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서 도망치는 중입니다 1권
지은이 : 연서담
펴낸곳 : 디키 웹소설(교보문고)
ⓒ연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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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에서 도망치는 중입니다
1권
연서담
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아만다 스텐실의 인생은 비루했다.
고명한 스텐실 가문의 적녀로 태어나 비루하게 살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아만다는 그 어려운 걸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그녀에게 인생은 늘 맨발로 돌밭을 걷는 것과 같았다.
깡마른 박색에 행동은 굼뜨고 둔하다. 아만다의 부족함은 걸음마 뗄 때부터 알 수 있었다. 남보다 말을 떼는 것도 느려 어릴 때는 그녀가 벙어리는 아닌지 의사의 진단을 받기도 했었다. 지능이 남보다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천성이 둔하고 무던해 곧잘 어벙한 표정을 지었고, 그런 모습이 그녀에 대한 편견을 가속화했다.
“아만다, 그래도 우리에겐 시간이 있잖니.”
돈 많은 집안이니 부모는 뭐라도 재능을 찾아 주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아만다는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정치, 경제, 회계를 비롯한 여러 학문부터, 시 쓰기나 그림 등 예술 교육, 승마, 크로켓, 검술 등의 각종 스포츠, 외국어와 사교댄스를 비롯한 각종 예법까지.
하다못해 포커 같은 잔기술마저도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결과는 형편없었다.
“―너는 대체 누구를 닮았길래.”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녀는 이 분야에 재능이 없다는 판정을 받으면 다음에는 뭘 가르칠지 가정교사 명단을 뒤적였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사라졌다.
그때쯤 사람들은 숙덕거렸다.
“낙오자.”
“저렇게 무능해서야….”
“정말 멍청한가 봐.”
그리하여 스무 살 아만다에게는 낙오자라는 라벨이 붙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형제들은 그런 숙덕거림에 화냈다. 뒷말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화를 내주기도 하고, 아만다가 못 듣게 함께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우리 가문 앞에서 납작 엎드릴 것들이 뒤에서만 입 놀리는 꼬락서니하고는! 너는 화도 안 나니?!”
“나는 괜찮아.”
문제는 아만다의 태도에도 있었다.
그녀는 남들이 조롱하건 말건 맹하게 제 방에서 수나 놓았다. 손가락을 수없이 찔렸지만 이 또한 재능은 없었다. 바늘에 찔려 퐁퐁 피가 솟아도 걱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지만 그녀는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였다.
대궐 같은 방에서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나오는 삶이 퍽 좋은 것 같았다.
그렇게 2년쯤 허송세월하던 어느 날, 아만다는 가문의 원로회로부터 문서를 받았다.
「제국은행 계좌 소유주 증명서
- 아만다 스텐실 귀하 -」
계좌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정확히 상속법에 적힌 그녀 몫의 유산이라는 원로회의 전언이 함께였다. 가문의 재산 중에는 부동산이나 무형자산도 많았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현금뿐이었다.
그녀를 가문에서 내치겠다는 완곡한 축객령임을 아만다 역시 알았다.
괜히 고집부려 가족과의 연마저 끊어질까 아만다는 모든 것에 순응했다. 그 길로 저택을 나와 작고 소박한 저택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아만다의 비루하고 외로운 삶이 이어졌다.
“스텐실 가문의 영애 이야기 들었어요?”
“가문에서 쫓겨났다죠?”
“이제 파티에도 안 나오던데, ‘그’ 스텐실이 대체 무슨 꼴인지!”
아만다의 처지는 한동안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무능하고 불쌍한 영애를 비웃는 것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외톨이가 된 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런 말조차 닿지 않았으니까.
“난 그래도 집이 있는걸.”
얌전하고 순해 노상 주눅이 든 성격까지 더해져 패배자의 전형 그대로였다. 의욕도 없고 야망도 없어서 뭘 하고 살 거냐는 질문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아만다의 유일한 꿈을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만나게 될 운명의 상대도 있어.”
