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가 회귀함 9
지은이 늘푸르
발행인 김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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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s §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장
평민들이 가끔 말하는 속담 중 이런 게 있다.
마법사와 신관을 구분하려면 마물을 그 앞에 내세우라.
마법사라면 마물을 조각조각 해체해서 가져갈 테고, 신관이라면 마물을 묶어 두고 예배를 드릴 것이다.
물론 우스갯소리이지만, 그만큼 마법사와 신관의 성향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말도 따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 레벤은 그 말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데…… 신성력을 주입하면 아프죠?”
“흐끅. 끄윽. 흑.”
몸 이곳저곳을 쿡쿡 찔러보던 레벤이 가볍게 물었다.
평범한 어조의 물음이기에 어떠한 감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허나 정작 물음을 받은 아일란은 훌쩍거리는 소리만 냈다.
그도 그럴 게, 그녀에게 있어 레벤은 포식자 중의 포식자.
그녀가 바로 눈앞까지 와 있으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이다.
설사 레벤이 실제로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별달리 할 수 있는 건 없는 모양이에요. 황금혈의 뱀파이어는 삼황자에 이어 두 번째로 보는데, 이 뱀파이어도 그때 그 사람처럼 무슨 능력을 부리나요?”
“…….”
발린은 대답 대신 말없이 아일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신이 말하는 것보단 그녀가 직접 말하는 게 훨씬 정확할 터였다.
이미 기가 죽은 아일란은 시선을 눈치채자마자 곧바로 답했다.
“배, 뱀파이어들을 부릴 수 있고, 피의 능…… 히끅!”
물론 레벤이 앞에 있기에 더듬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발린은 조용히 레벤을 자기 옆으로 불렀다.
그제야 아일란의 대답에 활기가 실렸다.
“권속들의 능력을 증폭할 수 있고, 피를 끓어오르게 해서 명령 지시도 가능해요. 그리고 매혹 계열의 능력이랑 성적 매력…….”
한 번 터진 대답은 술술 이어졌다. 덕분에 발린은 아일란의 능력이 생각보다 훨씬 위협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증폭이라 부르는 이른바 버프에 대해서는 전생에 안 그대로였다.
문제는 아일란이 가진 정신계 계열의 온갖 고유 능력이었다.
무려 다섯 개나 되는 고유 능력! 이 정도면 발린과 비교해도 그다지 꿀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 능력들 하나하나도 엄청나, 개중 어떤 것은 발린이 가지더라도 레전드 등급을 받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모조리 비전투 계열이라는 단점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저 정도라면 그 단점들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맙소사…….’
아일란의 말이 끝나자 발린은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었다.
방금 들은 걸 간단히 요약하자면 아일란은 걸어 다니는 병기 그 자체였다.
몸으로 유혹의 페로몬을 풍겨 어떤 생명체든 부하로 삼아 버리는 최강의 병기!
마침 고유 능력으로 고결한 영혼이 있어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동안의 여정이 여기서 끝날 뻔했다.
‘레벤이야 신성력으로 가득 차 있으니 안 통하는 건 당연할 테고.’
만약 들어온 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일이 더 커졌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그녀가 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 보도록 해. 내일 즉위식은 중요하니까 일찍 쉬어야지.”
“……발린, 혹시 아일란을 어떻게 이용할지 물어봐도 돼요?”
“어떻게 이용할 거냐고?”
발린은 잠깐 고민했다.
예전의 레벤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녀는 오로지 자신에 대한 감정만 남아 있다.
그렇다면 솔직히 답해 줘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혹시 불안하면 미리 입단속을 시켜 두면 되고 말이다.
‘게다가 레벤이 새로운 쓰임새를 말해 줄지도 모르지. 관점이 달라지면서 생각지도 못한 걸 제안한단 말이야.’
일전에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얻은 선례도 있으니만큼 이번에도 아니란 법은 없었다.
결국 발린은 그녀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심문을 마친 다음엔 아티팩트 제작용으로 구속시켜 둔 뒤 지속적으로 시약용 혈청을 채취할 것 같은데. 왜?”
“……인간 아티팩트…….”
의외로 레벤은 가볍게 납득했다.
이것도 그녀가 대부분의 신관들과 다른 부분이었다.
그녀가 발린을 위해 생각하느라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린은 아마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오랜만에 예전의 모습을 얼핏 본 거 같아서 문득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효능은 권속 조종과 매혹 정도겠네요. 만약에 효과를 매긴다면요.”
“그야 그렇겠지…… 잠깐.”
가볍게 대답하던 발린의 머릿속에 일순 번개가 쳤다.
인간 아티팩트라는 말에서 순간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래, 그러고 보니 아일란이 할 수 있는 게 한 가지 더 있었지. 엄청난 것이 말이야!’
