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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게 미미르 아카데미에서 4권(완결)
발행일  2025년 06월 24일
지은이  구름파이
표지 그림  파이라이트
타이틀 디자인  말랑콩떡
펴낸곳  피크
투고/문의   peak1@peaknovel.co.kr
블로그   peaknovel.co.kr
트위터   twitter.com/novel_peak
ⓒ구름파이, 2025
ISBN 979-11-7450-004-5        979-11-7450-000-7 (세트)
* 이 전자책의 전부 또는 일부 내용을 재사용하려면 사전에 저작권자와 피크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다음 날 아침, 루나는 눈을 뜨자마자 크게 심호흡부터 했다. 머릿속으로는 어제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더는 어제의 그 두근거림은 없었다. 두 뺨도 그리 뜨겁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루나는 크게 안도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레이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던 것은, 어젯밤 두 사람을 환하게 비추던 달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 맞아. 달빛 때문이야. 그게 아니면 불꽃놀이 때문이든지. 게다가 레이 군이 날 병동까지 데려다주기도 했으니까, 고마워서 순간 착각한 거야. 그러니까 너무 의식하지 말자. 내가 이상하게 행동하면, 레이 군도 싫어할걸.’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레이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낸 다음, 루나는 리사와 함께 등교 준비를 마쳤다. 오늘부터 정상적으로 수업이 시작될 예정이었고, 이제 루나는 일상을 되찾아야 했다.
식당 앞에서 크리스와 휴이, 레이를 기다리는 동안, 루나는 리사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온 루나가 잠들 때까지, 리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꽤 늦은 시간까지 크리스와 함께 있었던 듯했다.
“그럼 결국 아놀드 군은 못 만나고 불꽃놀이가 끝나버린 거네? 아쉬워서 어떡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큰 소리로 탄식하는 친구를 향해, 루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레이 생각을 하느라, 아놀드를 만나려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다.
“괜찮아. 어쩔 수 없지, 뭐.”
“기운 내, 루나. 또 좋은 기회가 생길 거야.”
루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리사가 부드러운 손길로 루나의 손끝을 토닥였다. 하지만 루나는 리사의 위로가 고마우면서도, 리사가 아쉬워하는 만큼 아놀드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크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아니, 서운하기는커녕, 정말로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나 아놀드와 함께 하는 축제를 꿈꿨는데. 루나는 변해버린 듯한 제 마음에 내심 당황하며,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럼 이제 리사 이야기도 들려줘. 리사는 크리스랑 함께 불꽃놀이 구경했지? 어땠어?”
“아, 그게….”
다시 생각해도 몹시 설렌다는 듯, 리사가 두 뺨을 붉히며 대답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크리스랑 계속 함께 있었어. 호숫가에 갔거든. 도착하자마자 첫 번째 불꽃이 터지는데…. 있잖아, 좋아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한다는 이야기 말이야. 그 이야기를 전부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 근사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어.”
“와, 너무너무 낭만적이잖아!”
루나는 환하게 웃으며 리사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틀림없이 크리스도 기쁘고 행복했을 거야. 여자친구와 함께 뜻깊은 시간을 보낸 거잖아. 정말 잘됐어. 축하해, 리사.”
“고마워, 루나.”
리사가 붉게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루나도 다음번에는 꼭 아놀드 군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거야. 아직 기회도 많이 있으니까, 내가 도와줄게.”
“고마워. 나도 리사에게 지지 않도록 할게.”
루나는 웃으며 리사와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하지만 감사 인사를 정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루나의 마음은 전혀 엉뚱한 곳을 향해 있었다.
‘왜 자꾸 레이 군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이 마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루나 자신도 확실하게 알기 어려웠다.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지금까지 계속 아놀드를 좋아했고, 아놀드와 함께하고 싶었고, 또 아놀드에게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왜 지금은….
“크리스!”
이런저런 생각들로 루나의 마음이 잔뜩 복잡해졌을 때, 리사가 남학생 기숙사 방향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저 멀리 크리스와 휴이, 레이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
“리사 양, 루나 양, 좋은 아침.”
