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3권
서경 신무협 소설
1장. 미끼
만금각 일층 접객실.
배첩을 들고 갔다 돌아온 무사의 답변에 나는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고? 아니면 스톱?’
패왕성의 이름과 체면을 생각하면 당연히 고.
하지만 왕소봉을 생각하면 스톱이다.
피식.
쓴 미소와 함께 털고 일어났다.
‘좋아. 친구 아버지이기도 하니 한 번은 예의를 지키는 것으로 하지.’
그대로 돌아섰다.
“한 번은 예의를 지킨다고 전해라.”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자.”
그렇게 왕소봉의 처소인 일양각으로 되돌아왔다.
“봐봐. 내 말이 맞지?”
털레털레 돌아온 내 모습에 왕소봉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뜻밖의 말을 이었다.
“내 아버지지만 나도 의중을 전혀 모르겠어. 정말 만만치 않은 분이라니까?”
표현이 절제되어 있어서 그렇지 그간 쌓인 골이 만만치 않을 듯했다.
‘하긴, 나도 뉴스 보고 알았다. 몇몇 재벌들이 자식새끼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지.’
시대와 사는 곳이 다르다고 뭐가 얼마나 다르겠나?
자식들이 그 모양인 것은 분명 가르치고 모범을 보여야 할 재벌들 자체가 개차반이기 때문일 터, 그걸 생각하면 왕소봉은 정말 특이 케이스인 거다.
‘녀석의 아우들을 봐. 위아래도 없고 이익이 걸린 일에는 물불 가리지 않잖아.’
첫 만남을 제외하면 만금상단의 일 공자씩이나 되는 사내가 이렇게 소탈할 수가 없다.
“정말 이 시간에도 그리 바쁘시냐?”
“만금상단의 총수야. 당연히 바쁜 게 맞지. 하지만 내려고 하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야. 감히 누가 뭐라고 토를 달겠어? 안 그래?”
피식.
“그래. 맞다, 네 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고도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도 잘 만나주시지 않는 분이야. 그래서 아예 어머님 먼저 뵙고 온 거 보면 몰라?”
“하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공적인 일로 찾아온 것만 아니라면 자신도 왕소봉과 함께 찾아뵙고 먼저 인사를 드렸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널 많이 궁금해 하시더라.”
“나를?”
“응. 내가 막 자랑했거든. 새로 사귄 친구인데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어리지만, 막역지우 같다고 말이야.”
“내 나이가 두 살 어린 건 뭣 하러 말 했냐?”
“뭐 어떠냐? 내 어머니인데…….”
“그래도 인마. 어머니께서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야.”
“아, 됐어. 우리 어머니께서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사람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내 어머니가 떠올랐다.
유소향.
수수꽃다리를 닮으신 분.
‘보고 싶다. 나도.’
잘 다녀오라며 가만히 안아주실 때 느낄 수 있었던 그 포근함이 그리웠다.
그러니 왕소봉의 어머님이 더욱 뵙고 싶어졌다.
‘어쩐지 내 어머니와 그분의 성향이 조금 비슷해 보이는 것도 같고…….’
뵙지 않았지만 이미 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본래 친한 친구 어머니께 인사드리러 가면 다들 이와 비슷한 기분이 드는 걸까?
“야. 나도 인사드리러 갈까?”
뜻밖에 왕소봉은 고개를 흔들었다.
“바보야. 네가 배첩까지 들고 만금각 먼저 찾았던 이유를 잊었어? 우리 아버지 의외로 속 좁다. 명심해.”
공적인 일로 찾은 만큼 무조건 이 집안의 가장이자 만금상단의 총수인 왕진양에게 먼저 인사를 한 후 움직여야 된다는 뜻이다.
피식.
“그래 알았다.”
그때 왕소봉이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물어왔다.
“어떻게 할래?”
“뭘?”
“지금까지 내가 겪어 본 우리 아버지의 성향을 토대로 생각하면 앞으로도 면담은 없어. 그러니 묻는 거야. 어떻게 하고 싶어? 포기할래? 아니면 나와 함께 한 번 대차게 부딪쳐볼래?”
나 역시 진지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나야 당연히 부딪칠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걱정되는 건 네 아버지인 왕 노야의 반응이 아니야.”
“그러면?”
“당연히 너지. 내 친구인 너.”
“……!”
“부딪치게 되면 나는 패왕성의 전권을 위임받은 공식적인 신분으로 나설 거야. 당연히 네 아버지인 만금상단의 총수와 대립할 가능성이 커. 왜? 이미 한 번 거절했으니까.”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겠어.”
