까.
동정 대마법사가 왜 여길? 설마 내가 모르는 내막이 있었던 건가? 쯧! 귀찮게 됐군.
상대 진명(眞名)은 거창하게도 멀린이다, 멀린. 그렇다고 진짜 전설적인 마법사 멀린의 환생은 아니다. 저 혼자 후계자라 주장하는 얼빠진 놈일 뿐.
그러고 보니 영국에 비슷한 놈들끼리 소꿉장난을 하기 시작한 게 이맘때던가? 그렇다는 건?
강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국에도 가디언 길드가 많이 있다. 그중 미래에서 가장 큰 명성을 떨치는 길드 중 하나가 저 동정 대마법사가 속한 ‘원탁의 기사들’.
멀린 혼자 왔다고 단정 짓기엔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다. 보통 마법사는 홀로 다니는 일이 드무니까. 호위 기사 하나라도 붙어있다면 골치 아파진다.
이막례는 생각에 잠겨있는 강호를 힐끔 본 뒤 입을 열었다.
“마법사?”
“아름다운 레이디, 전 제임스 돌턴이라고 합니다.”
모자를 벗는 시늉을 하며 인사하는 사내의 모습에 이막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요새 대한민국에 입국하려면 한국어가 필수 항목인가? 아야도 그렇고 이 재수 없는 놈도 그렇고 한국말을 잘도 하는군. 이강호는 분명 이놈을 아는 눈치야…….’
“돌턴이고 돌탱이고 관심 없다. 왜 접근했지?”
“이런! 놀라셨나 보군요. 지켜보니 목적지가 같은 것 같아서 동행을 청할까 했습니다.”
“안 내키니 꺼져.”
단칼에 거절하자, 돌턴은 부드럽게 웃으며 양손을 들었다.
“단둘이서 저곳을 뚫을 자신이 있나요? 알겠습니다.”
상대가 순순히 물러서는데도 이막례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녀의 야성적인 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는 위험하다고.
“같이 가죠.”
지금껏 입 다물고 있던 강호가 반대 의견을 내자, 이막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못마땅했지만 그녀는 오함마를 어깨에 걸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하,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제임스 돌턴은 웃으면서도 눈은 날카롭게 강호를 살피고 있었다.
* * *
이막례는 앞장서서 걸어가는 돌턴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사방에 녹두병이 즐비한데, 그들은 투명인간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법사가 편리하긴 하군. 하나 들이면 편하겠어.”
마법사를 무슨 보일러 취급하는 그녀의 모습에 강호는 피식 웃었다.
“마법사 처음 봅니까?”
“처음은 아닌데, 저 정도는 처음. 우리나라는 실력 있는 마법사가 귀하잖아?”
“군대에 인재가 귀한 거겠죠.”
군대에서 권능자를 아무리 우대한다고 해도 다른 단체에 비해 처질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의무복무가 끝나면 대부분 군대를 떠난다.
이막례는 씁쓸하게 웃으며 투덜댔다.
“쯧! 꼭 그렇게 아픈 곳을 찔러야 속이 시원해?”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입대 어때?”
이미 재입대해서 군 복무를 두 번이나 한 사람한테 거 너무하는 거 아니오? 이 정도면 애국자라고 훈장이라도 줘야 할 판이다. 그런데 나보고 뭐가 어쩌고 저째? 받으면 갚아줘야지 도리지.
“그러지 마시고 이참에 이쪽으로 넘어오시죠. 대우는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이거 훅 땡기는걸? 일단 임무부터 해결하고 차차 이야기해 보자고.”
시원한 미소를 보이며 이막례는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나저나 믿을만한 놈인가?”
“당분간은?”
“하는 짓이 바람둥이 같아서 그냥 콱!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단 말이야.”
나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해야 했다. 동정 마법사보고 바람둥이라니 안 웃을 수가 있나.
제임스 돌턴이 동정 마법사라 놀림 받는 건 여자를 멀리해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놈은 게이가 아니다. 오히려 여자를 아주 좋아하는 축에 들었다. 다만 잠자리만은 철저히 피했는데, 그건 돌턴이 자신을 멀린의 환생이라 믿는 탓이었다.
영국의 전설적인 대마법사 멀린의 최후는 사랑하는 여인과 관련 있다. 그래서 돌턴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정 대마법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거다.
내 입장에선 그야말로 병신같은 짓거리였지만, 뭐 어쩌겠어. 본인이 그렇게 믿고 싶다는데. 그나저나 양동일도 그럼??
“왜 혼자 실실 쪼개? 재미있는 거 있음 같이 알자.”
“소령님이 저 바람둥이 대갈통을 뭉개버릴 걸 상상한 것뿐입니다.”
“흥!”
이막례는 콧방귀를 뀌다 정색하며 수신호를 보냈다.
― 떼어놓을 방법은?
강호는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보낸 뒤 또 다른 수신호를 보냈다. 앞장서서 걷는 돌턴은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손에 들린 마법 거울로 지켜보고 있었다.
“후후, 너무 대놓고 일을 꾸미는 거 아닙니까? 아쉬운 건 이쪽이니 당분간 눈 감아드리지요.”
* * *
퍼시발은 언덕을 단숨에 내려가 홍의고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파를 감행했다.