발린은 급히 아일란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권속들에게 마음대로 명령할 수 있다고 했지! 그럼 지금도 권속들을 조종할 수 있나?”
“네? 예. 물론…… 가능해요.”
두려움에 떨던 아일란이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서 자신의 처우를 들었으니만큼 그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 다 쓸 수 있어요. 말씀만 하시면…… 그러니 실험체만은 제발…….”
아일란은 황족으로서 노스트라 제국의 수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엔 제국 마법사들이 행하는 온갖 잔혹한 실험들도 끼어 있었다.
살가죽을 모조리 뜯어내고 피와 힘줄 하나하나를 전부 끊는 잔학무도한 행위!
연구라는 명목 하에 이뤄지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행해진다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죽고 싶어도 죽지도 못하게 할 테니 영원히 고통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만 피한다면 아일란은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좋아. 그럼 지금 당장 네 권속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어? 여기 데려온 녀석들이랑 제국에 있는 녀석들 모두!”
“네? 네!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아일란의 대답을 들은 발린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만약 발린이 그녀를 실험재료로만 여겼다면 결코 얻지 못할 성과였다.
하지만 한 가지, 마지막 문제점이 남아 있었다.
“그러면 혹시 황제가 너나 네 권속에게 명령을 내리면 너도 강제로 그걸 듣게 되나?”
아일란은 고개를 저었다. 황제의 명에 절대복종하는 건 모든 뱀파이어의 숙명이나, 황금혈을 이어받은 황족은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삼황자가 독단적으로 파이오니어 왕국에 왔고, 슈바인과 아일란도 황도에 있을 수 있던 것이다.
“역시 그렇군. 그렇다면 이것도 가능하겠는걸…….”
“아일란을 직접 수족으로 부려서 그 권속들을 이용하는 거 말이죠?”
“…….”
발린은 대답 대신 눈을 크게 뜨고 레벤을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그가 이을 말을 그녀가 먼저 해 버린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 뱀파이어의 권속들이 발린, 당신을 위해 움직인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거잖아요? 악의 세력을 이용해 악의 세력을 친다. 레이안께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지만, 당신이라면 얘기가 다르죠. 네?”
레벤은 말을 마치고 싱긋 웃었다.
확실히 악을 이용해 악을 치는 건 발린이 주로 쓰는 전략 중 하나다.
레벤이야 모르겠지만 파이오니어 왕국에서도 한 번 써먹은 적이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 이런 식으로 황금혈의 뱀파이어를 잡으면 그 권속을 부하로 부릴 수도 있겠군.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행운인걸?’
발린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아일란을 쳐다보았다.
최소한 더 이상 실험용 재료로 영원히 가둬 두는 일은 없을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아일란은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럼 계약서를 준비해야겠는걸. 일이 끝난 다음에 확실히 족쇄를 채워 놔야겠어.”
“족쇄요?”
옆에 있던 레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나의 약속은 회귀 전 세상에서나 있던 것이다. 지금의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들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마법사 간의 계약이긴 한데, 아마 모든 인간에게 통할걸. 그런 게 있어.”
발린은 일전 엘리아와 맺었던 마나의 약속을 떠올리며 답했다.
만약 아일란이 그걸 알았다면 아까 전 못지않게 겁에 질렸을 것이다.
저건 사실상 영원토록 발린의 노예 행세를 해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럼 나머지는 즉위식 끝난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레벤, 이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 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할게요.”
레벤은 선뜻 승낙하고 방을 나섰다.
혹여 다른 사람이 올까 싶었으나, 시간이 시간인지라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발린은 아일란의 입가에 재갈을 물려 벽장에 넣었다.
혹여 남에게 들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만큼 당연히 해야 할 조치다.
“권속 뱀파이어들을 이용해서 노스트라 제국을 친다라…… 아니,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야. 아일란만 계속 잡아 둔다면 그 휘하 권속들은 계속 우리들을 따를 테니까…… 그들을 다른 곳에도 보낼 수 있고. 그래. 맞아.”
생각할 게 갑자기 엄청나게 많아졌다. 물론 그것은 근심걱정이 아닌 기쁨의 고민이었다.
하기야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아졌으니 꾼으로서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뱀파이어란 카드는 적으로서는 무서우나, 그걸 아군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만큼 유용한 무기였으니 말이다.
‘이러고 있자니 벌집이나 개미집이 생각나는군. 지금 이게 딱 그 꼴이야.’
발린은 침대 위에서 두 벌레들을 떠올렸다.
먹는 것도 형태도 다르나, 그들은 공통적으로 여왕의 명 아래 종족 전체가 뭉쳐 움직인다.
뱀파이어도 어찌 보면 그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점인 황금혈은 여왕이고, 그 아래의 뱀파이어들은 일종의 전투병과 먹이 채집꾼 역할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미집과 개미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