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년 만에 최저 온도를 찍은 어느 12월 겨울날,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속쌍꺼풀의 고양이상의 여성이 안방 창문으로 눈의 초점을 잃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정아람. 우리나라에서 의류로 가장 유명한 회사인 JU 그룹의 며느리였다.

덜컥.

문 열리는 소리에 초점이 없던 그녀의 눈의 초점이 한순간에 돌아왔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베개 하나를 잡아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를 향해 던졌다. 얼굴을 정면으로 맞아 버린 남자의 이름은 최시우, 아람의 남편이자 JU 그룹 회장의 외아들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왜 갑자기 베개를 던지고 그래?”

시우는 그 누구보다도 억울하고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람을 째려보았다. 아람은 그런 시우에게 자신의 폰을 건네주며 누군가에게서 온 문자 내용을 보여줬다.

[아내한테는 출장 간다고 핑계 대고 왔다는데… 얼마나 힘들었음 나한테 올까? 앞으로 네 남편은 내가 더 잘 챙겨 줄 테니 걱정하지 마.]

그 문자와 함께 보내온 사진 한 장은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성의 몸으로 보이는 실루엣과 시우의 얼굴이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은 채 찍힌 것이었다.

“당신이라면 다를 줄 알았어. 근데… 근데 어떻게 나한테 이래!”

“…이게 뭐 큰 잘못이야?”

“ㅁ… 뭐?”

“최근에 나한테 사랑한다, 뭐 이런 말해 준 적 없잖아. 아니 나한테 신경 써 준 적이라도 있어?”

“그게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말이야?”

“아니. 솔직히 말하면 너랑 이혼하고 싶은 핑계야. 이참에 잘됐네. 이렇게 된 거 내일까지 여기에 이혼 도장 찍어 줘.”

시우는 여태 이혼할 틈을 노리고 있었는지 바람이 들키자마자 서랍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아람에게 내밀었다. 아람은 당당하게 합의서를 꺼내자 당황스러우면서도 화가 난 나머지 결국 한순간의 감정으로 파우치에 들어 있던 도장을 꺼내 와 이혼 합의서에 ‘쾅’ 찍어 버렸다.

“됐어? 이제 됐냐고!”

“어. 너무 속 시원하고 좋아. 지금 내가 짐 빼서 나갈게.”

시우는 캐리어를 열고 짐을 챙기더니 이혼 합의서를 들고 후련한 뒷모습으로 집을 나갔다.

아람은 시우가 나가고 나서 곁눈질로 현관문을 계속 쳐다보았다. 하지만 들어오는 사람 없이 도어 록 소리조차 조용했다.

그 순간, 아람은 잠옷 위로 카디건 하나만 걸치고 슬리퍼도 짝짝이로 신을 만큼 급하게 집에서 나와 지하 주차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우의 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게다가 전화조차 차단당했는지 안내음 기계 목소리만 들렸다.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상대로 몰래카메라를 찍는 거 같았다. 지금이라도 시우가 뒤에서 안아 주며 서프라이즈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띠링.

아람의 폰에서 울리는 문자 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오진혁 변호사입니다. 이혼 위자료 관련해서 남편이신 최시우 님이 10억을 제시했는데 어떠신가요?]

아람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답장하려고 했지만 이미 위자료까지 생각하고 있던 시우를 생각하니 비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믿었던 남편인데… 최근에 외출이 많아도 의심 한 번 없이 믿고 따랐던 남편인데…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신감과 마음속에 칼로 깊게 밴 것처럼 찌른 듯한 아픔뿐이었다.

오늘은 슬픈 상황 속에서 웃음을 실실거리는 미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아픈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으니깐. 그리고 이렇게 새벽을 보내다 보면 아침의 내가 정신 차리고 이 상황을 나갈 방법을 찾을 테니깐.

.

.

.

밤새 우느라 못 잔 아람.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맺혀 있었고 머리카락은 여러 가닥이 꼬인 것 같이 동시에 헝클어져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얼굴에 눈물 한 점 없었다.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시우와 같이 찍었던 사진을 손으로 찢고 있었다.

