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신, 하 변호사 05권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5권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5
산경(山景)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5권
차례
Chapter 01.
Chapter 02.
Chapter 03.
Chapter 04.
Chapter 05.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5권
Chapter 01.
헉헉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노인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집요하게 그를 쫓는 괴물 같은 놈들의 발걸음 소리가 그림자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속도가 줄어들던 노인의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달리는 그의 발걸음은 젊은 청년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도 빠르다. 믿기지 않은 정도의 속도로 달리던 노인은 자신이 토끼몰이 당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대낮처럼 불을 밝히던 도시의 불빛은 사라지고 어둠은 더욱 짙어 왔다. 아주 뜨문뜨문 보이는 불빛에 비친 광경은 이곳이 공장지대라는 걸 말해준다.
도심 번화가에서 외곽의 공장지대까지 토끼몰이 당했다.
사냥감은 사냥꾼보다 빠르다. 평탄한 길을 직선으로만 달린다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서 포식자는 지그재그로 달리는 먹잇감의 뒤를 달리면서 좀 더 빠른 최적의 직선 코스를 읽으며 달린다. 물론 체력이 떨어지기 전까지 유효한 전략이지만 말이다.
토끼몰이를 피하는 방법은 하나라는 걸 아는 노인은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제부터는 길을 따라 도망치는 게 아니다. 정한 방향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는 거다. 게다가 그는 한 방향으로 달리는데 최적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방향을 정하자 그의 속도는 더 높아졌다. 몇 걸음 뛰지도 않았을 때 그의 앞을 가로막는 공장 건물이 나타났지만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공장 건물의 벽과 충돌 직전, 그의 형체가 흐릿해진 건 어두운 불빛 때문이 아니다. 흐릿해진 그의 몸이 벽에 흡수되듯 벽을 통과했다.
벽뿐만이 아니었다. 공장 내부의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그가 달리는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심지어 모든 물리적인 물체를 통과하며 달리는 노인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몇 개의 건물을 통과했는지 모를 때쯤 노인은 급히 달리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쇳덩이로 몸을 감싼, 어쩌면 그냥 쇳덩이일지도 모르는 존재의 위압감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의 도주 방향을 정확히 읽고 나타난 그들을 보자 더이상 달리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노인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거… 뉘신지 모르겠으나…. 그냥 가던 길 가시오. 괜히 노인네 앞길 막지 마시고…. 이러다 누구 하나 봉변당하는 흉한 꼴 보일라….”
네 명의 쇳덩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단단히 움켜쥔 총구가 노인을 향했다. 이것이 그들의 대답이다.
* * *
“또?”
“네. 같은 방식입니다.”
국정원 요원은 이쑤시개처럼 생긴 쇠꼬챙이 하나를 내려놓았다.
“육십여 개가 온몸에 박혀 있었습니다.”
국장은 께름칙한 듯 조심스레 쇠꼬챙이를 집어 들었다.
“이게 강력한 전류를 발생시킨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부검 결과 이 쇠못이 몸에 박히고 강한 전류로 몸이 타버립니다. 고압 전선의 감전사와 동일합니다.”
“이번에도 몸통만?”
“네. 머리는 없습니다.”
국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입막음은 잘했겠지?”
“네. 최초 발견자에게는 불에 탄 시체가 아니라 영화 소품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경찰 측에는 우리 국정원 소관이니까 신경 끄고 입 다물라고 했고요. 만약 허튼소리라도 나오면 최초 발설자는 무조건 해임한다고 했습니다. 연금도 함께 날린다고요.”
국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참, 신원은 확인했어?”
“이전 사망자가 전부 초월자라서 이번에도 초월자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BS 그룹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정확한 신분은 더 조사해야 확답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국장이 이마를 찌푸렸다.
“내가 확답 듣자고 물은 거야? 짐작하는 거 들으려고 물었잖아!”
“아, 네. 그들의 짐작은 활빈당(活貧黨)….”
“활빈당? 그럼 홍길동?”
국정원 요원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활빈당에서 홍길동과 함께 활동했던 주요인물이라고 추측하더군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특기가 벽 같은 물체를 통과하는 능력이 있어서 도둑질에는 최적화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국장은 기가 차는지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그런 능력이 진짜 있었어? 정말 초월자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구먼.”
“그나마 다행이죠. 우리 같은 인간들 속에 섞여 조용히 지냈으니 말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도둑이었다면 경찰 전부가 머리 싸매고 있었을 겁니다.”
“그야 모를 일이지.”
“네? 무슨 말씀이신지?”
“엄청난 거금이나 귀금속을 도둑맞아도 신고 못 하는 사람 많다. 출처가 구린 돈을 현금으로 보관하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곳만 털었다면 가장 완벽한 도둑질이 되는 거야.”
“그렇기도 하겠군요.”
“뭐…. 도둑놈이든 아니든 중요한 건 아니니까. 수사는 시작했어?”
“네. 일단 CCTV부터 확인 중입니다만….”
“이번에도 아무것도 안 나오겠지?”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살해 도구 조사에 힘을 쏟고 싶습니다.”
“이 쇠못?”
“네. 이런 무기가 흔한 게 아니니까요. 못으로 고압 전류를 이용하는 무기의 개발 흔적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
“국내뿐만이 아니라 외국도 조사해야 합니다.”
