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한 남주와 하룻밤을 보냈다 1권
지은이 : 진너굴
펴낸곳 : 필연매니지먼트
E-mail : feelyeon2015@gmail.com
정가 : 2,700원
ISBN : 979-11-7294-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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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한 남주와 하룻밤을 보냈다
1권
진너굴
목차
Chapter. 1
Chapter. 2
Chapter. 3
Chapter. 4
Chapter. 5
Chapter. 6
Chapter. 1
“긴장했습니까?”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아니요.”
“목소리가 떨립니다, 에스텔.”
다정한 음색에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예술가가 만든 조각처럼 완벽한 비율의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고요한 호수처럼 깊은 푸른 눈동자와 빛을 받아 요정처럼 빛나는 은발.
지나가다가 멈춰 설 정도로 매력적인 얼굴의 남자는 목까지 올라온 제복을 입고 있어서 금욕적이기까지 했다.
이런 미인을 남편으로 맞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다.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만 아니었다면 기뻐 춤을 췄겠지.
“네, 사실 떨려요.”
그 사실과 별개로 결혼을 앞둔 지금은 떨리고 긴장되었다.
어쩌면 내 평생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린 순간이 아닌가 싶었다.
이게 맞는 선택인 건지 고민하는 사이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움찔 몸을 떨고 남자를 올려다보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럼 같이 손을 잡고 나가요.”
“예?”
“사실 저도 떨리거든요.”
옅은 미소를 띤 얼굴이 전혀 떨려 보이지 않았다.
떨떠름한 내 표정에도 그는 팔짱을 빼고 손을 내밀었다.
“어서 잡아요.”
조금이라도 달라붙고 싶어서 하는 말인 게 뻔히 보였다.
망설이던 난 그의 손에 내 것을 올렸다.
조금 서늘한 손가락 끝이 손등을 문질렀다.
늘 불편하기만 하던 남자인데 오늘은 든든하게 느껴졌다.
“긴장하지 말고, 그냥 가벼운 연회에 왔다고 생각해요.”
“그 연회가 알고 보니 내 결혼인데 말이죠.”
“결혼보다는, 가족에게 하는 복수극이라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그의 말과 동시에 입장을 알리는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통상적으로 흰색 꽃으로 장식하는 결혼식과 달리 잎이 넓은 열대 지방 식물로 장식해서 이국적이었다.
아마 내가 이 결혼식의 신부가 아니었다면 신기하다며 구경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바로 저 하객들처럼.
그리고 그 하객들 사이에서 날 죽일 듯이 노려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던 사람들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 시선을 눈치챈 듯 남자가 속삭였다.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 계약 반드시 지켜야 할 거예요.”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더는 물릴 수도 없었다.
난 그의 손을 꽉 잡고 앞으로 나섰다.
누구 하나 축복하지 않는 이 결혼식의 웨딩 로드를 남자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었다.
“교단 사람들도 표정이 안 좋은데요.”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원래대로라면 당신이 아니라 성녀와 결혼했어야 했을 테니까요.”
갑자기 따가운 시선들이 반갑게 느껴졌다.
드디어 우리의 결혼을 반기는 주례 앞에 섰다.
별로 길지 않은 주례가 끝나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럼 맹세의 입맞춤이 있겠습니다.”
주례의 말에 우린 서로를 바라보았다.
입맞춤까지 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과 다름없었다.
남자가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옷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원작에서 탈출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망쳐 버리는 게 답이겠지.
“물론이에요.”
붉어진 입술을 손등으로 누른 채 물러서는 남자를 보며 난 활짝 웃어 보였다.
***
내가 빙의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성인이 되었을 때였다.
언제나처럼 평범하게 서재에서 책을 고르던 나는 불현듯 이 세계가 낯설어졌다.
익숙하던 것들에서 느껴지는 어색함.
그리고 간간이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에서 느껴지는 기시감.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정체를 약혼자의 초상화가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소설, [오직 하나뿐인 반려]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조신해 보이는 제목과 달리 차기 성녀인 시에라가 주인공인 역하렘 소설이었다.