9시가 되자마자, 아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을 들었다. 발신인은 오진혁 변호사였다. 전화를 하는 아람의 목소리는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매섭게 변호사를 몰아붙이려는 톤이었다.

-어제 위자료로 제시한 10억은 적은 거 같아요.

-그럼 얼마면 좋을까요?

-뭐 그쪽에서 제시한 금액 없나요?

-네. 시우가 그냥 달라는 금액 오케이 하라고 했거든요.

-미친놈, 이혼을 그렇게 하고 싶었나….

-네?

-…아닙니다. 그럼 그냥 20억만 주세요.

-알겠습니다. 근데 생각보다 금액이 적네요. 시우는 한 100억 생각하던데.

-100… 100억이요? 아뇨, 그 정도까지는 됐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처리할게요.

아람은 손가락으로 100억이라는 숫자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래도 항상 미니멀리니즘한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원래 요구했던 20억이라는 돈도 아람이 꿈꿔 왔던 카페를 차리고도 남은 금액이니.

또다시 입술과 눈이 찌그러지면서 눈물과 콧물 다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람은 심호흡을 내쉬며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려고 했지만 흐르는 눈물과 콧물이 너무 많아 역부족이었다. 속에서 뭔가 올라오는 느낌에 그대로 화장실로 튀어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30분 동안 구역질에 고생하다가 속이 비워지고서야 멈췄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아람은 갑자기 시우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커피포트로 데운 뜨거운 물에 꿀을 가지고 오며 호호 불어서 먹여 주던 그가….

아람은 자신의 양쪽 볼을 두 손으로 세게 치더니, 양 볼을 붙잡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댔다.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최시우! 지금 만나는 여자가 아주 돈만 빼가고 헤어지면 좋겠다! 이 미친놈아!”

소리를 지르고 나니깐 그래도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우에게 적응했던 몸이 항상 먹었던 꿀물이 자꾸만 생각나게 했다.

결국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찬장에는 한 번도 열지 않은 듯한 꿀통이 있었다. 이럴 때면 옆에서 뚜껑을 열어 주었던 그 남자가 떠올랐다. 아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두 눈을 질끈 감더니 꿀통을 열었다. 이상하게도 쉽게 열리는 꿀통에 어깨를 쫙 펴며 의기양양해졌다.

“봤지? 최시우, 나 이제 당신 없어도 할 수 있어.”

아람은 웃음을 지으며 꿀물을 타 먹었다. 그래도 최시우가 타 주었던 꿀물이 생각나는 거 어쩔 수 없었다. 차차 잊어 가겠지라는 생각으로 아람은 그 마음을 합리화했다.

이혼 도장을 찍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둘이 이혼하는 것을 언론은 물론이고 양가 부모님까지 알아 버렸다. 당연히 시우의 집에서는 기업에 타격이 가기에 온갖 둘 사이의 이혼 이유에 대한 추측 기사를 막느라 애를 썼다. 아람의 집에서도 아람의 걱정으로 난리 나 있었다.

“아람아, 엄마가 갈까?”

“아니야. 시댁 쪽이랑 얘기 끝내고 내가 갈게. 걱정 말고 집에나 계셔.”

“그래도… 그 집이 장난 아닌 걸 엄마가 아는데… 아빠도 지금 난리 나셨다. 귀한 딸 데려가서 이혼시켰다고.”

“에이… 그냥 성격 차이로 서로 갈라선 건데 뭘 그래.”

아람은 시우의 바람으로 이혼하게 됐다고 말하면 집안은 물론이고 언론까지 알려지면 자신이 피곤해질 것을 알았기에 이혼 사유를 성격 차이라고 거짓말했다. 오진혁 변호사에게도 시우에게 이혼 사유에 성격 차이라고 넣자고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람은 시댁에 가기 위해 오랜만에 화장대 앞에 앉아 결혼식 때 했던 화장보다 더 진하게 화장을 하고 평생을 입지 않았던 짧은 미니스커트에 블라우스를 입었다.

