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의 시대
오만의 시대
오만의 시대 [5권]

지은이 레몬개구리
발행일 2023년 10월 17일

펴낸곳 (주) 테라핀
홈페이지 http://www.copinnovel.com
전자우편 easycontents@terapinstudios.co.kr
등록번호 제 25100-2019-000007호

ⓒ 레몬개구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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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3,300원
ISBN 979-11-7086-477-6 [05810]
오만의 시대
15. 후회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오늘도 똑같은 꿈이었다.
성안 곳곳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버려진 땅의 야만족과 마물 떼가 튀어나온 그날, 그 싸움의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두르는 자신이 보였다.
아샤는 남일 보듯 자신이 휘두르는 검로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저기서는 좀 더 짧게 끊어서 베고, 그다음 달려들던 놈의 가슴을 한 번에 찌르는 게 더 나았을 뻔했지.’
물론 그때 그 순간에는 저게 최선이었다는 걸 안다. 그래도 싸우고 난 뒤에 이렇게 복기하는 건 앞으로의 싸움에 많은 도움이 된다.
‘앞으로, 라는 미래가 존재한다면 말이지.’
아샤는 한숨을 쉬었다.
“아샤! 이놈들, 확실히 뭔가 이상해. 전에는 이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었는데……!”
데커가 달려드는 피르족 전사를 베고 소리쳤다.
그건 아샤도 느끼던 바였다.
아샤가 겪어 본 야만족은 전부 어딘가 광기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놈들처럼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려! 이놈들이 성 밖으로 나가면, 그땐 끝장이야!”
그녀의 외침에 주변의 페르바즈 전사들과 사용인들이 모두 이를 악물었다.
쇠붙이가 부딪치고 둔기가 뼈를 으스러트리는 소리, 고통에 찬 괴성과 공포가 뒤섞인 비명이 귀가 멍해질 정도로 크게 울렸다.
“다 죽어라, 이놈들! 으아아아!”
“안 돼, 헥토르!”
“이쪽 보지 마세요, 영주님! 이번에도 페르바즈를 구해 주십쇼!”
치명상을 입은 헥토르는 자신의 마지막을 감지했는지 적들과 함께 3층 난간에서 추락했다.
헥토르는 보지 말라고 했지만, 아샤의 시선은 제멋대로 그의 마지막을 눈에 담고 말았다.
“헥토르!”
부하들이 시체를 뒤져 건졌다며 금붙이 몇 개가 든 주머니를 덜렁 내밀던 그가 떠올랐다.
“헥토르! 헥토……!”
“아샤! 뒤를 조심해!”
그녀에게는 측근을 잃은 슬픔을 제대로 느낄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크르륵, 컹!”
역겨운 입 냄새를 훅 끼치며 커다란 마물 한 마리가 그녀를 덮쳐들고 있었다.
“이 개새끼가!”
아샤는 늑대를 닮은 마물의 미간 한가운데 냅다 검을 꽂았다. 마물의 달려드는 힘 때문에 뒤로 한참이나 밀려갔지만, 아샤의 검에 즉사한 마물은 곧 바닥에 나뒹굴었다.
마물이 쓰러지기 직전에 검을 뽑은 아샤는 뺨에 튄 마물의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이를 갈았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눈알을 뽑고 사지를 찢어 놓겠다!”
가브리엘의 경고로 공격이 있을 거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바즈를 그야말로 전멸시키려 한 이 악마 같은 계획에는 같은 나라 국민에 대한 존중이 한 줌도 없었다.
예전부터 제국은 페르바즈에 무례했고 그럼에도 페르바즈는 인내했지만, 이제 더는 참아줄 수 없었다.
‘여기서 죽는다 해도, 악귀가 되어서라도 복수할 테니까!’
그 원한에 찬 심정 덕분이었을까, 아샤와 페르바즈 사람들은 불리한 전세를 뒤엎기 시작했다.
“영주님! 성수예요! 마법진에 성수를 뿌리면 됩니다!”
누군가가 마법진이 야만족을 토해 내는 걸 막는 방법을 알아내고는 마법진의 구동을 멈췄다.
적의 병력이 더 유입되지 않자 ‘끝이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이 사라졌다.
“놈들을 유인해!”
야만족과 마물은 이성을 잃고 무조건 공격해왔지만, 페르바즈 성의 구조를 잘 아는 아샤의 군대는 놈들을 난간 없는 발코니로 유인해 추락사 시키거나 구석에 몰아넣고 학살했다.
끔찍했던 전투에 빛이 드리우고 있었다.
“잘 가라, 이 악마 새끼들아!”
그리고 아샤가 마지막 피르족 전사의 목숨을 끊어 놓으려던 순간이었다.
{필레 카합!}
그가 벌게진 눈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쳤고, 그의 손바닥에서 검은 기운이 곧장 아샤를 향해 쏘아졌다.
“컥!”
그건 묵직한 검이 가슴 한복판을 관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샤! 아샤!”
근처에 있던 데커가 저를 향해 소리치는 게 들렸다.
‘대답해 줘야 하는데……. 데커 혼자 남겨 두고 갈 수는 없는데…….’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기 전에 데커에게 유언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성을 지켜 내라고.
그러나 입이 움직이기는커녕 온몸에 짙은 탈력감이 들면서 의식이 암전에 빠져 들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아버지, 도미닉, 노아, 빈센트……. 다들 어디 있어?’
페르바즈가 걱정되긴 했지만, 드디어 아버지와 형제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죽음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네 영혼을 바치거라. 달콤한 꿈을 꾸게 해 주마.}
{복종하지 않으면 너를 잘게 조각내어 아작아작 씹어 먹을 테야.}
희미하게 속삭이는 것 같던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제는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기라도 할 것처럼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어떤 때는 진득하게 감미로운 목소리였고, 어떤 때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방심시키듯 다정하기도 했고, 협박하듯 을러대기도 했다.