창을 들지 않은 손을 높이 들자, 주변 공간이 흐릿해지며 나무창 하나가 생성됐다.
“받아라!”
콰콰콰콰쾅!
나무창이 녹두병을 꿰뚫고 폭발하자 앞이 뻥 뚫렸다.
“으하하하하! 진작 이렇게 할걸 그랬군.”
퍼시발은 호탕하게 웃으며 홍의고를 향해 무인지경으로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홍의고가 매달려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에 도달했다.
“이렇게 쉬운 걸 다들 쥐새끼처럼 겁먹은 꼴이라니.”
그는 비웃음을 머금고 확장팩에서 옷을 꺼내 쭉쭉 찢었다. 그리고 찢어진 천으로 홍의고를 둘둘 감싸 등에 멘 뒤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자 그럼 숨어있는 쥐새끼들이 죄다 튀어나오도록 땀 좀 빼야겠군.”
등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진군가 삼아 퍼시발은 위풍당당하게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녹두병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은신 마법을 유지하며 유유자적 걷던 제임스 돌턴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은신 마법이 통하지 않더군요.”
“않더군요? 이미 와봤던 사람처럼 말하네?”
이막례가 말꼬리를 잡자 돌턴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 같진 않군요, 레이디. 북소리가 변했습니다. 그렇다는 건 우리가 서둘러야 한다는 뜻이죠.”
“우리가 아니라 너겠지.”
“후후, 거짓말에 서투시군요. 아! 오해하실까 봐 말하는 건데, 전 솔직한 여성이 더 좋습니다. 물론 거짓말하는 여성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지만요.”
“매일 아침 버터로 혓바닥을 문지르나? 말끝마다 느끼해 죽겠네.”
이막례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강호를 보았다.
“어떻게? 이대로 돌파할까?”
“그러죠.”
강호가 고개를 끄덕인 뒤 가만히 서 있자, 이막례는 앞장서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강호는 제임스 돌턴이 했던 모자를 벗으며 하는 인사를 따라 하며 말했다.
“레이디 퍼스트.”
순간 이막례는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오함마를 꼬나쥔 채 거친 걸음으로 강호를 지나쳤다.
“하! 이놈이나 저놈이나. 한 번만 레이디 어쩌고 하면 혓바닥을 뽑아버릴 테다.”
그녀가 으르렁대며 앞장서자, 강호는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도핑을 시작했다.
* * *
홍의고를 등에 둘러멘 퍼시발은 들판을 바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앞을 가로막는 녹두병을 찌르기 한 방으로 지워버린 뒤 고개를 슬쩍 돌린 뒤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쥐새끼들답게 뒤에서 알짱거리는구나.”
숨어서 은밀히 이동하던 무리가 이젠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쫓긴다는 초조감에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퍼시발은 오히려 몸을 돌려 추격자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뭐지? 갑자기 미친 건가?”
“혼자서 홍의고를 노린 것부터 정상은 아니지.”
뒤따르던 무리에서 잠시 소요가 일었다.
“덮칠까요?”
“토끼가 알아서 품 안으로 뛰어드는데, 잡아줘야지.”
밀양 제일 길드라고 자부하는 ‘해무’ 길드장 국일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주변에 날카로운 기세가 퍼져나갔다.
“쥐새끼들!!”
어느새 코앞까지 들이닥친 퍼시발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나무창을 던졌다.
“막아!”
국일관의 명령에 방패를 든 탱커진이 나섰다.
쾅!!
폭음과 함께 방패가 깨지고 탱커들이 피를 토하며 하늘을 날았다.
“마, 말도 안 돼.”
“크하하하하!”
퍼시발은 신이 나서 해무 길드를 헤집었다. 길드원 전원이 권능자였지만, 퍼시발의 발을 묶기엔 역부족.
“저 새끼 도대체 정체가 뭐야?”
저 멀리 사라지는 퍼시발의 뒷모습을 보며 국일관은 이를 갈았다.
“혹시 다른 대형 길드 소속 아닐까요?”
“아니. 대형 길드 실력자라면 진작 지원이 왔겠지. 일단 추적한다. 우리가 방심해서 뚫렸지, 안 그랬다면 충분히 잡았어. 뭐해? 빨리 안 움직여?!”
“예? 예에.”
‘뒤에서 고함만 친 주제에 뭘 방심해서 놓쳤다는 거야?’
길드원들은 속으로 불만을 품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홍의고를 포기할 수도 없었기에 황급히 추격에 들어갔다.
다른 팀들은 퍼시발의 위력 시위에 훨씬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러나 퍼시발이 달려드는데 피할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이쯤 했으면 되겠지? 이제 쥐새끼들끼리 물어뜯을 시간이다.”
퍼시발은 주변에 모여든 인간들을 보며 비웃었다. 그리고 창을 땅에 꽂아 고정한 뒤 등에 멘 홍의고를 풀었다.
“자 받아라!”
그는 가장 인원이 많은 무리를 향해 홍의고를 힘껏 던졌다.
“홍의고다!!”
홍의고가 허공에 치솟자, 사람들의 눈이 탐욕으로 뒤집혔다.
* * *
이막례가 길을 뚫고 있을 때 강호는 손보다 입이 더 바빴다.
“오우~, 레이디의 용맹이 눈부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