아만다의 유일한 꿈.
야유 속에 갇힌 그녀의 삶을 이끌어 줄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일이었다.
* * *
아만다는 태어나기 전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 자신의 운명을 부여받을 때, 여러 천사들의 쓰다듬을 받는다. 그때 마지막으로 쓰다듬어 주던 천사가 한 말이 있었다.
‘인연’을 관장하는 천사는 탄생을 앞둔 아만다를 보며 말했었다.
“일을 이따위로 할 거야?”
퍽 동정 어린 목소리였다.
“재능을 아무것도 안 주면 어떡해! 둔한 데다 몸도 약하고 미움받는 삶에, 잘하는 것도 없다니.”
쯧쯧.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천사는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사의 다정한 손길이 닿을 때마다 온기가 스며들었다.
“별수 없으니 네 운명의 상대라도 최고로 주마. 아무리 힘든 삶을 살더라도, 견디면 나중에는 듬뿍 사랑만 받는 미래를 얻을 수 있도록. 너에게 가호가 함께할 거다, 아가.”
꿈이거나 자신의 망상일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실상 지금까지 잊고 지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운명은 실재한다는 것을, 아만다는 황제의 대관식 날 깨달았다.
* * *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세상 모든 것이 요동쳤다. 수백 개의 나팔이 그를 위해 울린다. 광장에는 동전이 흩뿌려지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선망이 가득했다.
“황제 폐하의 즉위식을 거행한다!”
마법관을 타고 기사의 목소리가 광장 가득 울려 퍼졌다. 황제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선황의 관을 받았다.
“그대는 새로운 신성의 수호자로서 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몸 바칠 것을 맹세하는가?”
선황의 근엄한 목소리가 울린다. 황제는 고개를 들어 결의에 가득 찬 눈빛을 드러냈다. 자애로운 눈매 속 보랏빛 눈동자,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지고한 다짐에 군중은 넋을 잃었다.
“맹세합니다.”
“그렇다면, 일어나 선언하라. 이 순간부터 그대가 바로 ‘판테아 룬 아르칸’임을.”
선황은 무언가를 전해 주듯 황제의 어깨에 잠깐 손을 얹었다가 떼어 냈다. 황제는 일어나 군중을 향해 바로 섰다. 눈부신 햇빛이 오직 그에게만 내리쬔다.
‘판테아 룬 아르칸’.
위대한 신성의 수호자.
“나 유리엘 판테아 룬 아르칸은 오늘부로 신성제국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직함보다 더욱 빛나는 존재.
황금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고결한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누구나 사랑에 빠질 것이 분명한 아름다움에 군중은 순간 숨을 삼킨다. 그리고 다음 순간, 폭발하듯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황제 폐하 즉위 만세!! 만세―!!!”
누군가는 두 팔 벌려 환호하고, 또는 손을 모아 감격했다. 벅차오른 사람들 사이에 아만다도 있었다.
아만다는 마치 못 박힌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황제의 고운 속눈썹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마음도 속절없이 흔들렸다.
모를 수도 없을 만큼 강렬한 색채로 퍼진다.
그였다. 그가 바로 아만다의 운명의 상대였다.
* * *
“세상에, 저기 좀 봐요.”
“어머, 스텐실 영애 아니에요?”
화려한 부채로 입을 가린 부인들이 저마다 숙덕였다.
“몇 년간 두문불출하더니 용케 이런 자리에는 왔군요.”
“폐하께 눈도장 찍는 자리는 탐이 났나 봐요?”
우아한 척하는 날 선 목소리가 아만다의 귀를 찔렀다. 아만다는 드레스 자락을 꽉 쥐며 조금 고개를 숙였다.
오전에는 일반 백성들을 위한 대관식이었다면 저녁부터는 귀족들을 위한 파티다. 새로운 황제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귀족들 사이에서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졌다.
