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슈욱! 퍼어어엉!
구강혁의 초구가 순식간의 한준구의 미트에 빨려 들어갔다.
몸쪽 코스를 찌르는 포심 패스트볼.
“스트라이크!”
판정은 스트라이크였다.
[……초구는 스트라이크! 구속은 97마일, 156킬로미터까지 형성됩니다! 확실히 초구부터 구속을 더 끌어올리는 구강혁, 미타니가 공 하나를 차분하게 지켜보네요!]
[시작은 좋아요. 지금 미타니도 구강혁의 뱀직구를 의식하고 있는 모습이거든요. 평소보다 홈 플레이트에서 멀게 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배터리는 몸쪽 포심을 선택하며 카운트를 앞서 나가는 모습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는 볼 생각이었군.’
한준구에게서 공이 돌아왔다.
‘현실적인 선택이다. 스탠스는…… 지금도 딱히 바꾸지 않는 건가. 이번 타석은 어느 정도 바깥쪽을 열어 둘 생각인 거 같은데, 저 체격과 타격 스킬까지 감안하면, 웬만한 투수들은 생각이 오히려 많아지겠어. 호랑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꼴이니까.’
[이미 까다로운 두 타자를 상대로 어렵지 않게 아웃 카운트를 잡아낸 구강혁입니다. 미타니를 상대로 주자를 쌓아 두지 않은 점도 일단 호재로 꼽힐 것 같은데요.]
[네. 일본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뛰어난 출루 능력을 갖춘 두 명의 발 빠른 타자와의 시너지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계속해서 미타니를 3번 타자로 선택하고 있거든요.]
[조별리그에서도 이러한 타순은 꽤 효과를 보지 않았습니까? 야마모토와 이토가 조별리그에서 홈 플레이트로 돌아온 횟수는 앞서 말씀드렸듯 여섯 번, 그 가운데 다섯 번을 해결한 타자가 바로 미타니였으니까요.]
[파나마전에는 특히 탁월했죠. 1회초 두 타자의 연속 출루에 이은 쓰리 런을 기록했으니까요. 일본 타자들의 장점으로 흔히 정교함과 주력을, 단점으로는 파워를 꼽습니다만.]
[미타니는 다르죠.]
[그렇습니다. 미타니는 애초에 그런 규격을 벗어난 타자예요. 이미 조별리그에서 많은 투수들이 어지간하면 미타니를 상대로는 좋은 공을 주지 않겠다, 그런 의사를 뚜렷하게 보였고요.]
[바꿔 말하자면 지금처럼 앞선 주자가 없는 경우에는 미타니의 좋은 타격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내주기도 했던 일본 대표팀입니다. 바로 호주가 그런 식으로 일본을 잡아내는 파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도미니카, 파나마의 투수들과 비교했을 때 미타니와도 그나마 제대로 승부를 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가 두 차례 홈런으로 이어졌습니다만 승리에는 지장이 없었으니까요.]
[사사하라의 조기 강판에 이어 불펜의 난조, 특히 WBC의 세 타자 의무 상대 규정으로 뜻밖의 대량 실점을 허용했던 일본 투수진. 그 결과로 예상보다 빠른 한일전이 벌어지게 된 이곳 도클랜즈 스타디움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찔러 본다. 여기서 완전히 물러서는 피칭을 해서는 타석이 반복될수록 승부가 어려워질 뿐이야.’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2구.
슈욱!
또 한 번 포심 패스트볼.
퍼어어어엉!
미타니의 배트는 여전히 침묵했다.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좌타자 바깥쪽을 찌르는 포심 패스트볼, 미타니는 또 한 번 지켜봅니다! 연이은 스트라이크로 카운트를 완벽하게 앞서 나가는 구강혁! 그리고 2구째는 98.4마일, 시속 158킬로미터가 기록됩니다!]
[아, 정말 잘해 주고 있습니다! 역시 구속 측면에서는 지난 등판에도, 앞선 두 타자와의 승부에도 어느 정도 완급 조절을 하고 있었던 게 맞네요. 이렇게 되면 미타니도 미타니지만 다른 일본 타자들로서도 머릿속이 복잡해지죠?]
또 한 번 공을 돌려받은 구강혁이 이번에는 세심하게 미타니의 표정을 살폈다.
‘고개를 끄덕인다.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는 건가?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는데.’
