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공작님의 가족이 되려 합니다
흑막 공작님의 가족이 되려 합니다
[1권]
1.
2.
3.
흑막 공작님의 가족이 되려 합니다
1.
“이 애, 자네가 키우게.”
그 말에 서머셋 공작가의 수장, 시모어 헤이워스 서머셋이 서류에서 눈을 뗐다.
각진 안경 너머, 녹음을 닮은 사내의 녹안이 불쾌함과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그것은 약 한 달 전 고급 시가를 반값에 유통해 달라는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받았을 때와 꼭 닮은 눈빛이기도 했다.
그때 시모어는 곧장 테이블을 엎고 재떨이를 집어 던져 박살을 냈다.
물론 그는 이번에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역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가 그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여 그는 테이블 모서리를 짚는 대신, 피곤에 찌든 눈동자를 굴려 눈앞에 앉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녹록지 않아 보이는 꼬장꼬장한 노부인 하나.
그리고 그녀의 곁에 앉아 있는 밤톨만 한 여자아이 하나.
‘도대체 이게 무슨 무슨 해괴한 조합인지.’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분명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내쫓았을 것이다.
만약 시모어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저 노부인이, 시모어에게는 어머니나 다름없는 그의 장모가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미간 사이를 한 번 주무른 시모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장모님.”
“어려운 말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네만. 이 애를 서머셋의 이름하에 들이라는 걸세.”
“서머셋이 그리 적적해 보이셨다면 차라리 고양이를 데려오시지 그러셨습니까.”
대놓은 비아냥에 헤이워스 부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네는 볼 때마다 말본새가 거칠어지는군. 아니면 내가 우습나?”
“설마요. 요즘 세상이 워낙 험해서 그렇습니다.”
“장모가 불렀는데 그 앞에서 서류나 보고 있고.”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음 주에 중요한 계약 건이 있는 터라.”
“그렇게 바빠서, 로즈의 묘에 들를 시간은 있나?”
그 순간 시모어의 입매에서 웃음기가 빠졌다.
“아내 이야기는 왜 꺼내시는 겁니까.”
“내가 내 딸 이야기도 못 하나? 그 애가 죽은 지도 벌써 1년이 넘었어.”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았다니 놀랍군요. 하루하루가 지옥 같기에 억겁이라도 지난 줄 알았더니.”
그렇게 중얼거린 시모어가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아직도 그는 눈앞에 선히 그릴 수 있었다. 목숨처럼 사랑한 아내와, 하나뿐인 형,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을 한순간에 잃었던 그날을.
‘대표님! 급히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산비탈에서 마차 사고가 있었는데 그 사망자가……!’
사고가 난 마차에는 시모어의 형, 그레이엄 부부와 그의 아내가 함께 타고 있었다.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
시모어에게 남은 것은 그레이엄 부부가 남긴 아들 하나와, 본디 그의 형이 이어받아야 했을 서머셋 공작이라는 무거운 이름뿐.
그렇게 시모어는 서머셋 공작이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형 부부가 남긴 아들, 단테가 작위를 이어야 했으나 당시 단테는 고작 다섯 살밖에는 되지 않았던 탓이다.
그것이 벌써 1년 전이다. 그런데도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기억은 여전히 그를 찡그리게 했다.
그런 사위를 바라보는 헤이워스 부인의 낯에도 수심이 깃들었다.
“자네 언제까지 그러고 살 텐가?”
“……제가 뭘 어쨌다고 또 그러십니까.”
“내가 모를 것 같나? 이미 다 들었네. 침대에서 자는 날은 한 달에 한 손도 안 넘어가고, 매일 술 담배를 달고 살고, 사업은 꽁지에 불붙은 개라도 되는 양 일이 미어터지지 않나?”
“그게 제 방식일 뿐입니다.”
“요절하는 방식이겠지.”
“장모님도 아시잖습니까. 저는 서머셋을 건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래야 조카에게 한 점 부끄럼 없이 작위를 넘겨줄 수 있으니까. 자네가 조금만 휘청이면 친애하는 자네의 친인척들이 자네의 공작 위를 호시탐탐 노릴 테니까! 그 핑계를 지금 내가 몇 번째 듣는지 알기나 하나?”
“…….”
변명을 꺼내기도 전에 가로막혔다. 아무래도 너무 많이 쓴 변명은 효과가 떨어지는 법인지라.
시모어는 혀를 한 번 차고는 말했다.
“하지만 사실이잖습니까. 단테는 제 아들이 아니니, 분명 제가 조카에게 작위를 물려주려 하면 혈통을 가지고 물어뜯으려 할 겁니다.”
시모어의 혈통은 그레이엄 가문에 있었다.
하지만 시모어의 현재 성은 헤이워스. 그것은 그가 헤이워스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오면서 바뀐 성이었다.
문제는 그런 그가 본디 그레이엄 가문이 가지고 있던 서머셋 공작 위를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작위를 물려주어야 할 조카와는 완전히 다른 가문이 되어 버렸고, 이는 충분히 문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가문 문제로 물어뜯길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미리 밑 작업을 해 놔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것은 시모어의 일 중독에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건강을 챙기라며 펄펄 뛰던 헤이워스 부인도, 모두 자신이 아니라 조카를 위해서라고 하면 한발 물러나 주곤 했으니까.
그러나 어째서인지 오늘 헤이워스 부인은 저 말을 듣고도 눈을 빛내는 게 아닌가.
