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핑 히어로 03권
도핑 히어로 03권
도핑 히어로
03
소락
도핑 히어로 03권
차례
Chapter 01. 넌 날 감당할 수 없다
Chapter 02. 불공정 계약
Chapter 03. 첫 의뢰
Chapter 04. 화려한 데뷔
Chapter 05. 이름 없는 무덤도 주인은 있다
Chapter 06. 십 대 악인
Chapter 07. 탐관오리 - 1
도핑 히어로 03권
Chapter 01. 넌 날 감당할 수 없다
강호는 홀린 듯 돌탑 위에 박혀있는 마석을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상급 마석을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최상급 마석도 본 적이 있다. 다만 최상급 마석은 강호도 소유한 적은 없다.
그렇다고 상급 마석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급 마석만 해도 자체적으로 기운을 회복하는 능력이 있다. 쉽게 말해 충전 가능하다는 말이다.
용도는 무궁무진하다. 마법, 술법, 무공, 마도 공학 온갖 분야에 요긴하게 쓰인다.
그렇기에 귀물(貴物)이라 불리며 발견되면 서로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는 것이다.
“보물에는 임자가 있는 법이지.”
대귀 목에 걸려있던 마석에 대한 욕심을 떨쳐낸 것도 원래 목적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호에겐 대귀의 목에 걸려있던 마석은 계륵이다.
손에 넣는 순간 공공의 적이 될 테니까. 못 먹는 떡은 빠르게 단념하는 게 낫다. 애태워봤자 구질구질해지기만 할 테니까.
강호는 씩 웃으며 돌탑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상급 마석을 움켜쥐었다. 힘을 주자 돌탑이 흔들거리다 와르르 무너지며, 마침내 상급 마석이 오롯이 강호의 것이 되었다.
조심스레 확장팩 깊숙한 곳에 고이 모셔둔 뒤 무너진 돌탑 잔해마저 싹 쓸어담았다.
놀랍게도 돌탑을 이루고 있던 것들조차 죄다 마석이었다. 최하급과 하급 마석이 대부분이지만, 종종 중급 마석도 손에 잡혀 강호를 즐겁게 했다.
상급 마석이야 부르는 게 값이다. 나머지 마석만 처분해도 족히 수십억은 나올 것이다.
팔자 고칠 정도의 어마어마한 수확이다. 그러나 강호에게는 약간의 흥분, 그게 전부였다.
백억이면 평범한 사람이 삼 대는 놀고먹을 거액이지만, 국보급 유물 하나 살 수 없는 푼돈이기도 했으니까.
오히려 당분간 돈 걱정 없이 본격적으로 유적 공략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운 강호다.
“이번 유적에서 수확이 적지 않아.”
단순히 마석만 챙긴 게 아니다. 마수 두더지 부산물, 그리고 무엇보다 대귀의 마력 세포를 채취했다는 게 두드러진 수확이다.
“이제 짐만 챙기면 끝인가?”
유경과 진숙에게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했지만, 힌트는 넘치게 줬다. 그곳에 가만히만 있었다면 큰 위험은 없었을 거다. 혹여 지반 붕괴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빠르게 물러서기만 했으면 추락을 피했을 터.
그냥 버리고 떠날까도 생각해봤지만, 아까 귀찮게 굴던 그 곰탱이의 눈빛이 거슬렸다.
곰탱이가 하는 짓을 보니, 청월 길드 간부급이란 말이지. 8급 헌터가 혼자 복귀하면 분명 의심할 게 뻔해. 남의 집 안방에서 굳이 충돌할 필요는 없겠지.
빠르게 결단을 내린 강호는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소귀들이 모아둔 인간들의 장비마저 싹 쓸어담은 뒤에야 비로소 공터를 떠났다.
* * *
강호는 곧장 땅굴 출구를 찾지 않고 오히려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리고 미끄럼틀 타듯 추락한 곳에 도착해 구멍을 슬쩍 살핀 뒤 확장팩을 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피켈.
피켈은 등반용 얼음도끼를 가리키는 독일어다. 빙벽 등반에나 쓰는 장비지만, 이럴 때 제법 유용한 장비다.
유적 공략에 온갖 장비를 챙겨두는 습관이 이럴 때 빛을 발했다.
물론 도핑을 사용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지만, 헌터에게 불필요한 도핑은 죄악이다.
구멍을 타고 올라가자 벽 부근 바닥을 제외하곤 완전히 지반이 무너져 있었다. 지반만이 아니다. 위쪽에도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다.
“휘유~, 완전히 주저앉혔네.”
