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현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성보단 감성이 앞서는 새벽 시간. 어두운 집 안을 홀로 밝히고 있는 TV에선 로맨스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테이블엔 빈 맥주 캔들이 나뒹굴었고, 소파엔 몸이 포개진 두 사람이 비스듬히 누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술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나른한 의진의 시선이 제 아래에 누워 있는 이현의 드러난 목선으로, 그리고 입술로…. 느리지만 분명하게 옮겨졌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덴 듯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낯선 감각에 이현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하….”

의진이 내쉰 숨결이 이현의 입술에 닿았다.

뜨거운 온기에 이현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이현의 뺨을 매만지던 의진의 손은 곧 이현의 허리께로 내려갔다. 느리지만 진득한, 의도가 분명한 손길에 이현은 흡, 하고 달뜬 숨을 삼켰다.

이래도 되는 걸까. 아니. 안 되지. 안 되는데…. 어쩔 줄 몰라 하던 이현의 시선이 벽면에 걸린 웨딩 사진에 닿았다. 조금은 촌스러울 만치 커다란 웨딩 사진. 그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는 자신이 맞았지만, 남자는… 지금 제 위에 올라타 있는 의진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니,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저 때까지만 해도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이현이 가빠지는 숨을 가리기 위해 입술을 짓이겼다.

“결혼도 안 한 몸으로 웨딩 촬영부터 하다니. 하아, 이 은혜를 대체 어떻게 갚을 거지?”

“원래 웨딩 촬영은 식 올리기 전에 하는 거거든?”

웨딩 촬영 때 자신을 놀리며 세상 악랄한 미소를 짓던 것이 바로 사진 속 의진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의진에겐 장난스러운 미소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쁜 버릇은 다 갖고 있지, 아주.”

의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이현의 입술을 매만졌다. 짓이겨지던 입술이 아플 것 같아 한 순수한 행동이었지만, 문제는 이현에겐 그런 접촉마저도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그만하라고 말해야 하는데… 멈추고 싶지 않아. 오히려 더… 조금 더….

이현의 이성과 본능이 격렬하게도 싸워댔다. 웨딩 사진이 나온 것이 불과 며칠 전, 그렇다는 것은 두 사람이 아주 따끈따끈한 신혼부부라는 것이었다.

신혼부부에게 지금 같은 상황이란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이현은 본능에게 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의진도 마찬가지였는지 금방이라도 짙은 입맞춤을 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의 입술은 맞닿지 못하고 근처를 맴돌았다.

그러나, 이제 이현은 더 이상 제 허리를 지분거리는 의진의 손을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머릿속 한편에선 멈춰야 한다고, 더는 위험하다고 스스로에게 경고했지만, 그럴수록 숨결은 더욱 뜨거워졌다.

‘안 돼, 이이현. 안 돼. 안 돼. 돼. 돼…. 아악! 아니 안 돼! 우린… 우린……!’

이내 의진의 입술이 천천히 이현에게 가까워졌다.

‘우린… 진짜 부부가 아니잖아!’

그랬다. 혼인 신고서가 아닌 갑과 을로 이루어진 계약서가 맺어 준 가짜 부부. 그게 이현과 의진이었다.

본의 아니게 온 세상을 대상으로 한 이 대대적인 연극은 아주 작은 거짓말로 시작됐다. 7년 사귄 구 남친에게 자존심을 세우려던 과거의 이이현이 한, 아주, 아주, 아주… 작은 거짓말로부터.

작은 게… 맞나?

#1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늘 그랬듯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온 이현은 적당히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꿈을 좇겠다며 멀쩡한 회사는 때려치웠지만, 먹고살기는 해야 했으니.

또 늘 그랬듯, 이현은 항상 비슷한 시간대에 배달 오는 편의점 물건들을 매대와 창고에 정리하며 채워 넣고 있었다. 단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이현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랄까. 항상 같은 시간대에 찾아오는 단골손님. 이현은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순히 단골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긴 좀 애매한, 그런 손님을.

딸랑, 종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릴 때마다 이현은 창고에 있다가도 후다닥, 매대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도 후다닥 튀어나왔다.

