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각귀신과 이혼하는 법
총각 귀신과 이혼하는 법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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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총각 귀신과 이혼하는 법
* * *
 
다음 날 오전.
 
침대에 걸터앉아 무릎에 노트북을 받친 설희가 오랜만에 대본을 만지고 있었다.
 
‘한수호는 쉬고 있나?’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계속 조용한 거실 쪽이 신경 쓰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랫동안 영체 상태로 외로웠을텐데, 그런 사람 앞에서 제가 너무 희희낙락했나 싶어 미안해졌다.
엉덩이를 뗀 설희가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슬그머니 거실로 향했다.
수호는 소파에 일자로 기다랗게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한수호… 자?”
 
조심스러운 설희의 목소리에 수호가 눈을 바로 떴다.
 
“아니. 왜?”
“아 그게. 잠깐 대본 고친 것 좀 봐줄 수 있어?”
 
수호가 일어나 앉자, 설희가 얼른 옆자리를 차지하고 그에게 노트북 화면을 보였다.
스크롤을 내리면서 수호의 옆모습을 간간이 힐끔거리자, 수호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 말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해.”
“아…, 그게.”
 
잠시 입술을 감쳐물고 있던 설희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어제는 네 기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내 기분이라니?”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도 못 하고 나만 너무 신났던 거 같아서.”
 
모니터에서 눈을 뗀 수호가 옆에 앉은 그녀를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바보야, 네 사생활인데 그걸 왜 나한테 미안해해.”
“…그럼, 어제부터 왜 그렇게 얼굴이 죽상인데?”
 
설희가 서운한 얼굴로 그와 시선을 마주하자, 머뭇거리던 그가 힘겹게 내뱉었다.
 
“그냥. 내가 너무 무력한 것 같아서.”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설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수호가 다시 입을 뗐다.
 
“네가 위험해져도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어제는 영혁인지 뭔지가 있으니 다행이었지만.”
 
그 말에 어제 건널목 커브를 급하게 돌던 승용차가 생각났다.
 
“뭐야. 그런 걸 다 신경 썼어? 난 또 뭐라고.”
 
설희가 싱거운 소릴 한다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수호는 여전히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좋아하는 여자 하나 지키지도 못하고 뒤에서 바라만 보는 게 이런 기분인지 처음 알아서.”
“…어?”
 
갑자기 날아온 돌직구였다.
당황한 설희가 눈을 깜빡이고 입을 벙긋거리자, 수호가 피식 웃었다.
 
“처음 듣는 말도 아니고 언제까지 당황할 건데.”
“그, 그게…….”
 
그녀의 눈동자가 어색하게 옆으로 굴렀다.
어쩐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수호의 고백에 적응하지는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가 조심성이 부족해서 그런 건데 네가 괴로워할 게 뭐 있어. 네 말대로 영혁이도 있었고.”
 
그 말에 도리어 인상을 쓴 수호가 불퉁하게 내뱉었다.
 
“그게 더 마음에 안 들어. 그 상황에 네 옆에 있던 게 그놈이었다는 것이”
 
옆자리에 앉은 수호를 흘낏 본 설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질투하는 거야?”
 
고개를 돌린 수호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질투 안 하게 생겼어? 좋아하는 여자한테 다른 남자가 철썩 붙어서 꼬리를 살랑살랑 치는데.”
“…뭐?”
 
적나라한 표현에 설희는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하하. 그게 무슨 말이야, 걔가 무슨 여우도 아니고.”
 
크게 웃는 설희를 멍하니 바라보던 수호가 얼굴이 붉어진 채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동안 몰랐던 기분이라 신선하긴 하다. 그래도 썩 반가운 감정은 아니네.”
 
웃음이 잦아든 설희가 눈가에 살짝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영혁인 진짜 코흘리개 시절부터 보던 동생이라니까. 진짜 그런 거 아니야.”
“너, 네가 그놈 머리 쓰다듬어줄 때 표정 못 봤지?”
“어땠는데?”
 
수호가 입을 헤 벌리고 세상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딱 이런 얼굴로 헬렐레 좋아하고 있었다니까.”
“그건 그냥 바보잖아.”
“여하튼 다음부터 걔한테 그런 스킨십 할 생각 마. 남자들은 쉽게 오해하니까.”
 
어쩐지 평소보다 열을 올리는 수호를 보며 설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내가 걔 머리 쓰다듬은 것도 질투하는 거야?”
 
열변을 토하던 수호가 그대로 우뚝 멈췄다.
설희는 실시간으로 붉게 달아오르는 그의 얼굴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렇다면?”
 
그가 설희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틀자, 붉게 물든 귓바퀴까지 더욱 잘 보였다.
거실 유리창으로 밝은 햇살이 들이쳐 수호의 검은 머릿결에 더욱 윤기가 돌았다.
 
문득, 그가 자신을 구하려고 감싸 안은 날이 떠올랐다. 자신이 그를 밀쳐낸 것도.
 
‘…그러고 보니 이제 마음만 먹으면 한수호와 닿을 수 있구나.’
 
그는 제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 자신이 만지는 것은?
 
영혁의 머리 좀 건드렸다고 질투할 정도니, 설희의 손길을 거부하진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기다리는 듯했다.
잠시 망설이던 설희가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머리에 얹었다.
 
수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설희가 아주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처음 만져본 수호의 머리카락은 아주 부드럽고 섬세한 원사 같았다.
 
“이게 뭐 별거라고, 질투를 다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