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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소리를 듣기 무섭게 내 사무실로 찾아온 게오르기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품에서 꺼낸 휴대용물통을 꺼내 들었다.

“이거 말이요, 이거.”

술을 물처럼 마신다는 러시아인답게 물통 안에 든 것은 술이었다. 그것도 아주 화끈한 독주.
잔에 따라 마시니 목에서 불이 날 것 같았다.
주정 그대로의 원액을 삼키는 기분.
목젖을 때리는 엄청난 타격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떻소! 이게 러시아의 맛이요!”

기가 막혔다.
이게 러시아의 맛은! 수출용 두꺼비 소주의 도수를 엄청나게 높여서 만든 술을 러시아의 맛이라니!
마피아답지 않게 멀끔한 외모의 게오르기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알류신 똘마니들이 재미있는 짓을 벌였소. 감히 내 물건을 도둑질해 간 다음에 정제했더군. 이게 그 물건이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라진 두꺼비 소주로 도수를 높였다는 게 뭐 어쨌단 말인가.

“그래서요?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우리가 물건을 넘기면 그걸로 끝 아닙니까?”
“그래서 요는, 이걸 만들어 달라는 소리요. 75도짜리 진짜 보드카를 말이요.”

러시아에선 소주를 보드카로 부른다고 들었다. 기본적으로 만드는 방법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보드카나 소주 모두가 곡물을 가공, 증류해 만들어 내는 술이다.
두꺼비 소주 같은 희석식 소주는 원하는 알코올 도수를 만드는 건 쉽다.
그만큼 물을 덜 타면 된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잠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게오르기가 대뜸 말했다.

“이 술을 만들어서 수출한다면 내가 10불을 내지. 초도물량은 천만 병으로 시작하고. 잘 팔리면……. 아니 이게 실패할 리가 없지, 이천만 병으로 시작합시다. 다만 전부 달러로 지급할 수는 없고 절반은 달러로 나머지는 루블로 결제합시다.”

러시아 불곰답게 밀고 당기기가 하나 없이 화끈하게 나왔다.
다 좋은데 결제조건이 조금 걸렸다.
1998년에 시행된 러시아 화폐개혁은 루블화를 1,000분의 1로 줄였다. 이것은 1달러에 6,000루블까지 치솟았던 미친 환율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였다.
이후로 1달러에 30루블 선에서 안정되고 있지만, 루블화 거래를 크게 선호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써먹을 곳이 적어서 따로 달러로 바꾸는 비용이 드는 탓이다.

“화끈하시군요. 그런데 지금 엄청나게 바쁘지 않나요? 이렇게 찾아오실 시간이 있을까 싶습니다. 지방에서는 장갑차까지 동원해서 화끈하게 붙었다고 들었는데요.”

이겼지만 뒤처리까지 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다.

“바쁘기는, 일은 밑에 놈들이 하는 거지. 푸틴이 눈감아 주기로 했으니, 정부와도 문제가 없을 테고.”

이 자식! 처음부터 어디서 많이 본 기분이 들더니 나와 같은 과였다.
그래! 일은 밑에 놈들이 하는 거지.
화끈하게 딜을 해 왔으니 나도 확실하게 답을 주었다.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시면 원하시는 물량을 맞춰드리지요.”
“부탁! 그게 뭐요?”

내 반응을 기다리던 게오르기가 대뜸 물었다.

“우크라이나의 곡물 업자를 소개받고 싶습니다.”

의외의 말이었는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내 탁자를 쳤다.

“우크라이나의 곡물 업자라면 내가 잘 아는 놈이 있지. 그런데 어쩐 일로 곡물 업자를 소개해 달라는 거요?”
“회사를 이곳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가지고 있어서요. 그곳에서 대량의 곡물이 필요합니다.”
“다른 회사라?”

게오르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 회사를 들은 바가 있지. 설렁탕면이라고 하던가? 그 제품도 우리 러시아에서 인기가 많다고 들었소. 술을 먹고 다음 날 해장용으로 아주 그만이라고 하더군.”

술 좋아하는 러시아인답게 모든 게 술로 연결이 되었다.
라솔은 보드카를 마시고 난 다음 아침에 끓여 먹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해장 음식이다. 양배추와 오이피클을 절인 것을 수프로 끓인 것이다.
맛이야 그냥 만드는 방법을 듣기만 해도 없게 생겼다.
그런 것을 먹다가 설렁탕면을 먹으니 확실히 잘 팔릴 수밖에. 끓이기도 엄청나게 간단하지 않은가 말이다.
설렁탕면이 러시아에서도 불티나게 팔린다더니 식사용이 아니라 해장용이었다.