강호는 휘파람을 불며 구멍의 깊이를 가늠해보려 했다. 무저갱처럼 완전한 암흑이라 강호의 눈에도 밑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 구멍으로 던졌다. 한참 뒤에야 아주 미약한 소음이 들린 것을 확인한 강호는 혀를 찼다.
모르긴 몰라도 몰려들었던 괴물들은 죄다 매몰됐을 거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인간들도 예외는 아닐 터.
그러나 강호는 허무하게 죽어버린 이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생명이 소중했다면 애초에 이곳에 발을 디뎌서는 안 됐으니까.
이래서야 밑에 내려가는 건 포기해야겠군. 괜히 내려가다 유적 변형이라도 시작되면 죽도 밥도 안 될 테니.
이래서 유적이 무섭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있는 땅굴 아래 이런 뻥 뚫린 구멍이 도사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유적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한 번씩 변화가 발생한다. 그랬기에 늘 조심스럽게 판단하고 움직이는 게 필수다.
강호는 피켈 두 자루에만 의지해 벽을 타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그리고 유경과 진숙과 헤어진 통로에 도달했다.
“얼마나 갔으려나?”
살아남았다면 지금쯤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을 확률이 높다. 둘을 찾아 헤맬 생각을 하자, 살짝 짜증이 올라왔다.
확 버리고 가?
복면을 착용한 데다, 목소리까지 변조했으니 외모로는 꼬투리를 잡을 수는 없을 거다. 그러나 헌터 혼자 이 난리통을 무사하게 빠져나왔다? 그것도 고작 8급 헌터가?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말하긴 애매한 상황이다. 물론 공동에 없었다는 말은 믿을지 몰라도 뭔가 감추고 있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쯧! 어쩔 수 없군. 오랜만에 착한 일 한다 생각해야지.”
* * *
강호는 생각보다 일찍 유경과 진숙을 만날 수 있었다. 바짝 긴장했던 그녀들은 어슴푸레한 형체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강호 씨!”
“거 봐! 내가 살아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녀들은 강호 곁으로 후다닥 달려와 소맷자락을 붙들고 이리저리 몸 상태를 살폈다.
“이것 좀 놓지?”
“아! 죄송해요. 워낙 위험했던 순간이라 어디 다치시진 않았나 걱정했거든요. 헤헤.”
유경이 해맑게 웃자, 진숙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이 걱정했다는 것에 감동하기는커녕 강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지?”
“강호 씨가 돌아올 것 같았거든요.”
“내가? 고작 그런 말도 안 되는 추측 때문에 기다렸다고?”
“오셨잖아요.”
강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경을 보았다. 혹시 이 여자 어깨 뒤에 사신(死神)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나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이런 정신머리로는 언제 죽어 나자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넌 고작 운에 네 목숨을 맡기나?”
“운에 맡긴 건 아니에요.”
진숙이 끼어들었다. 강호의 서늘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그녀는 떠듬떠듬 항변했다.
“살아남고 싶으면 그대로 있으라고 하셨잖아요. 솔직히 우리 둘만으로 출구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어요. 강호 씨도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닌가요?”
“……부정은 못 하겠군.”
강호가 순순히 인정하자, 그제야 진숙은 옅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도 무작정 이곳에 있으려는 건 아니었어요. 가지고 있는 식량이 간당간당하니, 삼 일 정도 기다렸다 움직이려 했죠.”
아예 대책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아니군. 뭐 귀찮음을 덜었으니 대충 넘어가 줄까?
강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두 여자는 마주 보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강호는 유경과 진숙을 데리고 곧장 움직였다. 다만 공동 쪽으로는 향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장비로 무너진 공동 벽을 타고 출구로 가는 통로 쪽으로 충분히 이동 가능하다.
그러나 곧장 빠져나갔다간 청월 길드의 빡빡한 검문을 받을 게 뻔했다.
적당히 시간을 끌다 저들이 지쳤을 무렵 나가는 게 상책. 게다가 다른 노림수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경의 존재다. 길드에서 끼고 돌 정도면 분명 사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사람을 보낼 것이다.
강호의 계산속 덕분에 두 여자의 고생길만 활짝 열렸다.
이동하는 중간중간 마수 두더지와 소귀 따위를 잡으며 진숙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수년간 노력해 겨우 은장도 두 자루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었다. 지금은 땅굴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돼서 세 자루를 조종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호 눈에는 여전히 하품이 나올 정도로 못 봐줄 수준이다.
“왜 은장도를 세 자루만 사용하지?”
“예? 그거야 그 이상은 제 능력 밖이니까요. 쓸데없이 욕심부리기보다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최선 아닌가요?”
“최선이 아니라 나태겠지.”