“오케이. 원장님께 내가 보고 드리고 승인받지.”
“감사합니다. 국장님.”
“감사 따위는 때려치우고 흔적부터 찾으라고.”
“네.”
요원이 나가자 국장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근래에 자꾸 초월자가 등장한다. 얼마 전 인천의 COD 호텔에서도 전쟁 같은 일을 치르지 않았던가? 이제 그 존재조차 몰랐던 시절은 다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초월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세상, 얼마나 끔찍할지, 얼마나 혼란스러울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혼돈의 시대가 오기 전 은퇴해서 조용히 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 * *
인종도 다양하고 아마도 국적도 다를 것처럼 보이는 남녀 네 명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꽤 많은 양의 식사를 주문했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큰 경기를 끝내고 허기를 달래러 온 것처럼.
“이번엔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
“귀찮았을 뿐이지 뭐. 도망치는 솜씨가 보통은 아니었어.”
“비전투 타입이니까. 물체를 통과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능력이 없잖아.”
“오늘이 여덟 번째인가?”
바게트 빵을 입에 문 여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홉.”
“그래? 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아홉? 난 일곱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가 빠졌지?”
바게트 빵을 입에 문 여성은 빵을 내려놓았다.
“너무 쉬워서 그래. 전부 비전투 형이었으니까. 그리고 잊지 마. 우린 지금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한 게 아니야. 그냥 서울 지리 익히고 정보 흡수하는 거야. 진짜 사냥은 프라임이 와야 시작해.”
여성의 말에 다른 셋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 프라임이 오는 거야?”
“확정은 아니고 예정이라고 들었어.”
“도대체 프라임이 직접 움직일 정도면 누구를 사냥한다는 거야? 타노스라도 잡는 거야?”
“그냥 타노스가 아니겠지. 다섯 개의 스톤이 박힌 컨틀릿을 장착한 타노스쯤 되야 프라임이 직접 움직이지 않겠어?”
농담을 주고받지만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프라임이 직접 나선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급하게 음식을 입안으로 쑤셔 넣던 포크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프라임과 그에 걸맞은 사냥감을 생각하니 긴장한 탓에 입맛도 사라졌다.
“그럼 프라임이 오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비전투 형만 계속 사냥하는 거야? 이제 지겨워지려고 하는데….”
“그냥 휴가라고 생각하자. 한국은 우리의 첫 실전 투입 지역이야. 여기 끝내면 더 바빠질걸? 다음 지역은 아시아가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것도 예정이야?”
“아니. 확정이야.”
확정이라는 말에 다른 셋은 슬그머니 일어섰다.
“휴가를 이렇게 밥이나 먹으며 끝낼 수는 없지. 술이나 진탕 마시고 푹 지야 하지 않겠어?”
푹 쉬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긴장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이 만취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 * *
“만났어요?”
나 비서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지만 하 변호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만 약간 끄덕였다.
“정말? 닉스를 만났어요?”
“아니. 엘레나라는 우울한 표정의 대학생을 만났을 뿐이야.”
나 비서의 눈이 커졌다.
“그럼 모르페우스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나 비서도 알았잖아. 사실일 거라는 걸.”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어때요? 닉스는…?”
“완벽한 인간처럼 보였어. 저 상태로 간다면 어쩌면 늙어 죽어버릴 것 같았어.”
“정말 완벽한 인간화가 이뤄졌나 보네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쉬우세요? 죽이지 못해서?”
“아쉬운 건 없어. 닉스가 엘레나로 살아간다면 이미 죽은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닉스는 죽었고 내가 모르는 웬 인간 하나만 남은 거니까. 그냥 허탈하다는 정도? 그게 다야.”
“그럼 닉스는 이제 기억에서 지워도 되겠네요.”
“지울 필요는 없어. 모르페우스가 그랬지? 꿈속에 그녀의 본래 모습을 남겨뒀다고. 어쩌면 엘레나라는 여자는 다시 닉스가 될지도 몰라.”
댐에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이 댐을 무너뜨릴 수 있다. 한 조각 파편 같은 꿈이 엘레나를 무너뜨리고 본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나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며칠 전에 국정원 허준석 과장인가 하는 놈이 다시 연락 왔어요.”
“왜? COD 호텔은 완전히 마무리된 거 아냐?”
“용건은 변호사님께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하더군요. 아주 중요한 일이라면서. 어떡해요?”
“연락해. 대신 중요한 일이 아니면 가만 안 둔다고 하고.”
농담이 아니다. 닉스 때문에 우울한 지금의 하 변호사에게는 약간의 불쾌한 일도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 * *
“미국 다녀오셨다고…?”
조심스레 입을 여는 국정원의 서일호를 바라보며 하 변호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인사는 됐고 용건만 말해.”
까칠한 태도에 서일호와 허준석은 괜히 불안했다. 이거 혹시 오늘 제 발로 걸어나갈 수 있을까?
허준석이 황급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하 변호사는 그 뭔가를 손에 쥐더니 미간의 골이 더 깊어졌다.
“못?”
“네. 그게 초월자의 살해 도구입니다. 수십 개가 몸에 박히고 서로 강력한 전류를 흘려보내 감전사하는 겁니다.”
“초월자 살해? 누가 죽었어?”
“이미 아홉이 목숨을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