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트북 가방을 들고 횡단보도 앞에 서서 경기장 쪽으로 바라보고 있던 은수.

액션 영화처럼 질주하는 차가 은수 쪽으로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달려왔다.

가방이 회오리처럼 하늘 위를 사뿐히 날아갔다.

쿵. 커튼이 열리듯 컴컴했던 시야에 노트북이 확대한 것처럼 들어왔다.

이건 내가 기자가 된 후 1년 만에 큰맘 먹고 산 노트북.

‘액정 수리비만 70만 원인데!’

눈을 뜨자마자 전남편이 죽을 때까지 무덤에도 가져가라던 애지중지한 노트북 수리비가 걱정이다.

“기자님? 그때 오셨던 그분 맞죠?”

뽀얀 얼굴에 날렵한 눈매, 네이비 색 슈트를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눈을 뜬 지가 얼마 안 된 은수는 따가운 햇빛에 비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조금 더 선명하게 알아차렸다.

‘뭐야? 이 인간이 왜….’

“지난번 예선 때 기자님 잠시 뵀었는데…. 저 윤후인 선수 에이전트 이희준입니다.”

희준이 건넨 명함만 뚫어지게 보는 은수 이름 세 글자만 봐도 사무치게 싫었다.

은수는 어떻게든 희준과 눈 마주침을 피하려고 애썼다.

“얼마나 많은 분들을 만나시겠어요. 기자님. 이제부터 기억해 주시면 되죠. 근데 얼굴이 더 작아지셨어요.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이.”

희준이 병에 든 비타민 음료수를 건넨다.

넉살 좋은 웃음까지. 은수가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제는 더 이상 은수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게 하지 않는 색깔이 없는 미소.

‘설마. 설마 아니겠지….’

전생도 다음 생애에도 보고 싶지 않은 전남편을 다시 만난 거다.

“후인 선수가, 오늘 드디어 선발 출전에 풀 타임입니다. 기사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꾸벅 90도로 인사하는 희준.

첫 만남 때와 똑같이 말한다. 소름 돋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욕이나 시원하게 해주고 싶지만.

이건 다른 생인 것 같으니.

“아시겠지만. 기사는 원래 선수들이 잘하면 좋은 기사가 나오죠. 그리고 저희 이런 거 받으면 안 돼서요.”

차갑게 은수가 비타민 음료수를 희준이 들고 있던 가방에 버리듯 넣어 버렸다. 희준의 얼굴은 당황한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닌 마치 예상하지 못한 골을 못 막은 골키퍼처럼 사색이 됐다.

‘상상도 못 했겠지…. 과거엔 예의 차리느라 이런 말을 한 번도 못 했으니까. 이젠 아니라고!’

은수가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품고 있던 그때 등장한 남자. 구릿빛 피부에 태평양 어깨의 다부진 몸에서 느껴지는 포스가 엄청났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사뿐히 다가왔지만 묵직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은수는 압도당했다.

분명 희준과 처음 만났을 때도 같이 봤던 것 같은데 이런 이미지였었나.

일에만 미쳐 선수 보기를 돌같이 한 덕분에 어떠한 선수도 남자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다 아리따운 여친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으니.

이희준이 다른 곳을 볼 틈을 안 준 것도 맞고.

“형, 그때 보내준 파일 다시 좀 보내줄 수 있어? 인터뷰 전에….”

눈치로 먹고사는 희준답게 사색이 된 얼굴을 싹 거둔 채 후인의 팔을 잡으며 인사를 시켰다.

“후인아, 인사해야지. 스포츠 워크의 지은수 기자님.”

“기자님, 안녕하세요. 윤후인입니다.”

후인이 핏줄이 곧 튀어나올 듯한 단단하게 근육이 그림 같은 팔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손의 온기가 참 따뜻했다. 투박하고 거친 외모와는 달리.

“안녕하세요, 지은수 기자입니다. 오늘 경기 잘하세요.”

미리 써 놓은 대본처럼 얘기했다. 확실히 긴장했다.

희준이 또 넉살 좋게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호탕한 웃음소리를 냈다.

웃음소리조차 소름 끼친다고 생각하며 은수는 후인의 태평양 어깨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왠지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저 든든한 어깨만 있으면 다 감싸 안고 같이 뛰어들어 줄 것만 같은 꿈같은 희망이 보였다.

‘그날로 돌아온 거다….’

플랫폼에 들어오는 지하철을 놓친 것처럼. 소중한 걸 놓쳤던 그때.