초대장이 없는 귀족들은 초대장을 받은 귀족에게 빌붙어 파티에 입장하기 위해 뇌물을 쏟았다. 설령 자리를 얻지 못해도 황제를 멀리서라도 보기 위해 수도로 올라온 사람들이 많았다.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돈만 많이 타고나서 이곳에는 쉽게 들어왔군요.”
거금을 들여 파티 동행인의 자리를 산 영애가 적개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집안이 초대장을 받지 못한 것은 아만다의 탓이 아니었으나,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백치로 알려진 아만다를 분노의 표적으로 삼았다.
아만다는 제 이름으로 나온 초대장이 있었으나,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치열한 사교 현장은 당연하게 아만다만 빼고 활발하게 돌아갔다.
“어머, 미안해요.”
“그런 데 서 있으니 부딪히죠.”
누군가는 다가와 몸을 부딪치고 갔다. 무례한 사람들은 항의 한 번 못하는 아만다를 비웃으며 저들끼리 사라졌다.
이러다 음료를 든 사람한테 부딪칠까 아만다는 벽에 붙어 섰다. 예전에는 그렇게 드레스를 망치면 차라리 일찍 귀가할 수 있어서 좋아했지만, 오늘 그녀는 무언가에 정신을 빼앗긴 상태였다.
“인사를… 드려야 해.”
아만다의 시선이 황제를 향했다.
황제는 누구보다 높은 단상에 올라앉아 있었다. 각 가문의 가주들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충성을 맹세했고, 소가주들이 그다음으로 섰다.
꽤 거리가 있었지만 광장에서보다는 한결 황제의 얼굴이 잘 보였다.
“아름다워….”
아만다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새로운 신성황제, 유리엘 판테아 룬 아르칸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목을 덮는 길이의 금갈색 머리카락은 태양 아래서는 눈부신 황금색으로 빛났지만, 샹들리에 아래에 서자 비단처럼 유려하게 미끄러졌다.
보랏빛 눈동자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 같았다. 사람의 탐욕을 자극할 만한 광채는, 그보다 더한 신성함을 곁들여 더욱 지고했다. 피부는 백옥 같고 선이 우아해 황제가 움직일 때마다 넋을 놓게 만들었다.
유리엘 판테아 룬 아르칸은, 말 그대로 고귀했다.
‘저 사람이 내 운명의 상대….’
도저히 사람 같지 않은 황제를 바라보며 아만다는 넋을 잃었다. 심장이 낯설게 울렸다.
‘다가가 웃어. 사근사근히 말을 걸어.’
기대와 설렘으로 범벅된 가슴을 부여잡는다.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속삭였다.
‘괜찮아. 너는 달라.’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 아만다를 유혹하듯 퍽 희망적인 목소리로 속살거린다.
‘그는 운명의 상대니까. 분명 네가 지금 느끼는 감정처럼, 그 역시 순식간에 너한테 빠질 거야.’
맞아. 그럴 거야.
우린 서로를 사랑하게 될 거야.
그런 운명이니까.
몽롱한 기대감이 벅차올랐다. 설렘인지 혹은 긴장인지,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문 아만다가 앞으로 한 발자국 움직였다. 소가주들의 인사를 받아 주고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서.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쩜 저렇게 아름다우실까….”
그러나 앞을 가로막은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움직였을 때, 누군가의 감탄이 귀를 파고들었다.
“신전에 그려진 벽화를 보는 것 같아요.”
“폐하의 옆에 서는 분은 얼마나 좋을까요.”
“분명 폐하께서 선택하실 만한 멋진 분이겠죠.”
사람들은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만다는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춰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깊이 매료된 표정을 지으며 단상의 황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쿵. 가슴에 무거운 돌이 떨어졌다.
그녀가 황제에게 다가가면 닿을 익숙한 표정들이 떠올랐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황제의 옆에 선 낙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