그렇게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시우의 본가였다. 이층집에 수영장, 테라스, 큰 운동장까지… 역시나 언제 봐도 으리으리한 저택 같은 집이었다. 그곳에 들어서니 아람의 심장은 공항이 올 듯이 누군가 쥐어짜듯이 쪼여왔다. 그래도 두 손에 주먹을 꽉 쥐고 당당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집 현관문에서 먼저 보이는 사람이 시우인 것을 보고 쓰러질 뻔했다. 따로따로 불러서 얘기 나눌 줄 알았더니… 이렇게 다시 볼 줄이야.

“오랜만이네요. 다들.”

“ㄴ… 너 옷차림이 무슨 꼴이니?”

“아, 죄송해요. 제가 이 시간 뒤로 약속이 있어서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예의가 아니지 않니?”

“그래서 이혼하잖아요. 그 예의 지키기 싫어서.”

아람은 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집안의 큰어른이었던 진우는 아람의 태도 지적 없이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입을 열어 둘의 이혼 얘기를 시작했다.

“그래. 남녀 사이 문제이니 이유는 자세히 묻지 않겠다. 그런데 정말 이제 둘 다 마음이 없는 거니?”

“네. 없어요.”

“시우 너는?”

“…저도 없어요.”

“후… 그래도 내가 너희보다 어른이니 조언을 하자면 이혼 숙려 기간 동안 다시 한번 생각해 봤음 한다. 사실 시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아람이를 만나고 많이 변했잖니. 그만큼 아람이 너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란다. 그래서 난 내 욕심으로는 이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너희 선택에 맡긴다. 이혼 숙려 기간 뒤에도 너희 마음이 그대로라면 나도 아람이 널 놓아주마.”

“당신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 시우 인생을 망쳐 놨는데. 기껏 결혼시켜 줬더니, 뭐? 이혼? 너 지금 장난하니?”

“어머니, 그만하세요. 제가 먼저 하자고 한 거예요.”

“그래, 당신 그만해. 그렇게 따지면 아람이도 시우랑 이혼해서 인생 망치는 거야. 아람아, 이제 가보렴. 네 마음 잘 알았다.”

진우의 말이 아람의 마음을 울렸다. 차갑다고만 느껴졌던 이 집에서 내가 소중한 사람이었다니… 2년 동안 한 가족으로 지냈지만 진우의 마음을 오늘 처음 알았다. 이혼하기 전, 시우가 아람에게 종종 아버지가 그녀를 만나고 나서 바뀌었다는 말을 했었지만 믿지 않았었다. 진우의 말을 들으니 이제는 좀 믿어지는 거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거 하나 없었다. 이미 이 집에서 정을 뗀 지는 오래니깐.

아람은 들어올 때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집에서 나왔다. 그런데 대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아람은 과호흡으로 숨이 안 쉬어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게 된 운전기사인 강민은 급하게 아람에게 뛰어와 그녀의 옆에 쪼그려 앉아 같이 호흡해 주며 아람이 호흡을 되찾을 때까지 옆에 있었다. 아람은 강민 덕분에 평소보다 빠르게 호흡을 되찾았다.

“괜찮아요?”

“네… 덕분에요. 고마워요. 아… 그리고 여태 같이 병원 왔다 갔다 해주신 거 감사했습니다.”

“별거 아닌데요, 뭘. 그때 제가 조금 더 조심스럽게 운전했다면….”

“아니에요. 다 제 잘못인걸요. 전 이만 가볼게요.”

아람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예약한 택시에 올라탔다. 강민은 그 차 뒷모습을 보며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항상 자신보다 남을 더 소중히 여겼던 아람이 저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것이었다. 분명 저 모습을 보면 시우를 잊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니… 강민의 머릿속에는 저렇게 아람이 시우를 사랑하는데 서로 왜 이혼을 하려고 할까라는 의문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