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담벼락

한여름 밤.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 목 끝에서부터 쏟아지는 숨소리, 그리고 재빠른 발걸음 소리가 골목길에 울린다.

‘씨발.’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단어 때문에 두 눈은 실핏줄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셀 수도 없이 다녔던 길목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리기 속도가 제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터질 거 같은 심장 박동 소리가 그녀의 집 담벼락이 보이는 순간, 잦아들기 시작했다.

담벼락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는 하얀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씨발.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교복을 입고 있어!’

울화가 치밀어 올라 목청이 터질 듯이 욕을 내뱉고 싶었지만,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정민의 종아리뼈가 눈에 먼저 들어왔고 시퍼렇게 퍼진 멍으로 인해, 유림은 숨소리마저 삼켰다.

유림은 무릎 사이에 고개를 푹 숙인 정민의 정수리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듣기라도 할까 봐, 날숨 사이로 낮게 말했다.

“씨발. 그동안 잠잠했지.”

정민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욕 좀. 하아…. 유림아, 응? 욕 좀 제발 그만해. 내가 너한테까지 욕을 들어야 해?”

유림은 금세 풀이 죽어 그녀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면 도망이라도 가든가…. 왜 이러고 있냐고.”

자정을 이미 넘긴 시간이었지만, 한여름의 열대야는 여전히 식지 않았다. 하지만 정민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중, 유림은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그녀의 뺨에 어지럽게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목덜미를 향해 시선이 내려가는 순간,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씨발. 이게 뭐냐?”

“한 번만 더 욕해라.”

떨리는 그의 손끝이 정민의 목덜미를 한 바퀴 두르고 있는 개 목줄에 닿았다.

“미친 새끼.”

서슬이 퍼런 두 눈의 실핏줄이 그만 터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눈물이 한두 방울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히려 눈물 자국 하나 없는 얼굴로 유림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좀 풀어 봐. 유림아…. 지금 내가 그 줄을 풀 힘이 없다. 기운이 없어.”

유림은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고, 목줄을 푸는 호크를 찾느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나 보고 개새끼래. 삼시 세끼 밥 먹고 공부 하나… 그 하나 하라고 했는데 그걸 못하냐고 그러더라. 목에 개 목줄을 걸어서 복댕이 집 앞에 매달아 두면서 말이야. 그런데 우리 복댕이가 집 나간 지가 언제였지? 왜 아직도 복댕이 집을 치우지 않았을까. 목줄도 그대로 두고….”

정민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 갔다.

“집 안은 전쟁통에 피난 가는 거처럼 난리가 났는데. 유림아, 난 개 목줄에 걸려서 복댕이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거든…. 그런데 오히려 그게 그렇게 마음이 평화로울 수가 없더라.”

유림은 그녀의 목덜미에 걸려 있는 까칠한 나일론 목줄이 떨어져 나가면서 살가죽만 붙어 있는 목에 작은 상처라도 날까 봐 구멍 안쪽으로 걸려 있는 호크를 조심스레 뺐다. 그제야 널뛰기하던 심장이 천천히 진정되며 담벼락 옆에 있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그녀가 눈에 자세히 들어왔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개 목줄 자국이 벌겋게 남아 있는 하얀 목덜미, 그리고 거친 콘크리트 바닥에 날 것 그대로 미끄러져 팔꿈치와 무릎에 서서히 퍼지고 있는 핏자국이.

유림은 괴로운 듯 발끝으로 시선을 옮긴 뒤, 고개를 숙이고 발아래 가로등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만 바라보며 물었다.

“아줌마는?”

“방에 있어. 복댕이 집에서 꺼내 주고, 그 인간 잠들면 들어오라고…. 여기 잠시만 피해 있으래.”

“씨발. 그 복댕이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되냐.”

“너 욕하는 거 듣기 싫어서 그만 들어가야겠다.”

정민이 일어나려고 하자 유림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정민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며 맥락 없이 말했다.

“지금 개구리 소리 들리는 거 맞아?”

“맞아.”

“시냇물 소리도 들리네.”

유림은 한숨을 내뱉듯 대답했다.

“하아…. 그래.”

개구리 우는 소리와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평소엔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는 소리가 가로등만 비치는 살풍경한 담벼락 아래로 찾아들었다.

한여름 밤의 정적을 깨고 유림이 물었다.

“오늘 성적표 나오는 날이었어?”

“저기요. 우리 같은 학교 다니는 거 아니었어?”

“그럼, 1등 자리… 뺏긴 거냐?”