“저도 들었습니다. 러시아에서도 잘 팔린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내가 수입하고 싶소.”
“그건 제가 관여할 바가 없는 사업이라.”

우크라이나의 밀을 수입해서 곡물 수입선을 다변화하려는 생각이었는데 게오르기의 요구는 쉽게 답하기에 곤란했다.
기존 수입상의 문제도 있고.

“러시아 쪽 곡물 수출회사는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원하면 하는 거지.”

레드마피아다운 말이었다.

[마스터, 이번 항쟁은 러시아판 범죄와의 전쟁입니다. 연방 내무군까지 동원해서 조직을 깡그리 부숴 버렸습니다. 게오르기는 얼굴마담이고요. 바쁠 이유가 없습니다.]

게오르기가 항쟁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여유가 어디서 생겼는지 알겠다.

“러시아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긴 하나 봐.”
[자료를 보니까 대낮부터 술 마시는 게 일상이더군요. 심지어는 고르바초프의 실각 원인이 금주 정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고요. 밀주 문제는 심각한가 봅니다. 금주 정책을 펼치자, 향수, 산업용 알코올, 살충제를 정제해서 술을 만들어 마셨다고 하니까요. 자칫 눈이 멀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도 부지기수인데도 술 마시기를 포기하지 않았답니다.]
“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나는군.”
[추운 러시아에서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습관 같습니다.]
“차가운 몸을 녹이는 데는 술만 한 개 없긴 하지.”
[많이 경험을 한 사람 같습니다.]
“개척 행성은 혹독한 기후가 대부분이야. 너무 덥거나 너무 춥거나, 둘 중의 하나지만 추운 경우가 더 많아.”

모든 것이 얼어붙은 작업환경에서 일을 마치고 나면 마시는 술 한 잔이 유일한 낙이었다.

“넘겨준 샘플은 분석했어? “
게오르기는 아쉬운 듯 샘플을 남기고 갔다.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달라는 소리였다.

[분석해 보니 추가된 성분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냥 생산하면 되겠네. 안정화 작업도 크게 필요 없을 테고.”
[마스터, 이번 제품에 첨가제를 사용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첨가제라?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나 보네? “
[브라바트 행성인들이 즐겨 마시는 술 있잖습니까. 마에흐르트요.]
“마에흐르트라? 꽃향기가 강한 술이지? 나도 즐겨 마셨던 술이지.”
[꽃 이름을 고스란히 가져와서 술 이름에 붙였다더군요.]
“좋은 술이긴 하지, 그런데 그걸 여기서 만들 수 있나? 마에흐르트는 지금 지구에 없는 꽃이잖아?”
[기록을 보니 찔레꽃의 변종이랍니다. 유전자 조작을 조금 하면 비슷하게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천연으로 키우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시제품에는 똑같은 화합물을 쓰겠습니다.]
“러시아인들이 그걸 좋아할까? 화합물로 만드는 게 가능하다면 굳이 찔레꽃 변종을 키울 필요가 없잖아?”
[서사가 다르지 않습니까! 서사가요. 고급술로 팔려면 한국에서 마에흐르트를 재배하는 농가를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희귀종 식물에서 추출한 재료로 만든 술이라니 세계적으로 성공 확률이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고급 소주로 팔려면 그만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
[당연한 소리죠.]

아리엘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두꺼비 소주가 제아무리 탈바꿈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국가에서 배정한 싸구려 주정을 이용한 술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우리가 직접 마에흐르트를 만들자.”

이리엘이 마에흐르트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맛을 기억하는 내 입에서 저절로 침이 흘러내렸었다.
마에흐르트는 우주적으로 유명한 술이다. 마에흐르트가 브라바트 행성의 특정 지역에서만 자라는 꽃이라 수요에 비해 만드는 양도 작았다. 가격도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천문학적인 가격.
나야 우주 제일의 재벌이었으니 해마다 일정량을 받아서 주변에 뿌렸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도 마에흐르트를 좋아하셨다.
내가 선물하면 주변에도 나눠 주고 아껴서 마시곤 했다고 조르쥬에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