은수는 이번엔 그 열차에 꼭 타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후인에게 시선을 뺏겨 버린 은수는 책상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똑똑, 지은수. 복귀하니까 어때. 글이 술술 써져? 얼굴이 왜 그래. 창백한데? 어디 아파?”

“어. 선배, 아프진 않은데… 근데 빵집은 어쩌고 오셨어요…?”

너무 익숙한 얼굴이라… 2024년 상황에서 했던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빵집은 무슨 빵집. 많이 아픈가 본데? 오늘은 회사 가지 말고 현장 퇴근해. 내가 국장님한테 얘기할게.”

은수에게 기회도 주고, 힘들 때 감싸 주던 은인인 선배를 경기장에서 다시 만났다.

2024년에 선배는 결국 회사 정치에 밀려 자진 퇴사를 했고, 좋아하던 빵을 파는 빵집 사장님이 됐었다. 은수는 기어코 선배가 빵을 배달해 주겠다는데도 매일 아침 빵집에 가서 빵을 사서 출근했다.

그래야 기사 쓰는 하루를 선배 몫까지 든든하게 두 배로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렇게 마음의 빚이라도 갚아 보고 싶어서….

“선배, 오래오래 같이 일해요. 꼭. 빵집은 할아버지가 돼서도 할 수 있잖아요.”

“내가 빵집을 차린다는 말을 했었나? 벌써 내 은퇴 설계까지 해주는 거야? 나 아직 빵집 하기엔 젊다.”

“그러니까요, 선배. 아직 젊으니까 그만두면 안 돼요.”

“알았어. 근데 너도 좀 빵이든 뭐든 많이 먹고. 맨날 커피만 마시지 말고. 너야말로 오래오래 다녀. 이제 네가 후배도 가르치고 해야지.”

선배를 보고 문득 떠오른 휴대전화. 눈 뜨자마자 돌아온 과거에 적응하랴 희준의 공격을 수비하는데 온 정신을 다 쏟은 은수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전화의 존재도 잊고 있었다.

2021년 단독과 기사 조회 수로 포상금을 받고 바꾼 휴대전화.

희준과 만나기 전이라 희준의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고, 랭킹에 오른 캡처한 기사와 축구장에서 기념으로 찍은 사진 등 일에만 몰두했던 지난날이 고스란히 멈춰 있었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바꾸지 않았던 은수의 날것 그대로의 과거였다.

치열했지만 비참했고, 바스러진 낙엽처럼 낡고 메마른 날들은 더 이상 없다. 그런 미래를 상상해 본 적도 없었던 2021년이기에 미래는 바꿀 수 있다. 2회 차니까.

‘저 인간 저렇게 매너 좋은 척하면서 나한테 다가왔었지.’

은수의 애장품인 노트북 가방, 물 한 병도 못 들게 했던 남자 이희준.

은수는 축구 경기장에 살다시피 기사를 쓰면서 연애도 축구장에서 하게 됐다.

에이전트라고 넉살 좋게 다가오더니 시종일관 살갑게 챙겨 주고, 그런 희준의 모습이 듬직하고 안정감이 있어 은수는 결혼을 결심했다. 기자란 직업도 주말이고 밤낮이고 경기장에 사느라 바빴지만, 희준도 만만치 않게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잦았다. 두 사람의 대화도 부쩍 줄어들어 갔다. 거의 방만 쉐어 하는 룸메이트였다. 우리 부부 사이는.

어느 여름날, 샤워를 오래 하고 나왔는데, 남편이 집을 잠시 비웠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휴대전화 불빛만 반짝인 채.

불빛에 이끌리듯 은수는 휴대전화에 시선을 붙였다.

휴대전화 배경 화면에서 웃고 있는 은수와 희준의 결혼사진 위로 연맹 회장님이라는 이름의 메시지가 낙서하듯 미끄러졌다.

[보낸 사람 - 연맹 회장님.

내일 뮤지엄 앞인 거지?

자기가 사준 거 입고 갈게. 내일 봐. 내 꿈꿔.]

‘스포츠 캐스터가 연맹 회장님이 됐네. 참 창의적이다. 그래.’

은수는 아내의 직감으로 진작에 알고 있었다.

평생 한 가지 향만 쓰던 인간이 향수를 자주 바꿨고, 외출했는데 옷도 어디서 세탁한 듯이 뽀송해 있었다. 무엇보다 은수와 경기장에서 동고동락했던 캐스터와 눈빛을 주고받는 걸 목격한 날에는 더 이상 배신감, 분노라는 감정은 메마른지, 오래고 그저 그들과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가 되고 싶었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