크리스가 인사를 건네자, 휴이도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러자 레이도 고개를 들어 루나를 바라보았고, 붉은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루나의 가슴은 터질 듯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루나,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런 루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는 듯, 리사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루나의 얼굴을 살폈다. 루나는 붉게 물든 뺨을 두 손으로 가리며 황급히 얼버무렸다.
“아, 아냐, 아프긴. 아무것도 아냐. 리사, 나 급한 일이 생각났어. 아침 먼저 먹어.”
“어? 갑자기?”
“미안해. 나중에 보자!”
당황하며 붙잡으려는 리사에게 손을 흔들어 준 다음, 루나는 재빨리 뒤돌아서 달려갔다. 크리스와 휴이, 레이에게는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도저히 레이와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 * *
모두와 헤어져서 터덜터덜 속성 마법사 교실로 향하는 동안, 루나는 제 마음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마치 어젯밤 이후로 모든 게 변해버린 것 같았다. 레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다. 눈만 마주쳐도 두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이 감정은 루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에이, 말도 안 돼.”
루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레이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레이도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황당하게 여길 게 틀림없었다.
“뭐가 말도 안 되는데?”
한숨을 살짝 내쉬며 교실 문을 열려는데, 누군가가 루나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루나는 화들짝 놀라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리고 말을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자, 루나의 얼굴은 또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레, 레이 군?”
다름 아닌 레이가 한 손에는 가방을 든 채, 다른 한 손에는 루나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서 있었다. 급히 뒤따라온 듯 두 뺨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고,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루나는 몹시 당황하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어, 어떻게 왔어? 아니, 아침 식사는…?”
“별로 생각이 없어서.”
레이가 짧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뭔가를 깨달은 듯 황급히 루나의 소맷자락을 놓더니, 다시 말을 걸었다.
“무슨 급한 일이길래 인사도 안 하고 그냥 가버려?”
“그게… 저기… 아무것도 아냐. 미안해.”
루나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우물거렸다. 지금은 레이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볼 수도, 다른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러자 루나의 대답이 시원치 않게 느껴졌다는 듯, 레이가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무슨 일인데? 아직 몸이 안 좋아?”
“아니, 정말로 괜찮아.”
루나는 힘껏 고개를 저으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레이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루나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두근거렸다.
“그게, 그러니까….”
“루나 양, 안녕!”
그때 복도 끝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리더니, 에일리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화제를 돌릴 수 있음에 안도하며, 루나도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안녕, 에일리 양. 잘 잤어?”
“응, 루나 양은 어때? 몸은 좀 괜찮아?”
에일리가 두 손으로 루나의 손을 잡더니,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그러자 말없이 루나를 보던 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툭 내뱉듯 말하더니, 그대로 루나를 지나쳐서 교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자, 에일리가 화들짝 놀라며 닫힌 문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제야 레이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미, 미안해, 루나 양. 이야기 나누던 중이었구나. 내가 방해한 거 맞지?”
“…아냐, 괜찮아.”
루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얼핏 스쳐 지나간 레이의 눈빛이 너무도 차갑게 느껴져서,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유 없이 피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미안해서 어떡해.’
레이에게 상처를 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속 깊은 곳이 따끔거렸다. 그저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랬던 건데. 미움받고 싶지는 않았는데.
“정말 괜찮아. 에일리 양, 우리도 교실로 들어갈까?”
그런 루나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에일리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 주며, 루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더 사이가 멀어지기 전에 레이에게 사과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 *
올리버의 조례가 끝나고, 루나는 레이부터 찾았다. 일단 레이와 화해부터 한 다음에, 제 마음을 다시 생각해 보고 싶었다.
레이는 뒷문 바로 옆자리에 휴이와 나란히 앉아있었다. 루나는 숨을 크게 들이킨 다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레이 군.”
그러자 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서먹하게 느껴지는 붉은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자 옆에서 루나와 레이를 번갈아 바라보던 휴이가 아, 하며 중얼거리더니 책상을 툭 쳤다.
“그러고 보니 잉크가 다 떨어졌네. 나 잠깐 아카데미 상점에서 잉크 사 올게. 루나 양, 레이랑 이야기 나누고 있어.”
