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하고도 위험한 고백

# 1장

음식점 안은 이미 한참 전부터 왁자지껄했다.

얼마 전 꽤 높은 시청률로 종영한 드라마 팀 종방연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잘 나온 시청률 덕분에 감독과 배우들의 표정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스태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감독님, 한 말씀 하시죠.”

“에헤이! 됐어. 굳이 뭐 이런 날까지…….”

말과는 달리 어디에서든 나서기 좋아하는 감독의 성향을 이미 파악해 둔 조연출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말을 이어갔다.

“아니, 이런 좋은 날 감독님이 한 말씀 해주셔야죠.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조연출이 유도한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들이 환호하자 감독은 턱을 쓸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짧게, 아주 짧게 한 말씀 하시죠.”

감독을 따라 재빠르게 일어선 조연출이 안내하듯 잡아끌자, 감독은 못 이기는 척 큰 몸을 이끌고 가운데 자리로 어기적어기적 움직였다.

감독이 중앙에 자리를 잡자, 주변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은 감독에게로 집중되었다.

“흠흠, 이런 날 괜스레 길게 말했다가는 눈치 없는 사람이라고 놀릴 테니 아주 짧게 하겠습니다. 우선 드라마 시청률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나왔다는 게 무엇보다도 기쁘고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온 건 다 같이 고생하며 찍은 우리 배우님들과 밤낮 가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고생해 준 스태프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을 마친 감독은 아쉬운 눈빛을 하고는 조연출의 귀에다 뭐라고 속삭였다.

아무래도 말을 시작하고 보니 그새 하고픈 말이 더 생긴 모양새였다.

분위기상 말은 여기에서 깔끔하게 끝내는 게 딱 좋을 듯했지만, 막상 자신이 이끌었으니 뜯어말릴 수도 없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말이 좀 길어졌는데요. 아무튼 촬영하는 내내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낼 수 있어서 그것 또한 무척 기쁩니다. 이 기쁨을 여기 계신 모든 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자, 마음껏 드십시오.”

자신의 말대로 더 길어지면 꼰대라는 소리 듣기 십상일 거로 생각해 이쯤에서 아쉬움을 접기로 했다.

그간 마음에 품고만 있었던 회포를 이렇게라도 밝힐 수 있다는 데 의미를 두는 것도 나름 좋을 듯했다.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든 감독은 고마운 마음을 인사로 대신하자 여기저기서 화답하듯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흡족함에 절로 광대가 솟아올랐다.

종방연에 참석한 주연 배우, 조연 배우 그리고 스태프 모두에게 자신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 것 같아 감독은 감개무량하기만 했다.

아련한 눈빛으로 쭉 둘러보니 그중 몇몇은 아직도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들을 한 번 더 깊이 아로새겼다.

어쩌면 차기작에서도 인연을 더 이어갈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1차, 2차 아니 3차까지도 준비되어 있으니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감독의 말에 식당 안 분위기는 한껏 고무되었다.

“시청률이 17%가 넘었다잖아. 더구나 요즘처럼 공중파, 지상파 할 것 없이 엄청난 채널 중에서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며? 우리 이러다 포상 휴가까지 가게 되는 거 아니야?”

배우 팀들과 가장 멀찍이 앉은 메이크업 팀 소속인 해연은 제 옆에 앉은 은재를 향해 낮게 소곤거렸다.

“글쎄? 그거야 모르지 뭐. 설사 보내준다고 해도 설마하니 우리까지 보내주겠어? 난 포상 휴가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건 그렇고 집에나 얼른 갔으면 좋겠다.”

“포상 휴가? 꿈도 야무지다. 그렇게 공짜 바라다가 머리 훌러덩 벗어진다. 아예 기대도 하지 말아라.”

“치이, 그냥 해본 말이거든요. 그리고 여자는 대머리 없어요. 하여튼 부원장님은…….”

구시렁거리던 해연은 희연이 자신을 향해 곱게 눈을 흘기고는 제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놓자, 입술을 한데 모아 삐죽거렸다.

“하여튼 부원장님은……. 내가 뭘?”

희연이 해연의 말끝을 잡고 되물었다.

“아니, 그냥 희망 사항을 말해 본 거라고요. 말도 못 하냐고요.”

“내가 항상 강조하는 게 뭐야. 말해봐.”

“그거야……. 시청률이 예상보다 훨씬 잘 나왔다고 다들 무척 좋아하시길래 그냥 말해 본 거라고요. 시청률도 잘 나와 그만하면 화제성도 엄청나. 아는 사람한테 들으니까 잘하면 해외에도 팔릴 것 같다는데. 이 정도면 제작사에서 보내줄 만도 하잖아요.”

“그놈의 설레발. 정해연, 제발 그 방자한 입 좀 다물지? 은재 말대로 설사 보내준다고 해도 우리까지 보내줄 리 만무하지.”