진숙은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칭찬은 아니라도 고생했다는 말은 듣고 싶었다. 실제로 그녀의 꼴은 족히 한 달은 굶은 비렁뱅이보다 더 꼬질꼬질했다. 온몸은 멍투성이. 그나마 유경의 치유가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멀쩡히 걸어 다니지도 못했다.
그 모습을 본 강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는 손가락 사이에 단검 두 자루를 끼는가 싶더니 확 뿌렸다.
쉬―익!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진숙은 얼어붙어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의 양쪽 귀밑머리 몇 가닥이 나풀거리며 땅에 떨어졌다.
“은장도를 조종하는 동안 네 양손은 놀고 있더군. 설마 손을 움직이면 집중력이 흐트러진다고 변명할 생각은 아니길 바라. 고작 그 정도에 집중력이 흐트러질 정도면 그냥 집밖에 나돌아다니지 않는 게 오래 사는 길이니까.”
진숙은 멍하니 강호의 입만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벽에 단검이 파고들어 손잡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에 아주 작은 열기가 피어올랐다.
강호는 출구를 찾아 빙빙 돌아야 했다. 때론 아래로 때론 위로 때론 옆으로. 유적에선 나침반이 통하지 않는다. 온전히 본인의 방향 감각에 의존해야 하기에 길을 잃기 십상. 그러나 강호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진숙과 유경을 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들이야 강호가 특별히(?) 지도해준다고 여겼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저 심심하기도 했고, 강호 나름의 연습이기도 했다.
땅굴을 빠져나가면 양동일과 쥐돌이를 데리고 다른 유적을 공략해야 했으니까.
체력이 완전히 고갈된 유경은 입을 열지 않은 지 오래. 그나마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진숙은 의아했다.
“출구로 가려면 올라가야 하지 않나요?”
“맞아.”
“그런데 왜 계속 내려온 느낌이…….”
“그 느낌이 맞을걸?”
뻔뻔한 강호의 대꾸에 진숙은 저도 모르게 욕할 뻔했다. 그녀의 울컥한 표정을 본 강호는 피식거렸다.
“설마 내가 고생 좀 해보라고 엉뚱하게 돌아다녔을까? 그나마 편한 길로 돌아간 것뿐이야.”
강호의 말은 사실이었다.
공동이 무너진 뒤 유적이 변형되는 바람에 원래 돌아가려 했던 길이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유경과 진숙의 체력이 간당간당한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대귀 소귀 무리를 피해 이동해야 했다. 그랬기에 빙빙 돌아왔을 뿐.
눈앞에 작은 동산처럼 흙과 바위가 쌓여 있어 막다른 길처럼 보이자 진숙이 참지 못하고 불만을 드러냈던 것이다.
“잠시 이곳에서 휴식한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경은 그대로 벌렁 누워버렸다. 진숙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기에, 언제 불만을 품었느냐는 듯 드러누웠다.
강호는 그 모습에 혀를 차며 흙더미를 올랐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본 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역시 난 너무 착해서 탈이야. 하늘이 얼마나 감동했으면 이렇게 선물을 뚝 떨어뜨려 줘? 보답을 바라고 착하게 산 것도 아닌데 거참 부담스럽구만.
강호는 킬킬대다가 확장팩에서 삽을 꺼냈다.
오늘을 위해 군대에서 그렇게 삽질을 했나 보다.
미친놈처럼 히죽히죽 웃으며 팔뚝에 도핑까지 했다. 그리고 맹렬한 기세로 삽질을 시작했다.
* * *
출구에서 환한 빛이 반기자, 유경과 진숙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근처에 도착한 건 이틀 전.
빛에 눈을 적응시킬 필요가 있어 이틀간 기다려야 했다. 덕분에 심심해진 강호가 작정하고 굴리는 바람에 악에 받칠 대로 받친 상태다.
“헛! 생존자다!”
공동이 무너진 사건이 터진 지 보름이 지났다. 더는 생존자가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던 차에 출구에서 사람이 등장했으니, 놀랄 수밖에.
“잠시 검문이 있겠습……헉!”
유경과 진숙의 눈이 희번덕 뒤집히자 청월 길드원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죽을 고생 하며 올라왔는데, 검문? 우리가 무슨 죄라도 지었나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물어보라는 상부의 지시가…….”
“어떻게 살았느냐 이거예요? 꼭 죽어서 나타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진숙이 살벌한 기세를 피어 올리자, 주변에 있던 청월 길드원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 가장 직급이 높은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가디언이십니까?”
챙!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은장도 네 자루가 허공에서 사내의 목을 바짝 겨누자,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요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