그러다가 잠이 드는 것처럼 의식이 없어졌고, 때때로 이렇게 꿈을 꾸는 것처럼 의식이 깨어날 때도 있었다.
이럴 때면 꼭 전투가 벌어지던 날을 꿈으로 꾸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했던 건, 아직 죽지 않았을 뿐이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꿈꾸는 시간이나 의식이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아샤는 자신이 악귀가 되어서라도 복수하겠다고 다짐한 것 때문에 악마가 찾아온 건가 싶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조금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샤……!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는 것 같았다.
‘누구지? 데커? 아버지? 니나?’
정확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간절한 염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지금 저를 절박하게 부르고 있다고.
그리고 그때부터 의식이 깨어나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고, 암흑이기만 했던 눈앞에 반딧불이가 떠다니는 것처럼 빛이 생겨났다.
‘이게 도대체 뭐지?’
아샤는 지금도 제 앞을 떠다니는 빛의 입자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늘어가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늘다 보면 언젠가 이 암흑이 사라질 것 같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아샤는 깨달았다.
‘아……! 누군가가 나를 살리고 있구나!’
야만족이 부린 이상한 사술에 당했으니 아마 다른 영지에 머물던 주술사나 신관을 데려온 거라고 짐작했다.
‘그래, 살자. 보란 듯이 살아남자.’
아샤는 또다시 의식이 흐릿해져 가는 순간에도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저를 살리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 * *
마차 한 대가 페르바즈의 도로를 급하게 달려 페르바즈 성 앞에 섰다.
성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자일스는 서둘러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아버지…….”
마차에서 내린 이는 도로테아였다.
그녀는 급하게 달리는 마차 안에서 며칠이나 시달린 탓에 진이 빠져 있었다.
“뭐 하느냐! 얼른 내리지 않고.”
“죄송해요. 조금…… 어지러워서.”
“쯧.”
아비가 혀 차는 소리에 어깨를 움찔한 도로테아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몸이 상한 건 정신으로 어떻게 구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휘청이며 크게 구를 뻔했다.
다행히 마차 문손잡이를 잡고 버틴 덕에 꼴사납게 구르는 건 면했지만 발목을 살짝 접질리고 정강이를 마차 발 받침대에 긁혔다.
아팠지만 이를 꾹 다물고 신음을 참는 그녀에게 자일스는 눈을 부라렸다.
“이게 무슨 추태냐! 스물셋이나 먹어 놓고 아직도 몸가짐이 서툴다니, 네 어미는 도대체 뭘 가르친 게야!”
“죄송해요. 정말로 어지러워서 그랬어요. 마차가 워낙에 흔들려서…….”
“쯧쯧. 똑같이 마차를 타고 왔는데 세실리아 듀프렛은 멀쩡하더구나. 너는 왜 이 모양이냐?”
도로테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리를 다친 딸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자일스의 뒤를, 고통을 꾹 참으며 따라 걸었다.
그러나 사실 자일스의 기분은 도로테아의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중요한 일 하나가 그의 계획대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세실리아 듀프렛이 황후 자리를 포기했다.”
자신의 방에서 도로테아와 둘만 남은 자일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네? 정말……이요?”
“그래, 사실이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왜……?”
도로테아는 황후가 되고야 말겠다는 야망에 불타던 세실리아를 떠올리며 의아해했다.
그러자 자일스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사실 포기했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지. 나와 함께 남부의 전쟁 문제에 개입한 일로 칼라일 전하의 미움을 사서 거절당한 거니까.”
‘남부의 전쟁 문제’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도로테아는 알지 못했지만, 칼라일이 듀프렛 백작가의 딸을 비 후보 자리에서 떨어트렸다면 그 문제가 보통은 아닐 것 같았다.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당분간 근신을 명받기는 했다만, 괜찮다. 어차피 칼라일 전하는 나를 버리시지 못해.”
급박하게 돌아가는 이 상황에서 책사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일스는 남부에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그런 것까지 계산에 넣고 있었다.
도로테아가 의아하게 여긴 건 세실리아와 자일스가 ‘함께’ 어떤 문제를 벌였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세실리아 양과 손을 잡으셨다고요?”
“그래.”
자일스가 어딘지 상쾌한 느낌마저 드는 어조로 인정했다.
도로테아는 세실리아만 보면 미워 죽겠다는 듯 이를 갈던 아비가 어떻게 그녀와 손을 잡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자일스는 씩 웃으며 답해 주었다.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