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신, 하 변호사 02권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2권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2
산경(山景)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2권
차례
Chapter 01.
Chapter 02.
Chapter 03.
Chapter 04.
Chapter 05.
죽음의 신, 하 변호사 02권
Chapter 01.
배형준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살인과 관련된 일을 끄집어낼 수 없었다. 뉴욕에서 흔한 강도를 만난 적도 없고 교통사고를 목격한 적도 없다.
“내 아들이 살인이라니?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야!”
신 회장이 소리쳤지만 나 비서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계약서 사인부터.”
신 회장은 이번에도 내용은 확인하지도 않은 채 사인을 끝냈다.
“이렇게 찔끔찔끔 간 보지 말고 가져온 거 있으면 한꺼번에 꺼내. 전부 사인할 테니까.”
“아뇨. 두 건이 전부예요.”
나 비서가 서류를 챙기자 하 변호사가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이원길을 아시겠죠? 칠레 리튬 채굴장 책임자니까.”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부자의 표정이 변했다.
아들은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오는지 궁금한 표정이었고 아버지는 이원길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모든 상황을 다 이해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형준아. 좀 나가 있거라.”
“아버지!”
배형준은 이 살인 기소에 아버지가 관련 있음을 단번에 알았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어서!”
불같은 호령에 배형준은 한숨 쉬며 회의실을 나갔다. 어차피 어떤 일인지 다 말씀하실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들이 나가자 하 변호사가 말했다.
“지금 행동은 살인을 시인하시는 것으로 이해해도 됩니까?”
“변호사라면 의뢰인의 무죄를 믿어야지. 왜 유죄를 전제로 말을 하나?”
“제 의뢰인은 배형준 씨입니다. 회장님은 참고인이죠. 아니면 진범이거나.”
신 회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형준이는 아무것도 몰라. 그리고 이 일은 오해와 과잉 방어로 벌어진 일일세. 살인은 어불성설이야.”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시죠. 그래야 대책을 세웁니다.”
신 회장은 긴 한숨을 한번 쉬고는 입을 열었다.
“채굴장과 정제 설비 주변의 주민들이 환경 오염 때문에 시위가 끊이질 않았어. 우린 그냥 무시 전략으로 나갔고. 그런데 점점 더 시위가 과격해지는 거야.”
“그래서 경비 전부가 무장한 겁니까?”
“어쩔 수 없었어. 직원들이 불안해하니까 진정시킬 방법을 찾은 것뿐이야. 그래서….”
“군 출신 경비대를 고용했군요.”
신 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결국 시위대가 담장을 넘었어. 이원길 전무가 다급하게 연락했지. 무력 충돌이 벌어질 것 같다면서 말이야.”
“칠레 사업장은 뉴욕 법인 관리하에 있지 않습니까? 왜 배형준씨가 아니라 회장님께 연락했습니까?”
“이 전무는 내 사람이었던 것도 있고…. 눈치 빠른 친구라 발포 결정을 내릴 사람이 누군지 정확히 안 거지.”
“배형준 씨는 총 쏘는 것을 주저했겠죠.”
“당연해. 형준이는 아직 현장을 잘 몰라.”
“그래서 회장님은 어떤 결정을 하셨습니까?”
조금은 주저했지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위협사격은 허락했어. 그리고 필요하다면 다치는 정도는 괜찮다고. 그러니까 허벅지나 팔 같은 곳 말이야. 그래야 겁을 먹으니까.”
“군 출신이라고 해도 저격수는 아니니까 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없겠죠.”
“세 명이 죽었어.”
신 회장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사람이 죽였다는 죄책감이 아니라는 걸 하 변호사는 잘 안다.
저 표정은 하필 그런 사고가 왜 자기 회사에서 일어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예전에 말한 대로 피 냄새가 진동해도 본인은 절대 모른다.
“하지만 칠레 사법부는 우리 손을 들어 줬어. 불법 침입, 테러 시도 등등. 우린 자위권을 행사한 것으로 끝이 났으니까.”
그 칠레 사법부에 뇌물 먹인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고 하 변호사도 확인하지 않았다.
“배형준 씨는 이 사실을 모릅니까?”
“내가 입단속 시켰거든. 내 아들은 이원길 전무와 현장 책임자 몇 명만 업무를 나누니까.”
신 회장은 털어놔야 할 이야기는 다 끝냈다고 생각하는지 이번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이게 살인 사건으로 둔갑했지? 그것도 미국에서?”
“칠레 사람 간의 문제는 미국이 관여하지 않죠. 하지만 사건 발생지역이 어디든 여기 미국 땅에 발을 붙인 사람은 여기 법을 따릅니다.”
“그래서 왜 내 아들이냐 말이야?”
“뉴욕 검찰은 총을 발포한 군 출신 경비의 증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발포 명령을 이행했다고 했고, 그 명령자가 이원길이라는 것도 증언했습니다.”
“회사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 아닌가?”
“뉴욕 검찰은 무기를 소지 하지 않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갈긴 건 살인으로 보죠. 게다가 경비대의 숫자가 시위대의 숫자보다 더 많았습니다. 어찌 됐든 발포는 과잉이었고 회장님도 그때 시위대를 향해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건 검찰 측에서 할 말이고. 또, 발포 명령은 이원길이 했어. 내 아들이 아니라고. 그리고 이 전무는 지금 칠레에 있으니….”
신 회장은 고개를 젓는 하 변호사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검찰이 이미 이원길의 신병을 확보했어요. 뉴욕 어느 호텔 방에 고이 모셔두고 있을 겁니다.”
“그 친구가 왜 미국에….”
“가족이 뉴욕에 있다면서요? 일은 칠레에서 하지만 소속은 뉴욕 법인 아닙니까?”
