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이제 괜찮아요. 잠깐 흔들렸던 것뿐이에요. 천천히 후, 후, 호흡해 보세요.”

은주는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마스크로 얼굴의 반 이상을 가렸지만, 그는 한눈에 봐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들썩이는 마스크 사이로는 불규칙한 호흡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남자의 목덜미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눈썹 사이의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두 눈은 무겁게 감겨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승무원이 드디어 제 쪽으로 몸을 틀자, 은주가 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여기요! 여기 환자가, 흐읍…!”

순간 커다란 남자의 손이 은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땀으로 흥건한 손바닥은 그녀의 말캉한 입술과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은주의 온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떨리는 숨을 참고 시선을 옆으로 가져가자,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가 날카롭게 꽂혔다.

***

[오늘 오전 10시 40분, 제주행 한국 항공 여객기 016편이 난기류로 인해 크게 흔들려 승객 6명이 찰과상을 입었으며….]

“아유, 난 저런 뉴스 보면 속이 울렁거려서 못 보겠어.”

“큰 사고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지.”

옆 테이블에 앉은 노부부가 티브이를 뚫어져라 보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은주는 오늘 아침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비행기가 상공에 오른 지 10여 분 지났을 무렵이었다. 덜컹 내려앉듯 하강하더니 크게 흔들렸다. 잠시 후 다시 한번 수직 낙하했다.

기내는 승객들의 비명과 물건들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둔탁한 소음으로 가득 찼다. 단 몇 초에 불과했지만, 평화롭던 비행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은주는 기억을 털어 버리듯 고개를 툭 돌려 버렸다.

“사장님! 여기 한라산 한 병 주세요.”

곧바로 테이블 위에 올려진 소주병을 몇 번 흔들고는 잔을 채웠다. 차디찬 한 잔을 단숨에 삼켜 버렸다. 곧바로 고기국수를 크게 한 입 밀어 넣고 뜨끈한 국물로 적셨다.

한 잔, 또 한 잔, 쓰디쓴 소주를 삼킬수록, 이상하게도 잔상이 또렷해졌다.

“괜찮으려나….”

남자는 기어코 승무원을 부르지 못하게 막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리고 죽은 듯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벌떡 일어나더니 도망치듯 통로 사이를 빠르게 걸어 나갔다.

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

삐빅.

삐빅.

“야, 너!”

삐빅.

“쓰읍. 진짜 혼나 볼래?”

삐삐삐삐.

이 망할 놈의 카드 키와 씨름한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들이마시는 숨에 소주 향이 깊숙하게 들어왔다. 스멀스멀 올라온 취기로 이미 온몸은 흐느적거렸다.

은주는 꼼작도 하지 않는 문에 머리를 쿵, 쿵 내리찍다가 온몸을 그대로 기대었다. 로비까지 내려갈 생각을 하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휴대폰아, 어딨니….”

눈을 감은 채 메고 있던 크로스백 안으로 손을 넣고 이리저리 휘저었다.

마침내 손끝에 딱딱하고 차가운 촉감이 닿는 그 순간,

철컥!

“어……!”

예고 없이 문이 활짝 열렸다. 마치 누군가 세게 밀어 넣은 듯 은주의 몸은 그대로 쓸려 들어갔다.

찰나의 순간이 몇 분이나 지난 것처럼 느릿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철퍼덕 카펫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어공주처럼 다소곳이 앉게 되어 치마 속까지 훤히 보여주진 않았다는 정도랄까.

바닥을 짚은 손바닥에서 통증이 뒤늦게 몰려왔다. 슥슥 문지르다 말고 눈을 크게 껌뻑였다.

내 방이 이렇게 좋았었나…?

저렇게 큰 창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져 있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뭔가 이상했다.

무엇보다 문을 열자마자 훤히 보였던 침대 대신 눈앞에는 길쭉한 소파가 놓여 있었다.

이리저리 헤매던 눈동자는 남자의 맨다리에서 멈추어 섰다.

“꺅!”

남아 있던 생존 본능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만 문고리에 허리를 세게 찧었다.

“아야… 하….”

숨이 컥 막히는 찌릿함이 뒤늦게 몰려왔다.

시야는 좁아졌지만 동공은 본능적으로 눈앞의 샤워 가운에 꽂혔다. 그리고 느슨하게 묶인 끈을 따라 서서히 올라갔다. 벌어진 샤워 가운 사이로 물에 젖은 남자의 탄탄한 가슴 근육이 보였다.

헙!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남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까만 속눈썹 아래 긴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매끈한 이마와 진한 눈썹 아래로 쭉 뻗은 콧날, 인중에서 입술로 떨어지는 라인까지 완벽했다. 어디선가 본 듯 아닌 듯한, 연예인보다 더 연예인 같은 얼굴이랄까.

‘나… 이런 으른 남자 얼굴 좋아했었네.’

이 남자, 다시 보니 키도 190쯤 되는 것 같다.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던 그때, 남자의 눈가에 구김이 일어났다. 동시에 굵직한 저음이 귓가를 울렸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겁니까.”

나른하면서도 나직했다.

“하아….”

인내심이 바닥난 듯 남자의 닫힌 입술 새로 굵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지금의 상황이 현실이라고 뇌에서 경고음을 울리는 듯했다.

“아, 아 그러니깐. 여기가 제 방이 아닌 거죠?”

이게 아닌데….

터진 입이 뇌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워서 털어 넣은 마지막 술잔이 원망스러웠다.

그의 눈매가 어이없다는 듯 좁아졌다. 남자는 손에 꼬옥 쥐고 있었던 카드 키를 신경질적으로 빼앗아 들었다. 뒷면에 각인된 숫자를 똑바로 보라는 듯 눈앞에 갖다 대었다.

그러고는 서늘함이 밴 음성으로 천천히 힘을 실어 읊었다.

“여기는 1903호. 그쪽 방은 1603호.”

“……!”

누가 내 얼굴에 불을 질렀나.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가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죄, 죄송합니다….”

그때, 남자의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건 그쪽 머리에서 나온 시나리오인가? 호텔에서 투숙객 정보는 알려 줄 수 없다고 하니깐 직접 쳐들어가 보자? 뭐, 참신하긴 하네.”

남자의 입술 끝에는 조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얼마 받았습니까. 누가 보낸 건지는 대충 알 것 같고.”

……뭐지. 이 신박한 미친놈은?

“푸흡.”

“……?”

“지금 웹소 쓰세요? 풉.”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에 남자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이런 거 웹소설에 많이 나와요. 아니, 뭐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는 모르겠는데. 푸흐흡! 방 잘못 찾아왔다고요! 아무튼 죄송합니다.”

“좀 더 그럴듯한 이유는 없습니까.”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은주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어? 혹시, 비행기? 맞죠!”

은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았다니깐요! 몸은 좀 어떠세요?”

은주가 한 걸음 다가가자, 피로가 점철된 남자의 까만 눈동자가 멈칫 굳었다.

“나가.”

서리가 낀 것처럼 냉한 목소리는 순식간에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싸늘하게 식어 버린 눈을 마주치자 은주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싹 가셨다. 절로 다리가 떨려 왔다.

나가려는데 그제야 바닥에 나뒹구는 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립밤, 거울, 손 소독 티슈부터 온갖 잡동사니가 눈치 없이 다 터져 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