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후궁) 1권
체념(후궁) 1권
체념(후궁) 1권
1권 목차


1. ~ 10.
체념(후궁) 1권
1.



*****

지독한 굴레에 갇혀 버렸다.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모두 헛수고였다. 되풀이되는 삶 속에 갇힌 그녀는 또다시 찾아올 죽음을 기다렸다.

이령은 눈을 감은 채 고집스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마마, 나가 보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진노하실 것이옵니다.”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창호 문을 힐끔거리는 종아는 불안에 떨었다. 이령의 뒤로 황태후와 그녀의 집안이 있다 해도 떠나는 황제와 황후에게 후궁이 인사를 하러 나가지 않는 건 법도에 어긋난 일이었다.

“마마.”

종아의 성화에도 이령은 입안 여린 살만 깨물었다.

어차피 나가든 나가지 않든 그녀의 죽음은 막을 수 없을 테니. 살아보려 갖은 노력을 했건만 하등 소용없는 짓이었다.

죽기 삼 일 전. 행궁으로 향하는 날 아침으로 되돌아오는 삶은 참으로 지독했다.

지금이 딱 35번째 삶이었다.

이령은 말없이 손가락에 끼워진 옥 가락지를 매만졌다. 그녀의 탄신일에 황제와 나눠 낀 가락지였다. 물론 그녀가 그에게 선물한. 성대하게 준비해 준 황후의 탄신 연회와 달리 이령의 탄신일을 그는 챙기지 않았다.

그런 황제에게 그녀의 생일이니 받아 달라며 건넸던 반지는 영롱하게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끼지 않았지만 나눠 가진 것에 의미를 두었는데.

-황제 폐하 납시오.

“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나 봐요. 어떡해요.”

자리에서 일어난 종아가 울상인 얼굴로 이령을 쳐다봤다.

“몸이 좋지 않다 전하거라.”

“마마, 정말 큰일 납니다.”

큰일은 무슨. 이령은 가락지만 만지작거리며 두려운 마음을 애써 누를 뿐이었다. 34번의 죽음을 맞이했으나 죽는 순간의 두려움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매번 아팠고, 매번 무서웠다.

황제와 황후가 행궁으로 떠나고 밤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그녀는 죽었다. 칼에 찔리기도 목을 졸리기도 화살에 맞기도 했다. 그녀가 위협을 받는 방법은 다양했으나 결론이 죽음이라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종아가 밖으로 나가고 홀로 남은 이령은 윤이 들어와 주기를 바랐다. 그녀가 몸이 좋지 않다고 했으니 확인을 핑계 삼아 들어와 호통을 치든 걱정을 하든 그 무엇이라도 해주었으면 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와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이번 생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황후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후궁이 황후에게 가마를 양보하는 게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너는 행궁으로 오지 말고 황궁으로 돌아가거라!

성이 난 호통이 방 안으로 흘러 들어와 이령의 귓속으로 박혔다.

이후 성난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까지 듣고 나니 이령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한 번은 보고 가시지….”

곧이어 황제와 황후가 행궁으로 출발 하는 소리가 들렸다.

“행궁에 도착하고 나면 바로 마마의 가마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몇 시진만 기다리면 되셔요.”

몇 시진이라. 이령의 입에서 힘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랑 나가서 장터 구경이라도 할까요? 어차피 다들 이곳에 마마가 남아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겁니다.”

어떻게든 이령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종아였다. 제 상전의 성정상 이렇게 조용한 게 말이 되지 않아 정말로 어디가 아픈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 몸이 안 좋으십니까? 의원을 불러올까요?”

이령은 가락지를 보던 시선을 들어 종아를 봤다. 어릴 적부터 제 시종이던 아이는 황궁까지 함께 들어왔다. 생이 끝날 때마다 그녀를 마지막까지 지키려다 먼저 죽던 아이.

“종아야.”

“예, 마마. 의원을 불러올까요?”

집안의 장녀로 태어난 종아는 동생만 내리 다섯이라 했다. 오래전 돌았던 역병에 부모 모두를 여의고 동생들의 보호자이자 집안의 가장으로 한씨 집안 시중을 들어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가장 어린 막냇동생이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네 고향이 이 근처라고 했지?”

“예? 예, 마마. 둘째 동생이랑 막내가 이 근처에서 살고 있습니다.”

“보고 싶진 않느냐? 우리 집에 들어와서 휴가 한번 가는 걸 본 적이 없던 것 같은데.”

이령의 말이 의외였던 종아는 벙찐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보고 싶습니다. 막내가 벌써 8살이라고 합니다. 정말 조그마한 아기였는데 지금은 어찌 컸을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어머니를 닮았을지 아버지를 닮았을지.”

그리움이 눈에 가득 들어찬 종아의 모습은 이령에게도 전염되는 듯했다.

이령의 말소리가 없자 종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마마와 함께 있는 것도 좋습니다. 봉급도 많이 주시고 대장군께서 따로 저희 집으로 먹을거리도 많이 보내주시고 합니다.”

여기서 만약 그녀의 죽음이 마지막이라면 어쩌지.

이번 죽음으로 진짜 삶이 끝난다면. 종아의 동생들은 가장과 누이를 잃을 것이다. 비록 막을 수 없는 죽음이었을 테지만 그녀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종아의 동생들에게 해를 가할 수도 있었다.

불현듯 이번 생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죽음을 체념했던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이령이 문밖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소란스럽게 출발을 알리더니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당이 휑했다. 대문 밖까지 빠르게 나가는 이령의 뒤를 종아가 쫓았다.

“마마!”

대문 앞, 멀리 황제와 황후의 가마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여름이었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푸른 나무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까지. 이령은 멀어지는 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래도 보았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내일이면 뵐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어서 들어가셔요. 햇볕이 뜨겁습니다.”

종아의 걱정 어린 말에도 이령은 윤이 탄 가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멀리 그의 형체가 아지랑이처럼 보일쯤 윤의 고개가 잠시 제게로 향했던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럼 장터를 먼저 갈까요? 아니면 이 근처에 있다는 연못 구경을 갈까요?”

어떻게든 가라앉은 이령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종아는 일부러 눈을 반짝였다. 사가에 있을 시절 이령이 좋아하던 것들이었다. 사람 많은 장터나 물 위에 있는 연꽃 구경이나.

허나 이령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 오늘 나가지 않을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