[……앞서 일본 타자들의 대표적인 장점으로 정교함과 주력을 꼽아 주셨습니다만, 사실 4번 타자 키시모토와 5번 타자 카네코가 올 시즌 NPB에서 보여 준 해결사 능력을 감안하면 아무리 2아웃을 먼저 잡아낸 상황이라고 미타니에게 출루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단타도 위험할 수 있죠. 미타니는 이번 대회에서 지명 타자로만 출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24시즌의 미타니 쇼헤이는 역사상 최고의 지명 타자였다는 찬사와 함께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꼈고요.]
[작년부터 다시 투타겸업에 나서며 도루 시도 횟수부터가 줄어든 미타니. 물론 이번 대회에서도 지금까지는 도루를 시도한 적이 없습니다.]
[어쨌든 부담은 있으니까요. 지명 타자로만 출전하는 것부터가 소속팀인 다저스와 일본 대표팀의 합의에 따른 사항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죠. 투타 양면에서 활약하는 미타니를 볼 수 없어 아쉬워하시는 팬들도 제법 계시고요.]
[투타겸업을 하는 미타니가 위대하다면, 타자로만 뛰었던 미타니는 경이로운 존재였습니다.]
[타격 이후로는 모든 것을 발로 해결해야 하는 게 타자들이고, 그런 면에서 호타준족이라는 표현이 최고의 찬사로 꼽히는 건데…… 미타니는 그 호타준족의 화신과도 같은 선수예요. 토너먼트부터는 도루 시도, 분명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지금의 카운트가 갖는 의미가 더 크겠군요. 조금 긴 템포로 투구를 준비하는 구강혁, 이제 3구째.]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3구째.
슈우욱!
이번 선택은 체인지업.
코스는 2구에 이어 다시 한번 바깥쪽.
퍼어어엉!
“!”
여기서 처음으로 미타니의 배트가 움직였다.
‘이야, 이 공을 참아?’
움직인 직후에 멈추기는 했지만.
‘역시 다르다.’
주심은 침묵했다.
[……이번에는 바깥쪽 체인지업, 그러나 미타니의 배트가 도중에 멈춥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볼 판정이 나오나요? 지금 보기에는 마지막에 크게 떨어지기는 했어도 존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스치지 않았나 싶은, 그런 좋은 공이었는데요. 일단 ABS 챌린지에는 신중한 모습을 보이는 배터리네요.]
‘……하지만 스탠스도 그렇고, 연이은 바깥쪽 공에 결국은 반응을 한 것도 그렇고. 기본적으로는 바깥쪽을 열어 주면서 기술적으로 타격하겠다, 그런 의도겠지. 그래도 의식은 해 주니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구강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 타석에서 미타니는 본인의 기본적인 스탠스에 비해 홈 플레이트에서 반 발짝가량 멀게 선 상태.
‘2구째까지를 지켜본 건 적응만 한다면 칠 수 있다, 그런 자신감 때문이었겠지. 반대로 어중간한 구속이나 애매하게 빠지는 궤적으로는 타격을 허용할 가능성이 높아.’
기본적으로 몸쪽 공을 최대한 억제하려는 스탠스인데, 그러면서도 방금 3구째의 반응에서는 바깥쪽 코스로 들어오는 공이라면 얼마든지 쳐내겠다는 의도가 보였다.
‘체격 조건부터가 까다로운데 타격 재능도 세계 최고 수준인 타자다. 던질 곳이 없다는 건 이런 타자를 상대할 때의 이야기였나? 벌써 두 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 뒀는데도 이렇단 말이지.’
글러브로 입을 가린 구강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누가 상대든 마찬가지다. 나는 1이닝만 던지고 내려가려고 선발로 등판한 게 아니야. 다음 타석까지 감안한다면, 저 승부수를 제대로 깨 줄 필요가 있지.’
다음으로는 한준구의 사인에 고개를 저었고, 다시 한 번을 더 저었다.
‘안타를 허용할 가능성을 감안하고라도, 내가 언제든 허를 찌를 수 있는 투수라는 점을 똑똑히 보여 준다.’
[……원 앤 투의 카운트, 신중하게 다음 공을 고르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배터리.]
[투구 템포가 리그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굉장히 빠른 구강혁인데, 지금만큼은 아주 차분한 모습입니다. 중요한 건 투수 본인이 가장 자신 있는 공을 던지는 거예요.]
그렇게 이어진 4구째.
슈욱!
미타니의 배트가 매섭게 돌았다.
부우우웅!
구종은?
슬라이더였다.
피칭 직후 물 흐르듯 필딩 포지션을 취하면서도 구강혁의 시선은 계속해서 미타니에게 고정된 채였고, 구강혁의 판단대로 상대의 노림수는 바깥쪽 공이 맞았다.