왕소봉이 묵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뜻밖의 말을 보탰다.
“괜찮으니까 좋을 대로 해.”
“정말? 그 대립이라는 말 속에 조금은 거친 표현과 행동이 섞일 텐데?”
피식.
왕소봉이 웃으며 답했다.
“잊었어? 나도 얼굴 뵙기 어렵다고 했잖아. 그만큼 구분이 칼 같으신 분이야. 네가 어떻게 행동하든 내게 영향 미치진 않아. 걱정 마.”
대답을 듣긴 했지만,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표현을 자제하시던 내 아버지 패왕과 결이 비슷하다고 봐야 하려나?’
아니라면 그저 철저한 장사꾼 습성이 몸에 배인 나머지 매정할 뿐일 것일까?
‘후우. 잘 모르겠다.’
아직 만나보거나 겪어보지 못해서.
“그렇다면 좋아. 가자. 부딪치러.”
“지금?”
“뭐, 더 끌 필요 있었어?”
“하긴. 전부 아니면 전무인 상황인데…….”
왕소봉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의관을 정제한 후 먼저 앞장섰다.
“가자, 친구야.”
“그래.”
왕소봉의 곁에 나란히 섰다.
조급함 따위 없다는 듯 느긋하고 묵직한 걸음으로 만금각을 향해 나아갔다.
***
만금각의 총수 집무실.
왕진양은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와 예하 지부에서 각각의 결재를 위해 올라온 수하들과 차례차례 면담을 이어가느라 바빴다.
“이 서류는 정주 지부에서 총수님 전결로 처리한 창주염(滄州鹽-하북성 소금)의 실 구매 계약서로서…….”
“무한 지부에서 확대되는 물동량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상선의 증가가 예상되는 바, 추후 십 년을 위한 선박 제조 확보에 대하여…….”
“지난 달 예상보다 빨리 매진되어 버린 비단에 대한 물량이 확보되면 저희 조양지부에 우선적으로 먼저 배분해 주십사 하는 청을 올리기 위해…….”
한 개의 성을 나눠 놓은 대형 지부 24곳.
예하 상방과 그들이 따로 운영하는 중소상인집단까지 포함하면 무려 150여 곳이 넘는 조직체 덩어리에서 올라오는 서류와 면담 요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일을 나눌 수도 없다.
장로들과 회의를 해야 할 안건은 따로 있었고 대부분의 일들이 결국 총수의 수결과 확인이 필요한 안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안 하려고 들면 편하다.
각 지부의 일은 깡그리 지부에 맡겨두고 이곳에서는 이윤만 계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결국 망한다.
총수의 관리를 받지 못한 곳은 부패하기 쉽고 제 멋대로 일을 처리하기에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각 조직들 간의 고리가 깨지기 때문이다.
지끈지끈.
“후. 잠시 쉬어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노야.”
왕진양의 말에 총관 현우명이 빠릿하게 대응했다.
모든 서류를 막았으며 예정되어 있던 면담 대상자들을 뒤로 미루었다.
‘차를 올려. 빨리.’
‘알겠습니다.’
말도 필요 없다.
다년 간 경험에서 우러나는 눈빛과 손짓.
그 작은 동작만으로 모든 일이 준비되고 이뤄지는 신기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쪼르륵.
향긋한 내음이 집무실 전체로 퍼져갔다.
당대의 황제 여양이 ‘인세제일차’ 라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몽정차, 그 중에서도 오리진의 선차였기에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흐음. 좋군.”
한 모금 차를 들이켠 왕진양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의자에 몸을 맡겼다. 
나른하게 자세가 풀어지는 것을 보니 적잖이 피로회복이 되는 모양이다.
“역시 향이 좋아.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단 말이야.”
맑아지긴 개뿔.
‘내가 있는데? 어림도 없어.’ 하듯 감히 훼방을 놓는 인간이 생겨났다.
“저, 노, 노야.”
왕진양과 총관의 고개가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
눈빛들이 어찌나 차갑고 날카로운지.
스르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수신호위가 너무나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다시금 배첩이 당도했습니다.”
조심스레 익숙한 짙푸른 색 배첩을 내밀었다.
화인처럼 박힌 중앙의 금박 선명한 ‘패(?)’ 라는 글씨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죄송해 죽겠다는 듯 수신호위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일 공자께서 함께 온 터라 제 선에서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소봉이가?”
“예, 노야. 일 공자께서 공무(公務)로 왔다 하였기에 겨우 짬을 내어 쉬시는 것을 알면서도 저로서는 아뢸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무로써 왔다?
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