희연은 더 따끔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모두 모인 자리인 만큼 해연이 알아들을 정도로 끝냈다.

‘아무래도 저 가벼운 입 때문에 언젠가는 사달이 나도 나겠어. 그렇게 말조심하라고 해도.’

희연이 이 바닥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저변에는 이런 철옹성 같은 철칙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나, 이런 대외적인 장소에서의 말조심은 필수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술자리에선 방심한 나머지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말실수로 이어져 분위기도 망치고 일까지 그르치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러니 입단속을 할 수밖에.

“왜요? ‘괜한 기대는 금물이야. 원래 기대가 크면 실망은 배로 더 큰 법이거든. 아, 그리고 말이야. 정해연, 너 그렇게 입 가볍게 놀렸다가는 조만간 사달 나겠어.’ 그 말이 하고 싶으신 거죠?”

해연이 마음 상한 듯 여전히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은재만 예뻐라 하는 부원장을 향한 해연 나름의 귀여운 투정이었다.

“해연아. 오늘따라 왜 이래. 그만해.”

싸한 분위기에 난처해진 은재가 해연을 만류했다.

“어쭈,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한다. 그동안 내가 틀린 말 한 적은 없잖아? 있어? 있으면 어디 말해 봐.”

“없어요. 없기야 하지만요.”

“그런데 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부원장님은 저만 미워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 꼭 부원장님 전용 북이 된 것 같다고요. 부원장님, 혹시 부부싸움 하셨어요?”

말하고도 민망해 고개를 홱 돌리던 해연은 은재와 눈이 딱 마주치자, 콧잔등을 잔뜩 찡그린 채로 입만 뻐끔거렸다.

‘내가 뭘. 나이도 한참 많은 아줌마가 귀는 무척 밝아요. 아휴! 저 잔소리 대마왕.’

입 모양이 딱 그랬다.

그제야 은재는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염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장난기가 다분해 보이는 해연의 표정을 본 은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해연은 은재의 웃음 버튼이었다.

어쩌면, 다른 업계보다도 특히나 텃세가 심한 곳이 바로 이 업계일 것이다.

은재가 이 바닥에서 이만큼 잘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해연 덕분이었다.

아주 가끔은 푼수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말이다.

동기인 해연의 따뜻한 마음과 재기발랄함 덕분에 힘든 일도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문득 해연이 고마웠다.

“뭐. 전용 북? 부부싸움? 아주 못 하는 소리가 없어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들 드시기나 하셔.”

“전 아까부터 먹고 있었는걸요?”

“아주 한마디를 안 져. 자, 고생 많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다들 꿋꿋하게 잘 버텨줘서 정말 고맙다. 자, 짠.”

희연이 잔을 높이 들고는 ‘짠.’을 외치자, 팀원들도 희연을 따라 이내 우르르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원샷이다.”

은재도 앞에 놓인 소주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동안 잔뜩 긴장하며 보냈던 자신에게 주는 상이라 생각했다.

오늘 같은 날엔 기분 좋게 취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후회는 없어. 앞으로 보고 싶을 때마다 함께 일하며 보낸 시간을 꺼내 추억할 수 있게 됐잖아. 그걸로 충분해.’

이어지는 희연의 선창에 맞추다 보니 금세 취기가 올라왔다.

“은재 씨, 얼굴 엄청 빨개. 어머, 목까지 빨개진 거 봐. 괜찮은 거야?”

“나 원래 술 한 잔만 마셔도 그래. 괜찮아. 아니, 괜찮을 거야.”

“그러다 픽 쓰러지는 거 아니야? 내가 어디서 봤는데 몸에서 알코올이 안 받는 사람은 술 딱 한 잔 마셨는데도 정말로 쓰러지는 사람이 있대.”

“쉿! 좀 조용히 해. 목소리가 왜 이렇게 커.”

“흐흐, 내 목청이 좀 크긴 하지. 그래도 자기 걱정되니까 그러지.”

“괜찮다니까 그러네. 상태가 이래도 바람 좀 쐬고 들어오면 금세 괜찮아지거든…….”

“그래? 그럼 지금이라도 얼른 조용히 나갔다 와. 분위기 보니까 그냥 여기서 끝낼 분위기는 절대 아닌 것 같으니까. 아니다, 내가 같이 가 줄까?”

“그럼 더 눈에 띄지. 그냥 나 혼자 조용히 나갔다 올게.”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자신 때문에 흐트러뜨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수선한 틈을 타 조용히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는 게 좋을 듯싶었다.

“아까 들어오다 보니까 여기 엄청 넓은 것 같던데 괜히 혼자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이라도 잃으면 어째. 응?”

“내가 애야? 바보 취급은 사절입니다. 멀리 가지도 않을 텐데 뭘……. 그리고, 알지?”

은재는 해연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혹시 팀원 중 누구라도 자신을 찾으면 알아서 잘 둘러대 달라는 부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