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후궁) 2권
체념(후궁) 2권
체념(후궁) 2권
2권 목차


11. ~ 20.
체념(후궁) 2권
11.



*****

명월전으로 돌아온 이령은 평소와 같이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종아는 이령의 기분을 살피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머리카락을 다 말리고 난 이령은 침상에 몸을 뉘었다.

“마마, 주무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절 부르시고요.”

종아가 이령의 이불까지 덮어 주며 하는 당부에 이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겠다는 사람 곁에 더 머무를 수 없던 종아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참.”

“네, 마마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문을 열기 직전 들리는 소리에 종아의 발걸음이 빠르게 침상 앞으로 되돌아왔다.

“내일 아버님을 불러다오.”

“예, 알겠습니다.”

축하연을 열지 않겠다는 말을 전하기 위함을 안 종아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했다.

“그리고, 명월전 문을 닫거라.”

“예, 예?”

“문을 닫거라.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후궁이 황제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문이 닫힌 후궁의 전각으로 황제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역사에 따르면 한 번도 후궁 전각의 문이 닫힌 적은 없었다.

황제의 부인인 황후와 달리 황제의 사랑으로 권력을 쥐어야 하는 후궁의 입장에서 문을 닫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말로 닫아요?”

“닫거라.”

확고한 이령의 태도에 종아는 알겠다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곧이어 분주한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문을 닫으라는 명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궁인들의 발소리 같았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이령은 눈을 감았다. 회임을 한 덕에 잠아 많아지다 보니 아무리 복잡한 일이 있어도 잠드는 건 쉬웠다.

잠시 후 고른 숨소리와 함께 이령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

회임 축하연을 열지 않는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황제가 대놓고 회임한 후궁을 탐탁지 않아 했으니까. 다만, 큰 소란을 일으킬 줄 알았던 한가가 조용한 건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조정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큰 문제는 없었고 잘 마무리되었다. 윤 승상과 그의 측근들은 어떻게든 도발해 보려 했으나 조정 회의가 끝나자마자 병진은 서둘러 퇴궐을 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명월전 문이 며칠째 닫혀 있다는 말도 들려왔다. 당최 어찌 된 일인지 후궁인 화빈이 황제를 멀리하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싶었다.

법도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후궁이 아닌가.

“한가가 이번에 제대로 깨달았겠지요. 아무리 화빈이 회임을 했다 한들 황후마마께는 안 된다는 것을요.”

“그럴 겁니다. 이 같은 수모를 당했으면 바보 천치도 알아들을 겁니다.”

윤 승상의 곁에 있던 대신들이 멀어지는 병진을 보며 한 소리씩 했다. 이참에 한가가 가지고 있는 병권과 그들 휘하에 있는 사병을 해체하자는 이야기를 꺼내보면 어떻겠냐는 말까지 나왔다.

주변의 부추김에도 평소와 달리 윤 승상은 조심스러웠다.

일전의 황후궁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면 그도 지금 곁에 있는 이들처럼 생각하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빈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는! 짐뿐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황후궁에 들어서자마자 경안루에서 있었던 일을 흥분해 말했다. 화빈의 시종 중 한명이 제게 칼을 겨누었다고. 감히 시종이 관직에 있는 승상에게 칼을 들이밀다니 당장에 목숨을 거두어도 시원치 않은 일이라 소리쳤다.

치욕스러웠던 경험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솔직히 화빈에게 했던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게 사실이었으니까. 회임을 한 후궁이 듣기에 발끈할 이야기이기는 하나 어찌 되었든 황제의 총애는 황후에게 있으니 당연하게 황제가 제 편이 되어 당장에 그 시종을 처리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토록 분노에 찬 눈으로 저를 볼 줄 몰랐다. 도움을 청하려 수이를 봤으나 그녀는 제 시선을 마주하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다행히 황제는 두 번의 실수는 없어야 할 것이라며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겠다 말했다. 황제가 무시하는 후궁이라 여겼던 화빈 때문에 그토록 치욕스러운 일을 당했음에도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윤 승상, 이참에 실행하시지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글쎄요.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한가를 건드리는 일은 만전을 다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나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저는 먼저 퇴궐을 해야겠습니다.”

말을 붙여오는 이들을 피해 윤 승상은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황제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 전까지 함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한 행동이다.

빠르게 사라지는 윤 승상의 뒷모습을 모두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

집무실에 쌓여 있는 상소문을 손에 집어 든 윤은 제대로 읽히지 않는 글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집중을 하려 해도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에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벌써 같은 상소를 몇 차례나 다시 읽는 중이었다.

탁, 도무지 읽히지 않던 상소를 내려놓은 윤이 고개를 숙였다.

벌써 며칠째 닫혀 있는 명월전은 열릴 기미가 없어 보였다. 이령이 축하연을 열지 않겠다고 한 그날 밤. 바로 명월전을 찾았다가 닫혀 있는 문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그리도 서운했을까. 이령의 입에서 직접 축하연을 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윤의 곁으로 오 상선이 다가왔다.

“폐하, 오후에 있을 내금위 훈련은 어찌할까요.”

“내금위?”

“예, 오늘 오후에 훈련 모습을 보시겠다 지난주에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랬지.”

넋 놓고 있는 그의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이령이 죽어있던 동안 종종 그는 멍하니 있었다.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상념에 사로잡힌 채.

“준비하라 이를까요?”

미리 내금위에 알리기는 했으나 그의 반응으로 보아 가지 않을 수도 있어 보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윤은 준비하라 일렀다. 명월전의 일로 계획했던 일이 틀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윤은 황제로서 일을 해야 한다. 개인적인 일로 일정에 지장을 주어선 안 되었다.

일정대로 움직인 윤은 내금위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고 내금위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훈련의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황제에게 그간의 훈련 성과를 보고 하는 내금위장의 얼굴엔 자랑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