“설마…. 그럼 개 목줄로 안 끝났을 거 같은데?”

“그럼, 또 왜 지랄인 건데.”

“오늘 혜정이가 학교에 잡지를 가져왔거든. 그거 빌려서 집에 가지고 왔는데…. 그 인간이 그걸 본 거지. 초저녁에, 집에 들어올 줄 알았나. 돈 떨어지려면 한밤중에나 기어들어 올 줄 알았지, 뭐.”

“그거 좀 보면 사범대 못 가?”

“몰라.”

“그 새끼는 어쩌다가 공무원에 미쳐서….”

“나 죽을 때까지 나오는 월급 꼬박꼬박 받아먹으려고.”

정민은 눈까지 찡긋하며 조소가 머금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유림은 실소를 내뱉었다.

“이 와중에 웃음이라는 게 나오냐?”

“그럼 울까?”

“그래! 미친년처럼 좀 울어라! 응?”

정민의 침묵을 대신해 시골 밤에 흐르는 날카로운 개구리 우는 소리만 귓전을 자극했다.

“정민아… 정민아. 응? 정민아… 우리 그냥 도망가자.”

간절하게 말하는 유림의 진심을 정민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진심과는 달랐다.

“너, 아저씨 혼자 두고 집 나갈 수 있어?”

정민은 이미 대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진 것처럼, 그의 말엔 더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제 들어가야겠다.”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등을 움직이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겨우 교복을 털었다. 옷 여기저기에서 작은 모래 알갱이가 떨어졌고 유림의 눈은 보지도 않은 채 뒤돌아서며 말했다.

“가라.”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유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방 창문을 통해 들리던 그녀의 선명한 비명에 이끌려 달려올 수밖에 없었지만, 정민 부친의 폭력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몸뚱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한심해서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

유림은 교복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7시 10분.’

두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려 하품했다. 등교 시간은 8시 20분까지였지만, 정민은 항상 한 시간 전에 집에서 나섰다. 집에 있는 시간을 일분일초라도 줄이고 싶어서일 것이다. 또한 학생이 학교에 공부하러 일찍 간다고 하면 어느 어른이 말리겠는가. 하물며 그녀의 부친도 마찬가지였다.

유림은 여느 날처럼 담벼락에 기대어 정민을 기다리고 있다. 어젯밤, 골목길에서 보냈던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시멘트를 아무렇게나 덕지덕지 바른 울퉁불퉁한 골목길 한편에 정민이 사는 주택이 있었고 담벼락에 기대어 정면을 바라보면 길가 아래로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어젯밤에 들었던 개구리 소리는 시냇물 어디쯤에서 났을 것이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로 인해 지금은 물길이 얕아 보이는 시냇물이지만 장마철에 빗물이 며칠씩 쏟아지면 시냇물을 막고 있던 둑방은 그 빗물을 감당하기 어려워 금방이라도 골목길을 지나 정민의 집을 덮칠 듯했다.

그럴 때마다 정민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비 오는 날, 내 방 창문에서 시냇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강물이 서서히 차올라 뚝방 위로 넘쳐서 골목길까지 넘실거리는 게 보여. 그러면 집안의 모든 창문을 일부러 잠그고 커튼까지 쳐. 그 인간이랑 엄마가 보지 못하게 말이야. 다들 잠든 밤이면 좋겠어. 강물이 우리 집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어 집 모든 걸 삼키는 걸 자주 상상해.’

정민은 홀로 땅속으로 꺼져 가는 유림 부친을 걱정했지만, 자신은 여차하면 회오리치는 물속에 빠질 준비를 했다.

그럴 때면, 유림은 뭐라고 했던가.

‘내가 그렇게 둘 거 같아?’

정민의 집 담벼락 뒤편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있고 그 나무 아래엔 동네 노인들이 전세를 낸 듯한 네모난 평상이 있었는데, 날이 좋을 때면 그곳에서 노인들이 부채를 펄럭이며 쉬는 걸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플라타너스 한 그루지만 존재감은 확실했다.

플라타너스를 지나, 골목길에 일렬로 있는 두세 집을 지나면 유림의 집이 있다. 유림은 1년 내내 방 창문을 열어 두었는데, 이는 정민의 집에서 나는 불쾌한 소음이 그의 방, 작은 창문 안으로 쉽게 들어오게 하기 위함이었다. 정민이 어렸을 때는 유림의 집까지 맨발로 달려와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기도 했지만,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더 이상 그렇게 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유림은 방에서 음악조차 듣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