“아, 응. 다녀와.”
휴이가 손을 흔들어 주더니 콧노래를 부르며 교실을 나섰다. 아마도 눈치 빠른 휴이가 루나와 레이를 위해 자리를 피해 주는 듯했다. 루나는 휴이에게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건넨 다음, 다시 레이에게 말을 걸었다.
“레이 군, 바쁘지 않으면 잠깐 나랑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나, 레이 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뭔데?”
“그게, 조금 전에 말이야. 내가 자꾸 이상하게 행동해서, 많이 서운했지?”
루나의 말이 의외라는 듯 레이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루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재차 사과의 말을 건넸다.
“생각해 보니까, 레이 군이 기분 나빴을 것 같았어. 서운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러자 레이가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아니, 서운한 건 아니고… 그냥, 나랑 말하는 게 싫었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어.”
“레이 군이랑 이야기하는 게 싫다니, 말도 안 돼.”
루나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여전히 의아한 듯한 눈길을 보내는 레이에게, 조례 시간 내내 생각해 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게, 사실은… 부끄러워서 그랬어.”
* * *
“어제 불꽃놀이 구경할 때 했던 이야기 말이야. 어렸을 때,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어서 크리스를 흉내냈다는 거, 사실은 아무한테도 들려준 적 없는 이야기였거든.”
“…그래서?”
레이가 조용히 되물었다. 루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혼자 생각했더니, 속에 담아뒀던 말을 너무 많이 털어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아, 물론 레이 군에게 들려주기 싫었다는 뜻은 아니야. 그냥, 어린 시절의 철없던 행동을 생각하니까 부끄러워서… 그래서 그랬어.”
레이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낸 것이었지만, 설명할수록 그런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그러자 루나의 말을 듣던 레이가 납득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런 이유였다면 됐어.”
“정말? 그러면, 레이 군, 이제 서운한 마음은 다 풀린 거 맞지?”
“서운한 건 아니었다니까. 그리고, 어렸을 때는 누구나 가족을 닮기를 원하는 법이니까,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마.”
레이가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루나를 향해 짓는 레이의 옅은 미소가 너무도 눈부셔서, 루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야만 했다.
루나는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쿵쿵 뛰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래도 이 감정은 루나가 생각했던 그 감정이 맞는 듯했다.
* * *
축제가 끝난 이후로, 고급반 학생들은 일상을 되찾았다. 평소처럼 수업을 들었고, 마법을 연습했고, 또 담당 교사들이 내준 과제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루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아카데미 생활에 충실해지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루나의 노력과는 다르게, 마음은 계속해서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놀드 군인걸….’
아놀드와 함께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괜히 웃음이 나왔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면서도,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레이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 설마 두 사람을 동시에 좋아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더더욱 마음이 복잡해졌다.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한 듯한 기분에, 레이와 아놀드에게 괜한 죄책감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나고, 또다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월요일 저녁, 리사가 치유 마법사 학생들과 조별 모임을 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루나는 속성 마법 이론 과제를 하기 위해 기숙사를 나섰다.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에 파묻힌 채 마법 공부를 하다 보면, 복잡한 마음도 조금은 정리될 것 같았다. 그리고 교양관에서 도서관으로 향하는 구름다리 위에서, 루나는 아놀드를 발견했다.
“…아놀드 군?”
아놀드는 난간에 턱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루나가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가자, 아놀드가 고개를 돌려 루나를 바라보았다.
“아, 루나 양.”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그냥, 날씨가 좋아서 바람 쐬고 있었어. 루나 양, 저기 참새들 좀 봐. 무슨 심각한 회의라도 하는 거 같지 않아?”
아놀드가 작게 웃으며 구름다리 아래로 보이는 메마른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나뭇가지 끝에는 아놀드가 말한 것처럼 참새 서너 마리가 앉아있었다.
하지만 장난스러운 말투와 다르게, 아놀드의 검은색 눈동자는 어쩐지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루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놀드 곁으로 다가가서 나란히 섰다.
“저기, 아놀드 군.”
루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아놀드가 참새 무리에서 시선을 떼더니 의아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루나를 바라보았다.
“응? 왜, 루나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