그러나 매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의 얼굴을 확인하곤, 김빠진 얼굴로 영혼 없이 인사만 반복했다.

그때, 또 한 번 딸랑, 종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그만큼 실망했으면 덜 기대할 법도 하건만, 이현은 또다시 반색했다.

드디어 왔나…! 문을 등진 채 맥주병을 정리하고 있던 이현이 신나서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이이현…?”

기다리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저를 찾아올 거라 예상했던 목소리도 아니었다. 이 목소리가 여기서 나올 수는 없는 건데. 여기서 들리면 안 되는 건데.

고작 이름 세 글자가 불렸을 뿐인데, 이현의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현아….”

그러니까 이 목소리는, 그토록 그리워했지만 또 그와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제일 듣고 싶지 않았던…….

무려 7년을 만났던 전 남친의 목소리였다.

**

1년여 만에 듣는 목소리였지만, 이현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도지한. 7년을 만난 자신의 전 연인, 그 사람이라는 것을.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그 사람을…. 설마설마하면서도 이현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현아! 너! 네가 왜 여기…. 회사는 어쩌고 왜 여기서….”

역시나, 돌아본 곳에 서 있는 건 지한이었다. 지한은 이현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놀랐다 한들 이현만큼이나 놀랐을까.

지한과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던 이현은 그만 손에 들고 있던 맥주병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쨍그랑, 기분 나쁜 파열음을 내며 깨진 맥주병은 바닥으로 날카롭게 흩어졌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이현은 재빨리 쭈그리고 앉아 깨진 병 조각을 손바닥 위로 하나씩 주워 올렸다.

이렇게 잠시라도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게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현아.”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지만, 이현은 더더욱 고개를 푹 숙이고 깨진 유리 조각을 주웠다. 1년 만에 지한을 마주하고 든 생각은 반가움도, 원망도 아니었다.

‘쪽팔려. 왜, 왜 하필….’

왜 하필 이런 모양새일 때 지한과 마주해야만 했는지, 빌어먹을 우연에 믿지 않던 신까지 원망스러웠다. 엉망이 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의 꼴이 얼마나 볼품없을지 애써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최악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이현을 비웃기라도 한 듯, 최악의 악을 만드는 목소리 하나가 더 들려왔다.

“지한아! 갑자기 그렇게 뛰어가면 어떡해!”

한채경. 1년이 지났건만 지한의 목소리처럼 절대 잊히지 않는 목소리였다. 지한의 오랜, 아주 오랜 친구였던 채경은 친구라는 명목하에 지한의 곁을 맴돌았다.

지한과 이현의 이별은 오롯이 두 사람의 문제로 인한 것이었지만, 채경의 지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채경의 등장에 유리병 조각을 줍던 이현의 손이 파르르 떨려 왔다.

도지한 옆에서 난 사라졌는데, 한채경은 여전히 함께였구나. 이현이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여기 모자!”

그래 모자, 중요하지. 이현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쌓여 있는 맥주병을 바라봤다. [시원함이 다르다!] 라벨지엔 광고 문구와 함께 환히 웃고 있는 지한이 함께였다.

가장 핫한 배우들만 찍는다는 맥주 광고, 그 메인 모델이 바로 지한, 이현의 전 남친이었던 것이다.

“연기는 나랑 안 맞아. 난 평생 노래나 하다 죽을 팔자인 거지, 뭐.”

지한이 처음부터 배우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첫 시작은 싱어송라이터, 가수였다. 이현이 처음 지한을 만난 것도 그가 한강에서 버스킹을 할 때였으니, 지한의 꿈은 확고했다.

그리고 그 오랜 꿈은 점차 날개를 다는 듯 보였다. 작지만 인디 밴드들에게 입 소문난 소속사와 계약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성공을 목전에 둔 것처럼 보였으나 인기는 늘 지지부진 제자리걸음이었다. 소극장에서 공연할 만큼의 인지도는 생겼지만, 그 애매한 인기와 애매한 성공이 지한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랬던 지한이 돌연 배우로 전향한 후, 급작스럽게 승승장구해 지금의 대세 배우가 된 것은, 이현과 이별한 후의 일이었다.