때문에 포심 패스트볼과 구분이 불가능한 투구 폼에서 나오는, 오늘 경기에서 좌타자를 상대로 처음 던지는 슬라이더는 허를 찌르는 선택지가 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이미 타격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에도 미타니는 가볍게 무릎을 굽히며 스윙 궤적을 컨트롤했고…….
따아아악!
그 결과.
타격이 이루어졌다.
[……4구째, 타격! 잡아당긴 타구!]
[아, 지금은 타구가 좀 큰데요! 지금 미타니가 대단히 기술적인 타격으로 구강혁의 슬라이더에 대응했어요!]
[우익수 한유민이 이 타구를 쫓아갑니다!]
자신의 머리 위로 높게 뻗어가는 타구를 잠시 바라보던 구강혁이, 곧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그렇게 시원하게 날아가던 타구는…….
결국 포물선을 그리고는, 한유민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한유민이 워닝 트랙 바로 앞에서 이 타구를 잡아냅니다! 등골이 서늘한 큰 타구, 그러나 대한민국 대표팀의 우익수는 한유민! 그리고 삼자범퇴를 완성하는 구강혁, 야마모토, 이토, 미타니로 이어지는 타선을 순식간에 잠재웁니다!]
[어우, 제가 다 심장이 쿵쾅거리는데요? 지금도 낮은 코스로 잘 들어갔는데, 이 허를 찌르는 슬라이더에 대응해 이만큼 큼지막한 타구를 만들어 낸 미타니도 정말 대단합니다.]
삼자범퇴.
1회초의 투구수는 단 7구.
구강혁이 마운드를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조금만 높은 공이었으면 넘어갔다…….’
노재완이 소리쳤다.
“어우, 깜짝이야!”
김휘강도 말했다.
“공 쪼개지는 줄.”
김하석은 어깨를 한 번 툭 두드렸다.
“좋았다, 강혁아.”
“하하, 네.”
구강혁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보통은 그렇게들 생각하겠지. 안타는 몰라도 담장까지 넘길 만한 공은 애초에 아니었는데. 뭐, 생각보다는 타구가 멀리 뻗어 간 것도 사실이야.’
그렇게 더그아웃으로 향하던 구강혁은 잠깐 시선을 느낀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본인은 잘 알겠지, 결과만이 아니라 내용을 따져도 이번 승부는 깔끔하게 졌다는 거. 다음 타석에는 정상적인 스탠스로 들어올 수밖에 없을 거다.’
마찬가지로 원정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던 미타니와 잠깐이지만 분명하게 시선이 마주쳤고, 구강혁이 슬쩍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무튼 역시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달라. 잡아낼 때의 느낌까지도 말이지. 삼진으로 잡아내면…… 더 짜릿할 테고.’

* * *

미타니의 큼지막한 타구가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삼자범퇴로 일본 대표팀의 첫 공격 이닝이 종료된 후.
1회말, 마운드에는 야마카와가 올랐고, 관중들은 이에 뜨거운 함성으로 호응했다.
“인기 많네. 쟤 원래 호주 사람이냐?”
“아닐걸요.”
“일본인들이 더 많이 와서 그런가.”
“어쨌든 메이저리거잖아요?”
“인기 구단이지, 다저스는.”
“평범한 투수도 아니고 상위 선발이기도 하고.”
다른 선수들이 이런저런 감상을 쏟아내는 사이, 구강혁도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그래도 매치업이 재밌는데요. 첫 타석부터.”
“응?”
“정우랑 하석 선배요. 기사도 몇 개 나왔는데?”
“아, 자이언츠랑 다이언츠 라이벌리?”
일본 타선에서는 미타니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관심을 받는다면, 대한민국 타선에서는 이정우와 김하석의 자이언츠 듀오가 시선을 끌었다.
무엇보다 오늘의 8강 2경기는 한일전이라는 상징성을 가지는 동시에,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몇몇 선수들에게는 또다른 측면에서의 동기부여가 만만찮은 상황.
이정우, 김하석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야마카와, 미타니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는 내셔널리그 서부를 대표하는 라이벌 구단.
연고지 간의 감정도 좋다고 보기 어려운 데다 워낙 역사가 긴 라이벌리로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적지 않았다.
양팀의 우위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는데, 21시즌의 치열한 지구 순위 싸움과 사상 최초의 디비전 시리즈 맞대결, 그 맞대결에서의 5차전 접전은 무척 뜨거웠지만…….
이후로는 다저스의 명백한 우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구강혁이 웃으면서 말했다.
“중요하잖아요? 동기부여는.”
“그,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