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만, 당신의 아내가 될게요
1년만, 당신의 아내가 될게요
1년만, 당신의 아내가 될게요
1장.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한기가 느껴졌다.
가을 끝자락, 햇살은 유리창을 뚫지 못하고 차갑게 번졌다. 윤서진은 손끝에 얹힌 커피잔을 천천히 돌리며 묵직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유언장 내용은 확인하셨습니까?”

법무법인 ‘율원’의 대표 변호사 정무현이 말문을 열었다.
단정한 정장, 늘어진 목소리, 그리고 법조계 30년 경력에서 우러난 완급 조절. 하지만 지금은 그 역시 긴장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확인했죠. 말도 안 되는 조건이더군요.”

서진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부친의 사망 이후 그룹을 정리한 지 5년, 이제는 자신이 직접 회사를 책임질 때라 믿었지만, 이번엔 그의 동생 윤이진이 예고도 없이 세상을 떠나며 뜻밖의 유언장을 남긴 것이다.

「본인의 유산 및 보유 주식 전량은, 법적 배우자와 함께 1년간 혼인 생활을 유지할 시에만 상속이 유효함. 단, 해당 배우자는 강하윤으로 지정하며, 기타 조건은 변호인단 확인을 통해 조율함.」
? 윤이진, 자필 유언장

서진은 그 유언장을 처음 본 순간, 얼이 빠졌다.

“도대체 왜 하필 그녀였을까요. 이진 군과 그녀는 친구 사이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나도 묻고 싶네요.”

커피를 내려놓으며 서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동생의 장례식장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묵묵히 유골함을 바라보던 여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허름한 검은 코트, 지친 표정, 그리고 마지막까지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진 여자.

강하윤.

그녀는 이진의 유언에서 튀어나온 ‘유산의 열쇠’였다.



고시원 복도는 늘 싸늘했다.
좁은 방 안, 강하윤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끌어 올린 채 휴대폰 액정을 응시했다.
열흘 전, 장례식이 끝난 날 밤부터 그녀의 인생은 낯설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YS 그룹 법무 팀입니다. 윤이진 님의 유언장 관련하여 강하윤 씨께 연락드립니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정식 공문, 변호사의 서명, 확인된 서류 앞에 하윤은 두 손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결혼 계약…?”

그녀는 혀끝으로 단어를 되뇌었다.
서류에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조건이 적혀 있었다.
1년간 윤서진과의 동거하며 혼인 관계를 유지할 것. 상속 유효 조건.
그리고 상속인이 될 자격.

하윤은 그저 친구의 장례를 지킨 죄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의 며느리 자리에 ‘강제’로 끌려가게 생긴 상황이었다.



이틀 후.
서울 강남, YS 그룹 본사 43층, 비공개 회의실.

“제가 왜 이 결혼을 해야 하죠?”

하윤은 마주 앉은 윤서진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차가운 눈매, 인위적으로 정돈된 말투, 숨 쉬는 것조차 시간 단위로 계산할 것 같은 남자.

“모르겠네요. 난 원하지 않지만, 유언장이 당신을 지목했어요.”

그의 말투는 감정을 섞지 않았다.
그러나 말끝의 단호함은 어쩐지 사람을 숨 막히게 했다.

“나는 이 상속이 필요하고, 당신은 돈이 필요하겠죠.”

하윤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조건은 간단합니다. 1년, 딱 1년만 계약 결혼을 유지하면 돼요. 당신은 매달 일정액을 받고, 유산 분할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게 됩니다. 난 상속권을 확보하죠.”

“사람을 숫자로 쳐요?”

“처음이 아니니까요.”

하윤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모든 게 현실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계약서 위에 적힌 ‘1년간의 결혼 생활’이 현실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이진이랑 마지막까지 친구였어요. 그의 진심을 훼손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요?”

“이 결혼, 진짜처럼 보이게 만들 거예요. 최소한 세상 앞에선.”



이 결혼은 누구도 축복하지 않았고, 누구도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하윤은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의 신분은 이제 재벌가의 ‘법적 아내’였다.
그리고 그 신분이 가져올 폭풍의 서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 * *

윤서진의 차가운 시선이 유리창에 부딪혔다.
상속 계약은 완료되었고, 결혼으로 ‘부부’가 된 둘. 그러나 현실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오늘부터 이 집이 당신의 거처입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청담동 한복판에 위치한 고급 단독 주택이었다.
정확히 말해 YS 그룹 회장가 전속 ‘별채’, 그룹의 안살림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하윤은 그 거대한 대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여기 살아도 되는 건가요?”

“유언장이 그렇게 명시했죠. 1년간 부부로서 동거할 것.”

서진의 말은 여전히 기계적이었다.
그는 의무처럼 그녀를 인도했고, 그녀는 체념처럼 따라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현관문을 열자, 중년 여성과 젊은 남자 둘이 인사를 건넸다.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 여성은 이 집의 가사 책임자이자 서진의 ‘어머니 대행’ 역할을 자처하는 안 비서였다.

“사모님이라니,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

하윤이 당황하듯 고개를 숙이자, 안 비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 집은 회장님께서 직접 지정하신 곳입니다. 외부 출입은 엄격히 제한되고, 모든 동선은 기록됩니다. 식사는 정해진 시간에 배달되며, 외부 활동은 미리 보고 부탁드립니다.”

“…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