“한채경, 잠깐.”

“아이, 빨리. 이러다 또 뭔 기사를 내려고! 일로 와봐!”

이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봤다. 채경은 이현과 지한의 가운데에 서서 지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이현에겐 그녀의 등만 보였지만,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지한에게 직접 씌워 주는 그 행동은 너무나도 분명히 보였다.

우정보단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이 확실한 그 다정한 손길을 지한은 잡아 내렸고, 그와 동시에 지한과 이현의 눈이 마주쳤다.

‘왜 또 내 눈치를 봐? 왜 나한테 뭔가 잘못했단 듯이…. 그렇게 또….’

늘 이런 식이었다. 데이트하다가 채경에게 전화가 오면 지한은 저런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봤다. 친구 사이를 망칠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받으라고 하면, 곧 이런 말이 들려왔다.

“어쩌지. 한채경이 많이 아픈가 봐. 응급실이라는데….”

말끝을 흐리는 건, 미안하다는 뜻이었다. 미안한 짓을 할 땐 말을 끝맺지 못하는 지한의 버릇을 이현은 잘 알았다. 그리고 그건, 이미 채경에게 가기로 결정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식의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이현은 실감했다. 지한의 우선순위에서 적어도 난 한채경의 밑이구나. 나에게 한없이 다정했지만, 나에게만 다정한 것은 아니었던 사람. 그것이 도지한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현은 익숙해지지도 않고 꼬박꼬박, 착실히도 상처받았다.

미련했지만 그렇게 미련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싫은 소리 한번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이 모습이 떠오른 이현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앗!”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유리병을 주웠으니. 유리 조각에 베어 버린 이현의 손바닥에선 순식간에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현아!”

이현의 신음 소리에 지한은 채경을 옆으로 밀쳐내고 이현에게 다가왔다. 채경이 볼품없이 밀려났지만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고 있던 이현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현에게 다가온 지한이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지한의 손이 자신의 손에 닿는 순간, 이현의 심장은 속수무책으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지한의 손이 맞닿은 곳에선 불에 덴 듯 뜨겁게 열이 올랐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 긴 시간 동안 습관처럼 잡고 있던 손이었다. 그 따뜻한 온기가 이현을 더욱 아프게 했다.

“괜찮아? 내가 해야 했는데 정신이 딴 데 팔려서…. 봐봐, 안 되겠다. 병원 가자!”

지한이 이현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애써 필요 없다고,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이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채경이 두 사람 앞을 막아섰다.

“진정해, 지한아. 지금 병원 가면 여러 소문이 따라붙을 거야. 알잖아. 저번에 나 응급실 데려가 준 날, 어떤 찌라시가 돌았는지.”

채경의 말에 지한은 멈칫했다. 그 망설임은 그대로 이현에게 상처가 됐다. 헤어진 후에도 난 또 같은 문제로 아프구나. 그래, 이거였다. 너와 내가 헤어진 이유.

이번엔 인기한테 밀린 거려나. 잠시 흔들렸던 자신이 비참하기까지 했다.

이현은 지한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냈다. 지한 또한 그런 이현의 손을 쉽게 놔주었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심장이 저릿해 왔다.

“약국… 약국 다녀올게. 잠시만 있어.”

지한은 이현이 말릴 새도 없이 빠르게 편의점을 나섰다. 매장 안에는 채경과 이현, 두 사람만이 어색한 적막과 함께였다. 먼저 그 적막을 깬 것은 채경이었다.

“잘 지냈어?”

“나야 뭐. 너는?”

“나는 잘 지냈지. 아, 방금 병원 못 가게 한 건 미안해. 지한이가 요즘 워낙 핫해서 그만큼 말도 많이 나오거든. 친구로서 막아 줄 수 있는 건 막아 줘야 하잖아? 저번에 내가 응급실 실려 갈 때는 지한이가 너무 놀라서 모자도 안 쓰고 쫓아오는 바람에 사람들이….”

“친구 확실해?”

“어?”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굳이 굳이 늘어놓는 것은 채경의 특기였다. 늘 저렇게 지한과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이현에게 떠들어대며 속을 뒤집었다.