내용의 대부분이 살색이 난무해서 스토리도 별거 없었다.
어느 날 신탁을 받은 시에라가 세계를 주름잡는 3명의 남자와 온갖 것을 다 해 보는 것이 내용의 다였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남자들이 시에라에게 목을 매는 이유는 하나였다.
시에라가 전무후무한 힘을 가진 반려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각성자’라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각성자들은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힘을 가졌지만, 패널티가 존재했다.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정신 오염이 진행되고 결국 이성이 붕괴되어 폭주하고 만다.
그런 각성자들의 정신 오염을 정화할 수 있는 반려가 존재했다.
이런 반려는 각성자에 비해 그 수가 적었고, 그들의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성당에서 관리했다.
게다가 각성자의 힘이 반려에 비해 월등히 강한 탓에 반려의 수명 또한 짧은 편이었다.
그런 세계에서 각성자를 셋이나 두고도 무병장수한 게 시에라였다.
차원이 다른 강력한 정화력.
그 정화의 달콤함에 남주들은 하나, 둘 함락되었고 시에라와 모두 함께 사는 엔딩을 맞이했다.
그 소설에서 약혼자, 렌나르트 베르하겐은 남주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런 남주의 첫 번째 반려가 바로 나, 에스텔이었다.
첫 번째 반려라고 하지만 렌나르트는 에스텔의 몸에 손 하나 대지 않았다.
결벽증 때문에 여자에게는 손도 대지 않던 렌나르트는 결혼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억지로 버티다가 결국 폭주하게 되고, 렌나르트를 말리던 에스텔은 그의 힘에 시신도 찾지 못한 채 증발해 버렸다.
결벽증과 자기 과신이 불러일으킨 대 참사였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려면 뭐다?
역시, 원작 파괴다.
원작을 떠올린 난 곧바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 저 파혼하겠습니다.”
“이상한 소리 할 거면 돌아가서 네 어머니 일이나 도와라.”
슈나이더 백작은 내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 자리에서 쫓겨난 난 내 상황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공작 부인이 되어 꽃길만 걸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 자리를 얼마나 반겼던가.
내 앞으로의 인생이 불행해지는 건 부모님들의 관심 순위에 없었다.
오직 베르하겐 공작가에서 받을 거한 지참금이 둥둥 떠다닐 뿐.
공작가에서 슈나이더 백작가로 지급될 품위 유지비는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 오라버니도 약혼했지.’
앞으로 돈 나갈 일만 남은 백작가에서 내 파혼을 찬성할 리가 없었다.
가족에게 난 베르하겐 공작가에서 돈을 받아 올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원작에서 에스텔이 친정인 슈나이더 백작가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는 하나였다.
슈나이더 백작가는 가난했다.
지금도 반려인 내 이름을 들먹이며, 공작가에서 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만약 중간에 파혼을 하거나, 이혼하고 백작가로 돌아간다면 그 돈을 다시 뱉어 내야 했다.
이자까지 쳐서.
파혼하려면 적어도 빚은 다 갚고, 백작가가 일어설 정도의 돈이 필요했다.
원작을 읽은 지 얼마 안 돼서 다행이었다.
미래를 아는 만큼 그걸 이용해서 돈을 벌 생각이다.
‘이번에는 최대한 오래 살 거야.’
지난 생에는 연애도 못 해 보고 스무 살에 죽었단 말이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남주를 위해 내 목숨을 거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
제일 먼저 한 일은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대체 그 많은 품위 유지비는 어디로 가는 거지?’
분명 내가 쓰라고 준 돈일 텐데 이상하게 수중으로 떨어지는 금액이 턱없이 적었다.
생각해 보니 매해 새로 드레스나 보석을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난 이미 약혼을 했다는 이유로 그 품위 유지비의 대부분이 오라버니에게로 갔다.
빙의 전, 아무 생각이 없었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이제부터라도 달라고 해 봐야 허락하지 않으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