“이런…!”
“미국땅 밟자마자 체포한 겁니다.”
“그럼 그놈이 내 아들을 팔았어?”
“여긴 형량 거래가 가능한 나라입니다. 상사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면, 그리고 그 상사가 미국에서 거주하는 배형준 씨라고 말하면 끝난다고 회유했겠죠.”
“바보 같은 놈. 울타리가 돼줄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건가.”
배신자가 아닌 멍청한 인간으로 치부하는 모습은 예상 밖이었다.
“그래서? 이거 다 해결해줄 건가?”
“물론입니다. 변호인 선임의 이유가 바로 해결 아닙니까?”
“그럼 더 할 이야기 없군. 가서 해결해.”
“그 전에 하나만 확인하겠습니다.”
신 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혹시 배터리 사업에서 철수할 의향은 있으십니까?”
“철수? 왜? 꼬리 내리고 도망가면 내 아들 문제가 사라지나?”
“아닙니다. 상대를 압박할 좋은 카드라서 말이죠. 예컨대 현재 배터리 분야 1위인 GL그룹이나 호시탐탐 배터리 사업에 진출하려고 눈치 보는 SY 그룹이 사업 전체를 인수하겠다면 어떻습니까?”
신 회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차라리 마이크로그리드를 인수하고 끝낸다. 이 사업 철수는 없어.”
단호한 태도는 그가 아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려준다.
“그럼 운만 띄우십시오. 여차하면 팔아버리고 손 뗀다는 신호만 보내면 됩니다.”
“그 정도는 하지. 인수제안서 만들어서 두 그룹에 보내면 되겠나?”
이 대답 역시 아들에 대한 애정의 징표다.
다른 그룹 총수에게 실없는 노인이라고 조롱받는 것도 받아들일 정도니 말이다.
“네. 그럼 나가서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 * *
“브라기에게 마이크로그리드 변호사 만나도록 주선해달라고 해.”
“검찰은요?”
“거긴 신경 안 써도 돼. 이원길 증언에 모든 걸 다 걸었으니 그 증언만 없어지면 되잖아.”
“깔끔하게 죽여버릴 생각은 아닌 거죠?”
“여기 미국에서는 조심하는 게 좋아. 괜히 더 복잡하게 만들면 검찰이 우리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 미 정부는 우리가 여기 왔다는 사실을 몰라야 해.”
“알겠어요. 대신….”
“그래. 그것만 하고 자유 시간. 내게 마이크로그리드 변호사 미팅장소와 시간만 알려주면 돼.”
나 비서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하나 더.”
하 변호사는 지갑을 꺼내 그녀의 손에 카드 한 장을 놓았다.
“뉴욕이라 흥분한 건 알겠는데 적당히 놀자.”
“네. 적당히 쓸게요.”
카드를 챙긴 나 비서는 메모지 한 장을 다시 건넸다.
“뭐야? 이건?”
“마이크로그리드 변호사 미팅장소와 시간이죠. 서두르세요. 내일 아침이니까. 쓸데없이 재즈 바 같은데 돌아다니지 말고 일찍 주무시라는 뜻이에요.”
* * *
“올리비아가 그러더군요. 아주 대단하신 분이라고. 다만 뭐가 대단한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MR. HA.”
하 변호사는 손을 내미는 상대 변호사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뭐든 대단합니다. MS. Jayne.”
“레이첼(Rachel)이라고 부르세요.”
“존입니다.”
“본명은 아니시죠?”
“네. 한국어 발음이 좀 이상해서 그냥 존이라고 하죠.”
레이첼 제인은 하대수의 명함을 다시 한 번 보더니 피식 웃었다.
“데쓰?”
“정확한 발음은 아닌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발음하더군요. 그래서 그냥 존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두 사람은 인사는 이쯤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죽음의 John께서는 KI 그룹의 새로운 제안을 가져오셨나요?”
“숫자만 맞으면 마이크로그리드가 간절히 원하는 소원을 들어줄 생각입니다.”
레이첼 제인은 기다렸다는 듯 메모지에 숫자를 적어 내밀었다.
“공정한 평가 금액의 두 배가 넘는군요.”
“기업의 공정한 평가 금액 플러스 기술특허 취득 그리고 엄청난 소송 비용을 줄이는 합리적인 숫자죠.”
“좋습니다, 그럼 내가 그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숫자에 가득 낀 거품을 한 번 걷어내 볼까요?”
레이첼은 두 손을 활짝 벌렸다.
“얼마든지.”
“지금 미 정부는 적당한 선에서 끝내라고 마이크로그리드를 압박하고 있죠? KI가 미국 사업 접으면 조지아주 공장도 폐쇄해야 합니다. 노동자와 딸린 식구만 해도 2만 명이 넘어요. 그리고 지금 미 합중국 대통령은 조지아 출신이고. 물론 전기차 공급망에도 차질이 있으니 경제 파장은 단순히 공장 하나 문 닫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레이첼 제인이 웃었다.
“득점 인정. 그리고요?”
“KI 그룹 회장의 성격이 지랄 맞다는 것쯤 이제는 알겠죠? 그는 협상가 스타일이 아니라 갬블러 스타일입니다. 그것도 아주 무모한 갬블 스타일이죠. 마이크로그리드를 인수하는 것쯤 판돈 한 바퀴 도는 수준밖에 안 되지만 기분 상하면 아예 카드 테이블을 엎고 나가 버립니다.”
“미국 시장 철수라도 한다는 거예요? 그럴 수는 없을 걸요? 여기 미국이 가장 큰 카지노를 보유한 곳이니까 다른 곳 카지노에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해요.”
“철수는 무슨…! 플레이어를 교체한다는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