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각귀신과 이혼하는 법
총각 귀신과 이혼하는 법
제1권
1화
2화
3화
4화
5화
6화
7화
8화
9화
총각 귀신과 이혼하는 법
프롤로그.
 
정신을 차린 설희가 무지근한 눈을 힘겹게 떴다.
눈을 뜬 게 맞긴 한 건가. 주변이 온통 캄캄한 게, 마치 우주의 미아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킨 설희가 이마를 짚고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곰곰이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병원 입원실 벽에 나타난, 옛 한옥에서나 달았을 법한 커다란 장지문이었다.
그 문이 저절로 열리더니 자신을 진공청소기 마냥, 마구 빨아들였다.
그리고 끌려가는 저를 당황스럽게 보던 뽀글머리에 진한 마스카라를 한 낯선 여자가 떠올랐다.
 
‘맞다!’
 
거기까지 기억나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확 들었다.
설희가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팟.
하얗게 빛나는 길이 눈 앞에 펼쳐지면서 어둠이 한순간에 물러났다.
길 양옆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청사초롱의 행렬이 펼쳐졌다.
경계하는 설희에게 마치 이리로 오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거, 거기… 누구 있어요?"
 
두려움에 희게 질린 설희가 간신히 입을 뗐으나, 쥐 죽은 듯 사방이 고요했다.
가느스름하게 눈을 떠 보니 길의 끝에 무언가 보이는 듯했다.
홀린 것처럼 그녀가 천천히 길 한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길의 끝에 다다르자, 작은 상 위에 전통주와 산적, 떡 등이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었다.
그 뒤로 붉은 호롱불이 켜진 가운데 정갈하게 펼쳐진 원앙금침이 보였다.
 
"이, 이게 무슨….“
 
그 풍경을 멍하게 보던 설희는 어느새 자신의 옷차림이 변한 것을 눈치채고 흠칫했다.
손목에서 거추장스럽게 치렁거리는 색동저고리 소매.
황급히 몸을 더듬자, 비녀가 꽂힌 쪽찐머리에 정수리 위로 족두리까지 만져졌다.
그때, 길을 밝혀주던 등불 행렬이 한 번에 팍 꺼졌다.
 
"꺄악!"
 
두 눈을 질끈 감은 설희가 비명을 질렀다.
어둠이 다시 자리 잡은 고요한 공간에 원앙금침 옆의 흐릿한 호롱불만이 기묘하게 너울거렸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그녀의 혼이 쏙 빠지려는 찰나, 불이 꺼진 길의 저편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거, 거기 누구예요?"
 
뚜벅대는 소리와 함께 다가온 상대가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머리를 감싼 채 덜덜 떨던 설희가 시선을 살짝 들어 올렸다.
파란 예복 끝자락 아래 전통 목화를 신은 발이 호롱불에 어렴풋이 비쳤다.
 
"다, 당신 사람이에요…? 아님, 귀신?"
 
그녀의 용감한 두 번째 물음에 상대방이 성큼,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불빛에 상대방의 얼굴이 드러났을 때, 설희의 커다란 눈이 더욱 휘둥그레 떠졌다.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흰 얼굴에 연하게 빛나는 밝은 갈색 눈동자.
뚜렷한 콧대와 그 아래 도톰한 붉은 입술을 가진 조각 같은 남자.
그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브라운관을 휩쓸었던 배우 한수호였다.
 
그녀 또한 수호가 나온 드라마와 영화를 수도 없이 보았으며, 그의 신들린 연기에 감탄하고 때로는 동경하기도 했다.
 
'이, 이 사람 식물인간이 되었다던 그 한수호 맞지?'
 
그가 자살을 기도했다가 미수에 그친 후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났다. 시간이 꽤 지나 잊고 있었는데 그 한수호를 이런 정체 모를 곳에서 마주칠 줄이야.
 
이상한 점은 그 또한 자신과 같은 전통 혼례복 차림이라는 것.
하지만 그보다 이런 무섭고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아는 얼굴을 만난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런 안도감에 저도 모르게 굳었던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다.
 
"배우 한수호 씨 맞죠?"
 
설희의 질문에 수호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웃지 않는 눈길에 오만함이 잔뜩 묻어났다.
 
"알아보네."
"당연하죠.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얼굴인데."
"그러면 얘기가 빠르겠네. 피차 불만이 없을 테니."
 
수호가 짙은 남색의 혼례복을 휘날리며 성큼 다가섰다.
 
"그게 무슨 말… 앗!"
 
갑자기 다가선 수호 때문에 설희가 넘어질 뻔한 찰나, 그가 한 팔로 설희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붙들었다.
그리곤 얼어붙은 그녀를 금침 위에 천천히 내려 눕혔다.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 위로 타인의 숨결이 내려앉자, 벌레가 기는듯한 느낌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놀란 설희가 기겁하며 밀어내자, 굳은 얼굴로 내려보던 수호가 픽, 냉소를 뱉었다.
 
"다 알면서 인제 와서 싫다는 거야, 뭐야? 나랑 결혼하게 된 걸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 그게 대체 무슨…!"
 
무표정한 얼굴의 그가 그녀의 옷고름을 움켜쥐었다. 번개 같은 속도로 수호의 손을 붙들어 제지한 설희가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신 변태야?"
 
그런 설희의 두 손목을 낚아챈 수호가 힘을 주어 바닥에 내리눌렀다.
놀란 설희가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니 수호가 얼굴을 구기며 낮게 으르댔다.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너랑 내 모친께서 처녀, 총각 한이나 풀고 성불하라는데 자식 된 도리로서 분부대로 해야지."
"뭐, 뭐라고…?"
"이게 너나 나나 마지막으로 해드릴 수 있는 효도일 테지."
 
그의 말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엿 같은 것은 알 수 있었다.
복잡한 머리를 굴리느라 잠잠해진 설희의 목덜미로 수호가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설희가 아랫입술을 깨문 채 무릎을 최대한 안으로 당겼다.
 
"윽… 저리 꺼져, 이 변태 놈아!"
 
그렇게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발로 힘껏 그를 차 버렸다.
 
1.
 
-철퍼덕.
알 수 없는 공간에 끌려가 한수호와 마주치기 보름 전.
언제나처럼 편의점 오전 시간에 출근한 설희가 대걸레를 막 빨아와 바닥을 밀기 시작했다.
 
-딸랑.
“어서 오세…….”
 
걸레질하다 말고 고개를 돌린 설희가 얼굴을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