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지럽게

#1

“결혼하고 싶어.”

앞에 놓인 커피 잔을 향해 손을 뻗던 다은이 멈칫했다.

그녀의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신랑 양재준, 신부 강다은’이라고 적힌 청첩장을 며칠 전에 돌렸다.

9년의 연애 끝에 당연한 수순처럼 결혼이라는 결실을 코앞에 두고 있건만.

또 결혼이라는 단어를 거론한다고?

‘프러포즈?’

기대와 걱정이 교차한 다은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런 거라면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예쁜 원피스에 완벽한 화장으로 감동을 연출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여긴 회사 근처인 데다 그녀의 복장은 유니폼.

장소는 흔하디흔한 커피숍이다.

역시 이건 아니라는 눈치를 줘야….

“그 사람 사랑해.”

못다 한 말을 삼킨 다은의 머릿속이 정지했다.

사랑과 결혼.

단어만 놓고 보자면 로맨틱한데, 그 사람이라니?

적어도 다은의 이름은 ‘그 사람’이 아닌데?

손끝이 떨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말 그대로 나,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얼핏 요구처럼 들렸지만, 통보였다.

떨리던 손끝에 힘이 들어가고 뒷덜미가 싸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탓에 빈속이 울렁거렸다.

장난일까?

“너도 알다시피 나, 참는 거 못 하잖아. 억지로 하는 건 더 그렇고.”

아니구나.

일말의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든 재준이 세상 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속이고 결혼하면 너한테 상처 주는 거라 그건 좀 아닌 거 같더라. 이해해 줄 거지?”

이해? 어떤 부분을?

눈으로 많은 질문을 던지는 중인 다은을 보고도 재준은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쪽에서 뭐라도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이란 소리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다은이 말에 재준은 특유의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감정과 별개로 공적으로 미안한 척해야 할 때 드러나는 그런 표정 말이다.

“네가 양보해 줬으면 좋겠어.”

뭐? 양보?

기가 막혀 헛숨이 터져 나왔다.

9년을 사귄 남자가 예식을 한 달 남짓 앞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모자라 결혼까지 하겠다고 통보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나.

“오빠, 농담이라면 이거 너무 심한…….”

“널 보면 이제 가슴이 뛰지 않아.”

다은의 미간에 주름이 팼다.

“이 나이에 사랑 타령하는 거 우습지만, 그 사람만 보면 가슴이 뛰어. 나도 아직 사랑이라는 걸 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할 만큼.”

덕분에 지금 다은의 가슴이 터질 것 같다는 걸 재준은 알까?

“오빠랑 나랑 9년을 함께하면서 한 건 사랑 아냐?”

재준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일상이지.”

순간 다은의 눈에 앞에 놓인 커피 잔이 들어왔다.

“우리 한 달 뒤에 손님들 모셔 놓고 백년해로할 거라고 약속해, 이미 청첩장 다 돌렸다고!”

카페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예의를 차릴 겨를이 없었다.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커피 잔을 무시하려 주먹을 꽉 쥐었다.

물론 재준의 눈에 다은이 쥔 주먹은 다른 의미로 보였을 것이다.

“이러지 말자, 다은아. 우리 쿨하게…….”

“어머님 반대를 어떻게 설득해서 얻은 결혼인데! 잊었어?”

재준의 현실감을 돌이켜 주고 싶은 다은이 입에 담기도 싫은 ‘어머님’을 뱉었다.

그런데.

“허락하셨어.”

“하?”

다은의 입꼬리가 기분 나쁘게 비틀렸다.

잊고 있었다.

양재준이라는 남자가 강다은이라는 여자에게 먼저 양해를 구할 사람이 아님을!

당당히 파혼을 얘기할 땐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건데, 그걸 놓치다니.

급이 맞지 않는다며 다은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재준의 어머니다. 결혼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니, 이 파혼이 얼마나 기뻤을까?

재준의 말을 듣고 좋아했을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자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집구석 자체가 쓰레기구나?”

“강다은! 말이 좀 심하다?”

“심해? 결혼 앞두고 딴 여자 생겼다고 파혼하자는 넌!”

“아무리 기분 나빠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거야.”

“선? 서언? 지금 선이라고 했어?”

되묻는 다은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싶었지만, 뻔뻔한 재준의 논리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피로연 와인으로 어떤 걸 고를까 의논하던 사람이 갑자기 딴 여자랑 결혼하겠대. 이게 오빠가 말하는 선이니?”

“다은아.”

“그딴 말을 하고도 나한테 이해를 바라는 쓰레기를 쓰레기라 말한 게 심하다고? 내 앞에서 그런 말이 나와?”

이렇게 현실을 짚어 줬으면 입을 다물어야 정상이건만.

“넌 사랑 없는 결혼이 하고 싶어?”

재준은 개새끼라 다물지 못했다.

“다 널 위해 결정한 일이야. 모르겠어?”

파혼이? 아니, 그걸 다 떠나서 날 위한 결정이었다고?

“하? 하하, 진짜 어이없어서. 그럼 바람도 날 위해 피웠니? 나 때문에 ‘그 사람’인지 뭔지를 만났어? 어!”

아직 못다 한 말이 목구멍에 박혀 있는데 재준이 비장하게 말을 가로챘다.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 엄마가 왜 허락한 줄 알아?”

안 하려던 말이라면 다짐대로 삼키는 게 예의다. 그게 상대를 위한 배려의 기본이니까.

하지만 그런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재준은 질색하는 표정까지 연출해 가며 자기가 얘기한 그 선이라는 걸 넘어 버렸다.

“9년쯤 만났으면 결혼 전에 손자 한둘은 안겨 줬어야 정상 아니냐더라. 이건 너한테 문제 있는 거라고. 혜린인 만난 지 1년도 안 돼서 임신……!”

떠들어 대던 재준이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배려의 기본 따윈 가볍게 말아 먹은 재준이 할 법한 짓이었다.

구구절절 떠들어 대니 쓸데없는 정보를 발설하지 않나.

알고 싶지 않은 ‘혜린’이라는 이름과 둘 사이의 아이까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다은이 앞에 놓인 커피 잔으로 손을 뻗자 동시에 재준이 밀린 숙제를 해치우는 표정으로 제 얼굴을 내밀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으니까, 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얼굴 한쪽 내주는 걸 각오까지 해야 할 일이란 말이지?

“네가 하라 했어.”

얼음이 가득 든 두꺼운 유리잔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재준의 얼굴에서 산산조각 났다.

“으아아악! 뭐 하는 거야, 강다은!”

놀란 재준이 얼굴을 감싸 쥐며 소리쳤다.

“각오했다며. 하도 쓰레기 같은 소리만 지껄이길래 이런 엔딩은 예상한 줄 알았는데?”

감싼 재준의 손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피… 피! 야 이, 강다은! 너, 너! 이 미친! 네가 이러니까 파혼당하는 거야, 알아?”

악을 쓰는 재준을 무시하고 돌아선 다은이 카페를 나섰다.

유리문에 비친 얼굴이 눈에 띄게 얼룩져서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다. 지금 울면 머저리가 돼 버리니까.

고집스럽게 입술을 깨물며 거세게 유리문을 민 다은이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기분과 상관없이 날씨는 짜증 날만큼 화창했다.

“개새끼!”

눈두덩이 자꾸만 뜨뜻해져 필사적으로 바닥을 쏘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