“자네 아주 말을 잘했네. 자네 말이 맞지. 밑 작업을 해 놔야지. 혈통 문제로 물어뜯기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게 아닌가.”
“그렇죠.”
“그럼 혈통 문제를 해결하면 될 거 아닌가!”
시모어가 찡그리듯 차게 웃었다.
“그럴 수 있다면야 당연히 하겠죠. 하지만 단테를 헤이워스로 입양할 수는 없습니다. 단테는 그레이엄에 하나 남은 직계-”
“누가 자네 조카를 입양하랬나?”
헤이워스 부인이 꼬장꼬장한 낯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결혼을 시키면 될 게 아닌가!”
“……예?”
시모어의 표정이 설마, 하는 얼굴로 바뀌었다.
“자네가 이 아이를 후원하게. 크거든 조카와 결혼을 시킨 뒤 작위를 넘겨주면 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아무도 혈통을 문제 삼을 수 없을 것이다.
조카에게 대뜸 작위를 물려주는 것보다 모양새도 훨씬 매끄러워질 테고.
“무엇보다 자네에게도 책임져야 할 가족이 생기는 거나 다름없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장모님. 그게 무슨-”
“아니면!”
쿵! 헤이워스 부인의 지팡이가 사납게 바닥을 찍었다.
“아니면 내가 이렇게 자네 바짝바짝 말라가는 꼴을 보다 가슴앓이로 쓰러지기라도 하라는 겐가? 응? 내가 눈을 감아야 이 짓을 그만두려고?”
“아니…… 장모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래 사셔야죠.”
“그래, 그러니까!”
다짐이라도 하듯 꾹꾹 눌러 말한 헤이워스 부인이 옆의 아이를 가리켰다.
“아이를 키우게. 작위를 넘겨줄 때까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도 좋네.”
“…….”
“싹싹한 아이야. 자네의 그 비루먹은 성격도 포용해 줄 수 있을 걸세.”
헤이워스 부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옆에 앉아 있던 소녀가 또랑또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가 오르내릴 때마다 가지런히 묶어 내린 양 갈래 머리칼이 파닥였다.
하는 짓도 표정도 제법 야무진 모양새였으나, 작금의 시모어에게는 모든 게 황당할 따름이었다.
“대체……. 지금 고작 그런 이유로 아이를 키우란 말씀이십니까?”
“왜? 아주 좋은 방법 아닌가. 혈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야 당연히 하겠다고 한 건 자네 아닌가?”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애초에 이 아이는 또 어디서 데려오신 겁니까?”
궁지에 몰린 시모어가 말꼬리를 돌리려고 한 순간, 내내 침묵을 고수하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저는 타운센드 보육원에서 왔어요. 이름은 로위나 위트필드구요, 열 살이에요. 제가 헤이워스 부인께 서머셋 공작님의 가족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뭐?”
시모어가 무슨 말이냐는 듯 날카롭게 되물었다.
하지만 로위나는 히히 웃을 따름이었다. 덕분에 그는 상식이 마비되는 감각을 느꼈다.
“장모님, 지금 저 말 하나를 듣고 애를 저한테 데려오신 겁니까?”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너무 많지 않습니까! 분명 가문의 재산을 노린 걸 겁니다!”
“저는 아무것도 안 받아도 돼요.”
그리고, 또다시 로위나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는 헤이워스에도 그레이엄에도, 그리고 서머셋에도 관심이 없어요.”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그럼요. 원하신다면 계약서를 써도 좋아요! 제가 가문과 작위에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다고요.”
시모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대체 네가 왜 내 가족이 되고 싶다고 한 거지?”
“전 가족이 갖고 싶었거든요. 아시다시피 저는 가족이 없잖아요.”
고아니까요.
로위나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리에서 폴짝 뛰어내려 도도도 시모어에게로 왔다.
그러고는 대단한 제안을 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공작님께서 절 받아들여 주시면 귀가하셨을 때 현관으로 달려 나가서 맞아 드릴게요.”
“이게 무슨,”
“아침도 같이 먹어요! 원하시면 공작님 달걀부침에는 소스를 하트 모양으로 뿌려 드릴 수도 있어요.”
저 되게 잘 뿌려요.
로위나가 커다란 비밀이라도 얘기하는 것처럼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구, 이건 진짜로 큰마음 먹고 하는 건데요.”
“또 뭐?”
“자기 전에 굿나잇 키스도 해 드릴게요.”
이거 아무나 안 해 주는 거거든요.
덧붙이는 말에 시모어는 아이를 기가 차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웃는 낯에 침 뱉기도 어렵다고 하지만, 시모어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뭇 귀족들의 꼬리를 팍 내리게 만든 그 살벌한 시선에도 아이는 웃고 있기만 했다.
더 이상의 어떤 대화는 불필요하다는 방증.
로위나는 시모어의 옆에 폴짝 올라앉아 방긋 웃더니, 박수를 짝 쳤다.
“공작님, 저희는 좋은 가족이 될 수 있을 거예요.”
* * *
로위나 위트필드.
이번 추수감사절을 맞아 10살을 꼭 채운, 타운센드 보육원의 고아.
그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 로위나를 수식하는 단 하나의 문장이었다.
정말 특별할 게 하나 없는 평범한 고아 여자아이. 그게 로위나였으니까.
다른 아이들이라면 주근깨가 있다느니, 진저 헤어를 가졌다느니 하는 문장이 따라붙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모두 로위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로위나라는 이름부터가 타운센드 보육원에서 여덟 번째 순서로 기용하는 고아의 이름이었으니 특별할 게 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