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리리트 영애, 어째서입니까.”

안녕?

내 이름은 루야.

딱히 특별한 성씨도 없는 평범한 소녀인 나는 지금 한 남자에게 집착 받고 있어.

후줄근한 드레스 차림의 귀족 영애.

그리고 그런 영애에게 감히 다가가지조차 못하는 평민 남자.

대낮부터 골목에서 벌어지는 치정극은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을 수 있을 정도로 낯 뜨거운 광경이었지.

“영애께서 분명히 절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함께 수도에서 도망쳐 아이를 낳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기로 약조했지요.”

남자는 비참한 몰골로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 내게 애걸복걸하고 있어.

“어딜 입으로 함부로 놀리느냐! 정녕 내가 네놈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혓바닥까지 잘라야 직성이 풀리겠어?”

그리고 나는 그런 남자에게 일갈하며 그의 입을 틀어막았지.

그러자 우리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어.

자칫 잘못해 이번 일에 엮이면 본인들의 목숨도 보전하기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생존 본능이었겠지.

“하아, 방금은 사람들이 너무 몰려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역시 진심이 아니실 줄 알았어요.”

남자는 구원의 손길을 받아냈다는 듯 감격스러움에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어.

하지만 나는 측은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

“사과할게요. 하지만 내 마음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그냥 귀족 아가씨의 여흥 정도로 생각하고 날 잊어줘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럼, 우리가 함께 나눴던 약속들은? 그것도 다 마음에 없는 소리였던 거예요?”

“미안해요.”

내 무미건조한 사과 한마디에 남자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어.

“지금은 진심인 거군요.”

“그냥 철부지 영애의 장난질에 놀아났다고 생각하고 날 욕하세요. 평생 내 불행을 저주해도 괜찮아요.”

“아뇨,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잠깐이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에게. 절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이만 가볼게요.”

나는 일말의 미련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듯 곧바로 자리를 떴어.

그러면서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지.

분명히 그 남자는 리리트 영애가 사라지고 난 뒤의 싸늘한 골목에서 착잡한 얼굴로 비참한 심경을 곱씹고 있을 테지.

그렇게 한참을 그녀가 사라진 길모퉁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 거야.

***

“정말이지 사람이 못 할 짓이라니까.”

조금 전의 리리트 영애는 어디로 가고 개나리꽃이 생각나는 노란 머리에 아담한 체구를 가진 소녀가 나타났느냐고?

“좋은 분 같아 보였는데.”

그래, 맞아.

남자가 만난 리리트 영애는 사실 이 불만 가득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소녀였어.

길바닥에서 자란 소녀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변신 마법에 능통하다는 거야.

“어쨌거나 의뢰를 완수했으니, 정산을 받으러 가볼까? 마음이 안 좋기는 해도 돈은 잘못이 없으니까.”

나는 언제나 그렇듯 마법 주문과도 같은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을 무겁게 잠그는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풀어낼 수 없었으니까.

***

“오셨군요, 마법사님.”

내가 향한 곳은 원래라면 입구에 들어갈 용기조차 나지 않을 으리으리한 디저트 가게야.

그리고 그곳에서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저 여자는 내게 의뢰를 맡긴 진짜 리리트 영애님이지.

“잘 해결됐나요?”

“제가 누굽니까. 지금까지 받았던 이별 의뢰로 벌어들인 돈만 해도 이 가게의 디저트를 전부 사버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난 눅눅해진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일부러 말투를 과장해 허세를 부렸어.

그러자 나를 바라보는 리리트 영애님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는데.

나는 저것이 내 마법에 대한 동경인지.

그게 아니라면 맡긴 의뢰를 수월하게 해결해서인지 헷갈렸어.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아.

영애님의 머릿속에 그 불쌍한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야.

“역시나 마법사님. 소문대로 대단하세요.”

“엣헴! 이 정도 의뢰는 제게 이 눈앞에 놓인 고구마 케이크를 먹는 것보다도 더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죠.”

“어쩜 혹시 더 드시고 싶은 게 있다면 말씀만 하셔요.”

“정말요?”

나는 케이크를 마음껏 먹어도 좋다는 말에 순간 흥분해 목소리가 높아져 버렸어.

위엄 넘치는 마법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미숙한 모습을 보여 버렸네.

하지만 괜찮아.

그래도 본인의 실수를 빠르게 자각하고 헛기침과 함께 목을 가다듬으면 다시 무게를 잡을 수 있으니까.

“크흠, 그보다 직접 주신다는 정산금은 어떻게.”

“아, 여기 있답니다. 그 남자가 혹시나 저를 찾아오게 된다면 의뢰 금액인 200골드를 다시 환불한다. 맞죠?”

“물론입니다, 리리트 영애.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기를. 전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패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알죠, 그러니까 이렇게 비싼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마법사님께 의뢰한 거니까요.”

사라 리리트.

남작가의 귀족 영애로 구두닦이 남자와 사랑에 빠진 철부지 아가씨.

그녀는 가족들의 눈을 피해 저택 밖을 나돌아다니며 밀회를 즐겼으나, 결국 그 사실을 아버지인 리리트 남작에게 들키고 말았어.

리리트 남작은 불같이 화를 내며 딸인 사라 리리트를 서부 귀족에게로 시집보내기로 했지.

물론 그 이면에는 딸에 대한 걱정보다는 시집보내는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아먹을 수 있다는 조건이 더 컸대.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리리트 영애님은 귀족의 의무라면서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기로 하셨어.

그녀는 구두닦이 남자에 대한 마음을 단번에 접었다고 했어.

미련이 남은 남자는 저택까지 찾아와 리리트 영애님을 찾았고.

아버지의 등쌀에 못 이긴 영애님께서 찾은 사람이 바로 나야.

“괜찮으세요?”

“네? 뭐가요?”

리리트 영애님은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셨어.

“사랑하던 사람이었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저는 귀족인걸요.”

“그렇군요.”

“그보다 저는 마법사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리리트 영애님은 내게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본인의 호기심을 표현하셨어.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차를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보이며 여유를 부렸지.

“놀라지 않으시네요?”

“처음이 아니니까요.”

내 담담한 대답에서 부담스러운 호기심을 가진 영애님을 상대하는 게 처음이 아니란 걸 느낀 모양이야.

“마법이란 신비한 힘에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마법이란 게 원래 그렇죠. 사람들의 욕망을 계속 건드리며 그들을 안달 나게 하니까요.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단호한 경고문에 리리트 영애님도 한발 물러났어.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벌써요?”

“네, 밖에 오래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떨림.

이 떨림은 아직 접시에 남아 날 기다리는 케이크에 대한 미련이 튀어나온 거야.

저 포슬포슬한 빵과 생크림 좀 봐.

저렇게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케이크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얼마나 힘든데.

“필요하시면 의사를 보내드릴게요. 마법사님에 대한 이야기는 비밀에 부칠 터이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리리트 영애님은 내가 몸살이라도 걸린 줄 안 모양이야.

“아닙니다. 다음에 또 의뢰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아마 없을 거예요.”

“그러길 빌죠.”

나는 무뚝뚝한 말투로 영애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가게를 나섰어.

물론 여전히 내 입안은 아쉬움에 침이 고여 있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호기심 가득한 영애님을 상대하는 건 언제나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