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 잘하는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외롭게 살아왔지만 티 안 내고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너를 만나면서부터 그 믿음이 깨어진 것 같다.

너를 처음 만났던 건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래, 그때 첫눈에 반하게 되었다.

너는 내 세상에 갑자기 나타난 빛나는 사람이었다.

너는 어땠을까.

나를 주울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나는 그 순간에도 모든 것이 좋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너의 눈빛이, 목소리가, 미소가 너무 따뜻해서,

그게 나만을 위한 것이기를 바랐고,

아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착각은 참 달콤했다.

수많은 착각으로 인해,

내 감정은 어느새 충치처럼 썩어 있다.

그러지 말걸. 그러지 말걸 그랬다.

나는 네가 아닌 나부터 사랑해 줬어야 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당연한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1

쏴아아아.

빗소리에 눈을 떴다.

방 안이 빛 하나 없이 깜깜한 걸 보니 벌써 늦은 저녁 시간인 듯했다.

“세상에… 몇 시간이나 잔 거야?”

원래 낮잠만 잠깐 자려고 했던 건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커튼을 슬쩍 열어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어두워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커튼을 신경질적으로 닫고 1층으로 내려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감기약을 집어서 살펴보았다.

“미쳤다… 진짜. 이 정도면 수면 유도제 아냐?”

어젯밤 가인이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으슬으슬 오한이 느껴져 급한 대로 편의점에서 사 온 약이었다. 이 약이 금쪽같은 내 주말의 반나절을 홀랑 뺏어 먹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조금만 더 참을걸.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월요일에 연차를 내고 병원을 갔을 텐데.

서둘러 물고기들에게 밥을 주고 나니 갑자기 나도 허기가 졌다. 냉장고를 뒤적거리며 나만의 시차 적응을 하고 있는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굳이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가인이겠지.

어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가인이가 언제부터 서희우를 좋아했던 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처음부터라고 대답했다.

사실이다. 그 대답은 낭만적인 상황으로 각색하기 위해 꾸며내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날짜 같은 건 이미 잊힌 지 오래여서 말을 못 했을 뿐, 처음 본 순간부터, 그러니까 아주 오랫동안 좋아한 건 맞다.

나의 대답을 듣자마자 가인이는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 모습은 나 자신이 느끼기에도 너무나도 담담했다. 설레어하는 표정 하나 짓지 못한 채 내 감정을 담담히 꺼내어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글쎄….

아마도 내가 한 것이.

아주 오래된 짝사랑이어서일까.

“하…….”

정신없이 울리는 벨 소리를 뒤로하고 얼굴을 가만히 냉장고에 묻었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라도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창문만 열면 겨울바람을 느낄 수 있지만 나 혼자 있을 땐 그럴 자신이 없어. 겨울은 그 자체로도 그때의 너를 생각나게 하고,

나를 더 외롭게 하거든.

집 안에 가득한 침묵이 혼자인 나를 더욱 무겁게 내리누른다. 내 머릿속은 지금이 기회라는 듯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죽이기 위해 묻어 놓았던 그 감정을 날카로운 이성으로 긁어 꺼내어 영화처럼 상영하기 시작한다. 덕분에 내 마음은 다시 피범벅이 되어 있다.

천천히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누가 봐도 초라해 보이기 그지없는 이 자세는, 내가 내 사랑을 관람할 때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였다.

정확히 언제였더라… 널 만나게 된 게.

그래.

당신을 처음 만났던 건 10년 전,

지금처럼 추운 어느 겨울날이었지.

그날도 아버지께 엄청 맞았던 날로 기억한다. 도중에 아버지를 밀치고 도망쳤었는데, 막상 갈 곳이 없어 골목길에서 한참을 서럽게 울었었지.

그러다가 방학이라 사람이 없을 것 같은 학교 운동장이 떠올랐고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었던 것 같다. 그렇게 도착한 운동장은 내 예상대로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채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는 듯했다.

“이곳에 있으면 내 상처를 아무도 보지 못하겠다.”

그 이후로는 돌계단에 앉아 맞은 곳 위에 눈을 올려 찜질하는 데에만 열중했다. 개학이 얼마 안 남았기에 교복을 입었을 때 보일 만한 곳들은 어떻게든 빨리 멍을 빼야 했다. 다리 위에 눈을 뭉쳐 올려놓고 녹으면 털고 옷소매로 닦고 다시 눈을 뭉치고… 얼마나 반복을 했으려나.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추워?”

처음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야, 누가 다가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언제 온 거지? 혹시 다 봤나? 설마 나한테 질문한 건가? 여기엔 나밖에 없으니 나한테 묻는 거겠지?

“안 추워?”

상대는 내가 듣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다시 질문해 왔다.

“추워.”

대답은 겨우 했지만 얼굴의 상처를 들키고 싶지 않아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근데 왜 돌계단에 그냥 앉아 있어? 신발도 제대로 안 신고.”

“신발 신었는데….”

“그건 슬리퍼잖아. 다리 위엔 왜 눈을 올려놓고 있어?”

“…….”

“응?”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내가 사실 그대로를 말한다 해도 이해는 할 수 있을까?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무엇이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지 수없이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러다 결국 내가 내놓았던 답변은,

“내가… 내가 태음인이라 열이 많아. 그래서 가끔 이렇게 해줘야 해.”였다.

지금 생각해도 또라이 같은 답변이었다. 대답이 너무 허술하기도 했고, 그 말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그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들켜버렸기 때문이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상대방이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좋지 않은 타이밍으로 갑자기 찬 바람이 불면서 내 얼굴을 가려 주던 머리카락들이 길게 휘날렸다. 내 옆에 그 사람이 우뚝 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히 굳어 버린 채 앞만 보고 있었지만 상대방도 내 옆에 가만히 멈춰 선 채로 나를 보고 있다는 게 너무 잘 느껴졌다.

“…….”

“…….”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끝에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짓말.”

민망함에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척 가만히 있었다. 그냥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이 상황이. 이 사람이.

“우리 집에 갈래?”

“…뭐?”

상상도 하지 못한 그 말에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던 것 같다.

단정하게 정리된 듯한 검은색 머리.

그 속 쌍꺼풀 없는 길쭉한 눈.

희고 깨끗한 피부와 반듯한 입매.

아랫입술에 점 하나.

뱀파이어가 정말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딱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처음 본 너의 얼굴이 어찌나 내 마음에 깊게 박혀 버렸는지 나는 그 얼굴을 20대 끝자락이 되어서도 잊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몇 걸음 떨어져 서 있는데도 나를 찬찬히 살펴보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눈빛이 참 맑은 사람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